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화
7화. 반로환동의 고수
간양을 떠난 소청은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서야 운남의 끝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름이라는 시간을 내리 달려 거대한 밀림을 만난 소청은 습지에 세워진 마을을 찾아 하루를 쉬었다.
모처럼 먼지에 찌든 몸을 씻어 내고 봇짐에서 흑색 가죽옷 하나를 꺼냈다.
“교룡피. 오랜만에 입어 보는군.”
피식 웃은 그는 교룡피를 입고 그 위에 의복을 걸쳤다.
차가운 느낌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웬만한 더위도 막아 준다더니.”
오는 내내 뒤바뀌던 날씨는 운남의 남쪽을 향해 갈수록 서서히 찌는 듯한 더위로 바뀌어 갔다.
“산마다 계절이 다르고, 십 리를 가면 기후가 다르다더니……. 교룡피가 아니었으면 더위와 싸울 뻔했군.”
객점을 나와 다시 말을 달린 그는 우거지기 시작한 수풀 그늘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들지 않음에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소청은 밀림이 깊어질수록 더욱 옷을 껴입으며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가렸다.
“벌써 시작이구먼.”
소청은 서서히 짙어져 오는 독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찾아온 곳은 운남의 남서쪽에 위치한 천독곡.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오지로 알려진 그곳은 용독술의 달인이라 불리는 당가, 운남의 오십 개가 넘는 부족들 중 독으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고강(古姜)족조차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소청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전생의 한 인물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모자겸.’
정천 오존에 비견될 정도의 강자이자 최초로 운남을 통일했던 그.
소청, 아니 막야는 당시 우연치 않게 모자겸의 거처로 숨어들었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강족의 전사이자 족장이었던 모자겸이 강해진 이유는 천독곡의 한 비지에서 그의 부족원을 수도 없이 죽였던 부상당한 삼두홍사를 발견하고 그 내단을 먹었기 때문이라 했다.
히이잉!
좀 전부터 걸음이 느려진 말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낀 듯이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구나. 고생했다.”
말에서 내린 소청은 갈기를 쓸어 주고는 엉덩이 때려 달아나게 했다.
“독장(毒瘴)인가?”
습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춰 선 소청은 인상을 찡그리며 코와 입을 막았다.
독장은 습지 등에서 동식물이 죽고 썩기를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의 독지였다.
천독곡의 독지는 다른 어떤 곳보다 그 농도가 강했다.
죽는 동식물이 모두 생전에 강력한 독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중심부로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현기증이 나는군.”
소청은 품을 뒤져 작은 옥갑을 꺼냈다.
“그래서 이걸 준비해 왔지.”
옥갑을 열자 뜨거운 열기를 품은 작은 구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흐흐.”
무엇이 그리 좋은지 소청은 음흉하게 웃으며 구슬을 사탕 먹듯이 입안에 넣었다.
* * *
“가, 가주!”
무림이 독선의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당가의 장로이자 현 가주의 숙부이며 만독전을 이끌고 있는 당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폐관동을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당태위를 폐관동으로 들여보내고 며칠째 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당구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피, 피독주가…….”
그의 말에 불안감을 느낀 당구독의 눈이 부릅뜨였다.
“피독주가 어찌 되었단 말입니까?”
“그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예?”
당가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피독주.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천고의 보물이었다.
당구독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려 만독전의 보고로 뛰어들어 갔다.
콰앙!
문이 부서질 정도로 열어젖히고 들어간 피독주의 보관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피독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당구독은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피독주만이 아니라 교룡피와 장갑, 내독단이 동이째로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당욱이 내민 작은 쪽지.
@[막야(莫夜)]
“마, 막야? 막야가 도대체…….”
한동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당구독이 눈에 불을 켜며 소리쳤다.
“당장! 찾아라! 막야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아니면 단체인지! 개방, 청루, 반하곡! 정사의 정보 조직을 가리지 말고! 돈이 얼마가 들든 반드시 찾으란 말이야!”
당구독의 분에 찬 고함이 당가를 울렸다.
* * *
“역시 당가의 피독주. 훔쳐 오길 잘했구먼.”
무는 순간 온몸으로 퍼져 가는 청량감에 상쾌한 기분을 느낀 소청은 서슴없이 독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이제 속도를 좀 내 볼까?”
비마의 경공을 운용한 소청은 천독곡 안을 마치 앞마당 활보하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삼두홍사!”
천독곡을 돌아다닌 지 사흘째, 꾀죄죄해진 모습으로 변해 버린 소청은 짜증스럽게 주저앉았다.
“으아아! 여긴 또 왜 이렇게 넓은 거야!”
모자겸은 천독곡에서 얻었다고 했지, 정확하게 천독곡 어디에서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계곡 정도라 생각했던 천독곡은 너무 넓었다.
“으아아아! 아아아!”
솟구치는 짜증에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발광을 해 대는 그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게 뭔 소리야?”
정신을 차린 소청이 귀를 기울이자 신음 소리가 섞인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시오. 살려…….”
천독곡에서 사람 소리라니?
“운남에 부족들이 많다더니 그들 중 하나인가?”
소청은 수풀을 헤치며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교룡피를 입고 피독주를 물었음에도 현기증이 날 만큼 진한 독연이 깔린 곳에 도착했다.
수십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몇몇은 시커멓게 피부가 썩어 이미 목숨을 잃었고 몇몇은 깊이 중독되었는지 녹빛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누구지?’
그리고 그들 중 살려 달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젊은 사내.
무척이나 호방한 외모의 사내였다.
나름 일행 중 무공이 가장 높았던지 중독 상태가 덜해 보였다.
