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5화
14화. 운남에서 온 손님
“형님! 형님!”
딱!
“아얏!”
조반을 하고 있던 소청이 숟가락으로 꿀밤을 주자 소강이 제 머리를 두 손으로 쥐었다.
“형! 이라고 부르랬잖아.”
“에이, 그게 말처럼 쉽나요.”
“신경 써서라도 고쳐!”
“네.”
소강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 웬일이야? 아침 댓바람부터.”
“아! 그게요. 팔괘연환 때문에요.”
“왜?”
“그게 이상하게 팔괘연환이 되질 않아요.”
근래 소강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가문의 성세도 그렇지만 아마도 지난 삼 년간 늘어난 자신의 성취에 기분이 좋아서인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밥 먹었어?”
“예? 아니요. 아직.”
“그럼 같이 먹자. 왕칠 아저씨.”
“예. 도련님.”
“수저 좀 챙겨 주세요.”
“예.”
왕칠로부터 수저를 받아 들던 소강이 그제야 눈앞에 상황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청이 식사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왜 그 자리에 왕칠이 함께하고 있는 걸까?
더욱이 같은 상에서…….
“아니 지금 자네 뭐 하는 건가? 어찌 형님과 겸상을?”
“예? 아, 그것이…….”
“뭐가? 왜?”
소청이 묻자 소강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러시면…….”
“시끄럽게. 왕칠 아저씨도 식사를 못 하셨다고 해서 같이 드시자 청했다. 어서 먹어.”
“하지만…….”
“불편하면 네가 따로 먹든가.”
“…….”
소청의 핀잔에 소강은 어쩔 수없이 숟가락을 떴다.
다 비운 밥상을 내 가고 난 뒤에 잠시 산책이나 하려는데 허드렛일을 해 주는 여인이 빨랫감을 가지러 찾아와 소청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빨랫감은 따로 쌓아 뒀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도련님.”
여인이 사라지고 난 뒤 소강은 소청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흘낏거렸다.
“왜?”
“예?”
“아까부터 자꾸 쳐다봤잖아.”
“그게,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어째서 집안의 사람들에게 존대를 하십니까?”
“이상해?”
“당연하지요. 형님은 지금 사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진가의 대공자입니다. 저들과는 신분도 다르고…….”
딱!
“아얏!”
같은 자리에 또 꿀밤을 맞았다.
“신분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잘나서 세가의 이 공자로 태어났냐? 태어나 보니 이 공자였지. 잘 태어난 것이 저들에게 반말을 해도 되는 이유라고 생각해?”
“…….”
소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분제에 젖어 있던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소강아, 태어난 것만으로 네가 저들보다 신분이 높다 생각해선 안 돼. 저들이 너를 스스로 높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해야지. 저들이 없으면 네가 말하는 그 신분도 없는 거야.”
“…….”
“너는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형님이…….”
“됐고! 일단 들어.”
따끔한 소통에 소강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네가 저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저들도 너를 존중하지 않는다. 가문이 커지고 그들을 모두 끌어안으려면 저들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진심으로 너를 따르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일가의 우두머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야.”
소청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흠, 어차피 형님이 가주가 되겠지만 알겠습니다. 형님이 그렇게 하니까 저도 그렇게 할래요.”
소청은 피식 웃었다.
‘그래, 천천히 하나씩 바꿔 가면 되는 거야.’
어느새 소청에게 소강은 나이를 먹으나 먹지 않으나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되었다.
소진각의 연무장으로 돌아온 소청은 자신의 앞에서 팔괘연환을 보여 주는 소강을 응시했다.
‘저놈만 키워 놓으면 되는데……. 흠, 역시 내력이 부족한가? 어쩔 수 없지.’
소강의 단전에는 지난 이 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 덕에 밤톨의 반만 한 내공이 쌓였다.
진가월창의 기본 초식이나 패월창의 개별 초식은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덟 개의 초식을 잇달아 펼쳐 낼 때는 이상하게도 일정 내력이 되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 잊고 있었구나.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겪었었는데.’
소청은 무아의 상태로 수련하던 삼 년을 떠올렸다.
