아! 형산파 33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332화
332화. 상봉(相逢) (2)
그들이 그렇게 가버리자 점창파의 장로는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도움을 줄 것 같더니만 저리 가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점창파의 장로가 적운상을 봤다. 적운상은 태룡도를 거두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우… 알겠네. 이쯤 하세나.”
적운상과 이현이 싸우는 것을 보느라 한 대 얻어맞고 정신을 잃고 있는 제자를 챙기지도 않고 있던 그가 그제야 제자를 부축했다.
“이후에는 서로 간에 조심하세나.”
마지못해서 그렇게 말하면서 점창파의 장로는 제자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주양악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적 사형.”
“사형.”
그제야 은서린을 비롯한 형산파의 제자들이 적운상을 반기며 모여들었다. 모두들 소란이 이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왔다가 적운상을 봤지만 이현과 싸우고 있어서 말도 걸지 못했었다. 설마 오자마자 여기서 비무를 하는 건가 놀랐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안심을 했다.
적운상은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태룡도를 집어넣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적교희가 눈을 빛내면서 쳐다봤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다.
* * *
적운상은 막정위에게 인사를 한 후에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산파 뒷산에 위치한 조사묘로 향했다. 가는 길에 구혁상의 묘에 들려 들고 온 술을 두루두루 뿌렸다.
“사숙조님, 저 왔습니다. 별고 없으셨죠? 삼 일 후에 비무를 합니다. 훗! 상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아마 사숙조님이 알았다면 깜짝 놀랐을 겁니다. 옛날에 새외를 돌 때처럼 뒤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사숙조님이 키운 이 적운상의 명성이 만천하에 울리게 될 겁니다. 더불어 형산파의 명성도 그리될 겁니다. 그 정도면 사숙조님의 염원도 풀리는 거겠지요?”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신 적운상이 빈 술병을 옆에 내려놓았다. 만약 구혁상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병을 낚아채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 적운상은 가진 무공을 모두 펼쳐서 그것을 막았을 테고.
한참을 거기에 앉아 있던 적운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사묘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 묻힌 임옥군의 묘에도 술을 뿌리고 절을 올렸다.
앞으로 삼 일 동안 적운상은 여기서 머물 생각이었다. 비무를 하기 전에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것이다.
조사동 안으로 들어가자 예전에 베기를 익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적운상은 그 흔적들을 보고 미소를 짓다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에 와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되돌아보는 것뿐이었다. 적운상은 눈을 감고 구혁상을 따라가서 무공을 익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적운상은 의식 속을 깊게 침전해 들어갔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는 단계에 들어서자 이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 * *
주양악과 백수연은 함께 조사묘에 왔다가 그대로 있는 바구니를 보고는 서로를 봤다. 벌써 이틀째였다. 이틀 동안 두 사람은 매끼마다 바구니에 식사를 담아서 왔지만 적운상은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사묘 안으로 들어가자니 방해가 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쩌지?”
“나도 모르겠어요. 한번 불러볼까요?”
주양악이 하는 말에 백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혹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중이면 자칫 내상을 입을 수도 있어.”
“그럼 오늘도 그냥 가야겠네요.”
“그래야지.”
백수연이 힘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바구니를 바꿔놓고 형산파로 돌아갔다. 그러자 수풀에서 누군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모습을 보였다. 적교희였다.
그녀는 살금살금 조사묘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깜깜한데 불을 밝혀놓지 않아서 굉장히 어두웠다. 게다가 스산한 기운까지 느껴져서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적교희는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적교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적교희가 접근하는 바람에 명상에서 깬 적운상은 어이가 없었다.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니 처음 보는 소녀였다. 소녀가 누군지 잠시 생각하던 적운상은 아마 길을 잘못 들어섰을 거라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묘 입구에로 나가보니 식사가 든 바구니가 있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가져온 성의를 봐서 조금 배를 채웠다. 이틀 만의 식사였다.
하지만 적운상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느낌상으로는 아주 잠깐이 지난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자 바구니에 챙겨 넣고 느긋하게 형산파로 향했다.
그러다 우측의 수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쪽을 봤다. 모습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 그 소녀가 분명했다.
“나와.”
적운상의 말에 적교희가 머뭇머뭇하며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적교희는 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만 올려 적운상을 힐끔거렸다. 적운상은 그런 적교희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 아니 저는, 음… 오라버니를 만나려고…….”
“나를?”
“예.”
“나를 왜?”
“그게… 그러니까…….”
적교희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달빛에 비춰지는 적운상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다. 형산파 정문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적교희는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밤이 늦었으니 내려가자.”
적운상이 그렇게 말하며 먼저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적교희가 재빨리 적운상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저기, 그러니까… 저 기억 안 나죠?”