“흠.”
소청은 잠시 고민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죽게 내버려 둬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이 없었지만…….
‘괜히 남의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지만…… 제길, 이놈의 오지랖!’
소청은 품에서 교룡피로 만들어진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물론 그것 역시 당가의…….
소청은 어쨌든 독연의 범위에서 멀찍하게 떨어진 곳까지 사람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그리고 입을 벌려 물고 있던 피독주를 넣었다가 피부색이 돌아오면 내독단을 꺼내 먹이기를 반복했다.
“이 씨 더러워. 괜히 했나?”
마지막 사람의 입에서 빼낸 피독주를 깨끗한 천을 꺼내 닦은 소청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에 물었다.
닦았다 해도 남의 침이 남아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 일단 중독은 해결되었고 깨어나면 꽤나 추울 테지.”
나무를 잔뜩 주워 모은 소청은 패월창을 꺼내 부싯돌로 때렸다.
화륵!
순식간에 불꽃이 일어났고 주위가 훈훈해졌다.
“으으…….”
얼마 가지 않아 중독 상태가 가장 약했던 젊은 사내가 깨어났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누, 누구?”
어느 정도 회복된 그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넙죽 엎드렸다.
“저, 저희를 살려 주신 겁니까?”
“뭐, 어쩌다 보니. 하지만 이미 늦은 이들이 있어서…….”
“가, 감사합니다! 은공!”
사내는 엎드려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됐고, 불이나 좀 쬐세요. 막 해독되었으니 추위가 몰려올 겁니다.”
“아!”
사내는 얼른 불 앞으로 다가서며 소청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다. 이 천독곡에서 저리 여유롭다니. 더구나 심각하게 중독된 우리를 살려 내다니. 도대체 내공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어려 보이는데……. 설마? 전설에만 전해지는 반로환동의 고수?’
혼자서 수많은 오해를 쌓으며 소청을 정의하던 그때 그의 동료들이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은공!”
깨어난 자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먼저 깨어났던 자가 수장이었던지 그의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은 일제히 엎드려 감사를 전했다.
“됐어요.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고…….”
그의 말에 감격한 표정을 짓는 이들의 모습에 소청은 대수롭지 않은 듯 손사래를 쳤다.
좀 고생하기는 했지만 원래 타인의 감사를 받는 것에 어색했고 목적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방해꾼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서둘러 일어났다.
“은공께선 중원인이십니까?”
“예.”
“아! 보아하니 나이도 어려 보이시고, 지리도 익숙지 않은 듯한데 어찌 이 험한 독지에……?”
동료 중 하나가 묻자 수장인 젊은 사내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옆구리를 툭 치며 속삭였다.
“반로환동의 고수시다. 저런 분들은 과거를 묻는 걸 싫어한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바, 반로환동?!”
나이가 얼마인지 원래의 모습이 어땠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게 반로환동의 고수가 아니었던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는 당장에 엎드려 사죄했다.
“아, 뭐 그럴 필요까지는…….”
소청은 서둘러 떠나려는 자신을 잡아끄는 그들의 행동에 조금 짜증이 밀려왔다.
“기인 덕에 저희가 목숨을 구했습니다. 가히 하늘의 인연이라 봐야겠지요. 소생 모자겸, 다시 살게 해 주신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아, 모…… 예?”
“예?”
“아, 아닙니다.”
모자겸이라니.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과거의 인연 중, 삼두홍사의 내단을 먹게 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면 이들이 고강족?’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던 소청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은공,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
“예? 아, 아닙니다. 헛헛. 그런데 무슨 일로 쓰러져 계셨던 것입니까?”
물음에 모자겸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이곳은 삼두홍사의 서식지입니다.”
“사, 삼두홍사!”
이번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예. 놈을 발견하고 공격했지요. 내독단을 먹었음에도 놈의 독기가 어찌나 강한지. 그리고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순식간에…….”
“흠. 삼두홍사의 서식지라.”
고민하듯 손으로 턱을 쓸었지만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다.
‘찾았구나, 삼두홍사. 착한 일을 했더니 하늘이 돕는구나. 크크크.’
“그런데 희한한 것은 서식지임에도 한 마리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삼두홍사는 무리 짓기를 좋아해서 적을 발견하면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습니까? 흐흠. 그것 신기한 일이네요.”
소청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나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아마 그 한 마리는 삼두홍사의 우두머리. 필시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일 거야. 흐흐흐.’
소청은 감정을 숨기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서 도망가야 하지 않습니까? 녀석이 또 나타나기라도 하면…….”
자신이 찾던 장소에 도착한 소청은 방해꾼들을 서둘러 쫓아 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예?”
“삼두홍사는 무리 짓기도 좋아하지만 영역 의식도 강하거든요. 제 영역에 들어온 먹잇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쯤 어디선가 저희를…….”
그 순간.
치이이익. 쉬익. 쉬이익.
독기에 풀들이 녹아내리는 소리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자겸과 그 일행은 지난 기억이 떠오르는지 기겁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오, 저게 삼두홍사?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
소청은 멀리서 여유롭게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붉은 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전생에 책으로만 봤지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셋이라서 삼두가 아닙니다. 삼두홍사의 삼두(三竇 : 세 개의 구멍)는 머리에 구멍이 세 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곳으로 독기를 뿜어내지요. 모든 것을 녹이는 진한 독을…….”
모자겸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설명하며 만도를 움켜잡았다.
‘안다. 알아. 이 자식아. 그리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소청은 그런 그들을 보고 있다가 단창을 빼 들고 그들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