“됐다. 그만!”
“예?”
“그만하면 되었다고.”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똑같은데요? 팔괘연환이 되지 않는데…….”
“그건 네 문제가 아니다.”
“예?”
소청은 씁쓸하게 웃으며 소강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 형이 해결해 줄 것이고.”
“…….”
소강은 빙긋이 웃는 형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만 갸웃거렸다.
‘흠, 어떤 놈이 좋을까? 내가 떠나면 진가를 이끌어야 하니 일반적인 놈으로는 턱도 없고…….’
소청은 소강이 볼을 부풀리던 말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맞다! 그놈이 있었지!”
소청의 눈이 밝게 빛났다.
“소강!”
“예?”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밥 먹고 자는 시간, 아니 자는 시간도 줄여서 진가 본공과 팔괘공의 심법을 번갈아 가면서 수련해.”
“예? 하지만 창술을 겸하지 않으면 내공이 그다지 늘지 않는다고…….”
“늘 필요 없어! 최대한 익숙해져야 해. 무조건! 알겠어?”
“예? 예.”
역시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소강은 일단 대답을 했다.
“그럼 다녀오마.”
“예? 갑자기 어딜?”
“그런 게 있어! 너는 수련이나 해.”
“예.”
소청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는 소강을 놓고 짐을 챙겼다.
소청은 집안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떠나 버렸다.
“하아, 도대체 형님은…… 정말 도깨비가 따로 없다니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형으로 인해 긴 한숨을 쉰 소강은 연무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언제나 형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으니까.
* * *
당가 내성의 삼양전.
“보고하라.”
태사의에 앉은 당구독의 말에 녹의인이 입을 떼었다.
“운남의 소식입니다.”
“생사독이라는 자에 의해 통일되었다지?”
“예!”
“과연 그렇군. 상세히 말하라.”
“고강족의 생사독이라는 자가 운남의 스무 개 부족을 통합했습니다. 운남성주가 그에게 대족장의 칭호를 내렸고, 천독곡 주위의 습지에 대한 자치권을 내렸습니다. 현재 대족장을 비롯한 부족들의 전사들이 사천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연락은 없었나?”
“예. 아직.”
“그에 따른 대책은?”
당구독이 슬쩍 눈을 돌리자 만독전의 주인 당욱이 웃으며 대답했다.
“목가가 운남의 대부족인 이창족과 오랫동안 철광을 거래해 왔고 본가는 수이족과 독물 거래를 이어 왔습니다. 제법 연이 깊으니 새로 대족장이 이어졌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아마 사천으로 오는 이유도 본가를 염두에 둔 행로일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당구독이 언짢은 목소리로 되묻자 당욱이 마른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피독주를 잃어버린 이후로 눈칫밥을 먹고 있는 처지였다.
“만독전주. 생사독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보시오.”
“그, 그것이…….”
타앙!
당구독이 철로 만들어진 의자 팔걸이를 때리자 시끄러운 쇳소리가 삼양전 안을 울렸다.
“쯧쯧, 그런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죄, 죄송합니다.”
혀를 차며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 당구독이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생사독에 대해 말하라.”
“예!”
당욱의 옆에 있던 당가 비선단의 당구창이 대답했다.
“생사독, 고강족 태생입니다. 성격은 포악하며 지독한 독종이라 합니다. 스무 개의 부족장 중 대항한 열다섯의 목을 뽑아 버린 이력이 있습니다.”
“흠, 쉽게 볼 인물이 아니군. 그래서 접촉은?”
“본가와 연이 닿았던 수이족 대족장은 통일 과정에서 죽었고 일단은 목가가 이창족과 연이 있으니 그쪽으로 접근해 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마땅한 거래처가 없으니 본가를 염두에 둘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가라…….”
당구독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태위의 비무 이후 그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졌다.
눈엣가시 같은 진가 때문이었다.
“진가가 진소청 그놈의 이름을 이용해 무관을 열었다지?”
“예. 가주. 그 주위의 땅까지 사들여서 당가타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당구창의 보고에 당구독의 몸에서 지독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이 감히!”