뜬금없이 묻는 말에 적운상은 적교희를 가만히 뜯어봤다. 조금 낯이 익은 것도 같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그렇게 오래되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죠. 저도… 오라버니가 업어주던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걸요.”
“뭐? 내가 널 업어줬었다고?”
“네.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이 안 나죠?”
적운상은 다시 한 번 적교희를 유심히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자 그제야 이름을 물어봤다.
“이름이 뭐지?”
“적교희요.”
“교희? 네가 교희란 말이야?”
적운상은 놀란 눈을 하며 적교희의 양팔을 꽉 쥐었다. 그러자 적교희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아파요, 오라버니.”
“정말 네가 교희야? 여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지. 그게 아니라.”
적운상은 웬만해서는 당황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나 놀랐는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적교희는 적운상의 배다른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여덟 살 때 금자 몇 냥에 팔려 관대평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 적운상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집에 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집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바쁘게 사느라 금방 잊었다. 게다가 집에서도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었다. 당연히 잊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적교희가 찾아온 것이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적운상은 잠시 적교희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적교희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남매지간이기는 했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너무나 어색했다.
“가자. 일단 내려가서 이야기하자.”
적운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적교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적교희는 반항하지 않고 말없이 끌려가면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적운상의 손을 봤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크고 두툼한 손이었다.
* * *
“어! 적 사형, 내려왔군요.”
도자명이 적운상을 보며 말을 걸었지만 적운상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적교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걸 보고 도자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여유 없는 적운상의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마침 백수연과 주양악이 오는 걸 보고 도자명이 그녀들을 불렀다.
“주 사저.”
“응?”
“적 사형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뭐? 적 사형이 왜? 가만, 너 적 사형을 봤어?”
“응. 방금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래?”
주양악은 도자명을 밀치다시피 하면서 지나쳐 가 적운상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적운상이 웬 소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어? 아니, 조사동에서 내려왔다기에.”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자.”
“응.”
적운상의 눈치를 보며 주양악은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적교희를 봤다. 내일이 비무이건만 여자와 희희덕대고 있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대놓고 축객령이라니.
주양악이 방문을 닫고 나오자 옆에 와 있던 백수연이 물었다.
“누군지 알아?”
“누구요? 같이 있는 여자?”
“그래.”
“아니. 처음 보는데. 누구지?”
“적 동생의 얼굴을 보니까 심각하던데.”
“그러게요.”
“지금은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자.”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도 사제, 혹시 적 사형이랑 같이 있는 여자 누군지 알아?”
“아니. 나도 처음 봤어.”
“흐음. 슬쩍 엿들을까?”
“적 동생이 모를 리가 없잖아. 나중에 물어보면 이야기해주겠지. 가자.”
“궁금한데…….”
투덜대면서도 주양악은 백수연을 따라갔다. 그녀들이 멀어지자 적운상이 적교희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물었다.
“아버지는?”
“건강하세요.”
적운상은 별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적운상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바빴다. 돈이 많은 부호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살갑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세가를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적운상의 어머니와 정략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는 적교희의 어머니였다.
몸이 약했던 적운상의 어머니는 산고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적운상이 무사히 태어난 것만도 기적이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죽자 첩이었던 적교희의 어머니가 정실이 되었다.
“상영이는 잘 지내?”
적상영은 적운상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어머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어렸을 때는 적운상을 많이 괴롭혔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네. 잘 지내요. 월영매화문의 정식제자예요.”
“그렇구나.”
잠시 어색하니 침묵이 흘렀다. 그 외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떨어져서 지낸 세월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이다.
차를 홀짝이던 적운상이 침묵을 깼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소문을 들었어요, 오라버니에 대한.”
“단지 소문만 듣고 찾아온 거냐?”
“네. 아닐지도 모르지만 혹시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몰래 빠져나왔어요.”
“나는 내일 중요한 비무를 해야 해. 지금 너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 비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아니요. 안 갈래요.”
“가야 돼. 네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
“이유가 없다니요? 오라버니가 있는데요.”
“됐다. 어디서 묵고 있어?”
“객방이요. 오라버니, 나는…….”
적교희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적운상이 손을 들어 말렸다.
“그만! 시키는 대로 해. 정 여기에 있고 싶으면 허락을 받고 다시 와.”
“오라버니.”
“그만 가서 쉬어. 그리고 당분간은 내 동생이라는 것은 밝히지 마.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은 자들이 너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오라버니.”
“이제 그만 가봐.”
적교희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적운상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적운상을 만나기 위해 적교희는 많은 용기를 내야 했고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런 것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이리 대하니 그런 마음이 들 만도 했다.
“알았어요. 그럼 쉬세요.”
적교희가 방을 나가자 적운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적운상에게 집은 형산파고 가족은 사형제들이었다. 더 이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신을 내치고 십여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만나니 마음이 흔들렸다. 비록 반쪽짜리 피라도 그것이 혈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