“아직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본가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아니겠습니까.”
당구독이 코끝을 찡그리며 힘을 주자 의자의 팔걸이가 으드득 소리와 함께 뜯겨 나왔다.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패혈산이 옷깃만 스칠 줄이야. 제대로 들어갔다면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이번 일이 끝나면 눈엣가시 같은 진가를 반드시 사천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당구독은 소청이 만독불침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텅.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팔걸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모두가 침묵했다.
“비선단주.”
“예, 가주.”
“생사독이 관심을 가질 만한 예물을 준비하라.”
“존명!”
“녹의단주. 지금 즉시 목가에 사람을 보내 이창족과 접촉하라. 그들을 대함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명을 내린 당구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외쳤다.
“상대는 운남이다. 이번 일은 본가가 중원 오대 세가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으니 모든 전각은 성심을 다하라!”
“존명!”
삼양전에 모인 모든 수뇌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독전주!”
“예? 예! 가주!”
당욱이 나가려다가 찔끔하며 돌아와 엎드렸다.
당구독의 표정은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듯 보였다.
“태위의 성취는 어떠합니까?”
“그것이……, 오 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
당구독은 순간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소청과의 비무에서 패한 당태위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난 뒤 별안간 독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때마침 암시장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물건이 들어왔다.
‘독우,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 삼두홍사의 독보다 수십 배나 강한 독성이라니…….’
당구독은 그것을 당태위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 년의 폐관 수련.
피마저 독이 된다는 당가의 비전이지만 몇 대 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한 만독해.
당태위는 그것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이 년 만에 오 성이라니…….
어쩌면 자신의 대에 독왕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당구독은 내심 그동안 아들에게 쌀쌀맞게 대한 것이 미안해졌다.
‘녀석, 독하게 마음을 먹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당구독이 당욱을 향해 물었다.
“오성에 오른 것인데 어째서 말하길 꺼려 합니까?”
“그것이…… 한 달 전부터 답보 상태입니다.”
“뭐라?”
“예. 다른 독들을 사용해 보았지만 모조리 듣지 않습니다. 같은 물건이 하나만 더 있어도…….”
당욱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암시장을 찾아가 봐야겠군.’
당구독은 의자에 앉으며 다짐했다.
* * *
당가의 회의가 있은 지 보름 후.
목하동은 당가와 소원해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무리해서 예물을 준비했다.
다행히 이창족장의 아들 타르다가 있어 대열에 합류하게 된 그였지만 대족장과 만날 수는 없었다.
언제나 대족장을 호위하는 전사들이 접근을 불허했고 목을 뽑는다는 소문이 있으니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됐어. 함께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다시 당가와 소홀해진 관계를 되잡을 수 있어. 망할 진가의 아들놈 때문에…….’
목하동은 진소청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갑자기 행렬의 머리가 방향을 틀었다.
“어?”
목하동은 타르다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당가는 이쪽이 아닙니다, 소족장.”
“응? 우리는 당가로 가는 게 아니오.”
“예?”
“간양의 진가. 대족장께선 그곳으로 가는 길이오만.”
“…….”
* * *
“흐흐흐, 삼두홍사보다 뛰어난 만년 먹은 설삼. 한참 전이라 걱정했는데 역시 사도련에 있었어. 이제 소강에게 먹이기만 하면……. 어?”
소강을 위한 선물을 구하러 갔다 보름 만에 돌아온 소청은 진가 본전각 앞에 잔뜩 모인 이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저건 운남 부족들의 복장 같은데?”
고개를 돌려 보니 운남의 부족들뿐이 아니었다.
목가 검장의 무인들이 함께 있었다.
“목가가 운남 사람들과 어쩐 일로 함께 온 거지?”
사람들을 제치고 들어가자 본전각 연무장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진가신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목하동이 있었다.
그리고.
“어? 당신?”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삼두홍사의 내단을 취했던 모자겸.
그가 소청을 발견하자마자 한없이 기쁜 얼굴로 엎드렸고 운남의 부족들이 일제히 외쳤다.
“은공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