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화
6화. 작은 바람이 일다
당가에서 돌아온 이후 알 수 없는 기류가 진가에 퍼져 있었다.
돌아온 날 바로 소집된 진가의 가주 회의가 심각한 분위기로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날 이후 침체되어 있던 진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활력이 넘쳤고 무언가 뿌듯해하는 그런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세가에서 시작되어 간양의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갔다.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당가에서 있었던 소청의 이야기를 해 대었고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흥분하며 신난 얼굴이 되었다.
진가 주변의 아이들은 편을 나누어 당태위와 소청을 흉내 내며 놀았다.
물론 언제나 당태위가 악인이었고 소청이 이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원래 갑작스럽게 등장해 거대 세력과 홀로 맞짱(?) 뜨는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흥분을 자아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바람은 간양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당가는 물론이거니와 사천에 속한 모든 문파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퍼졌고 후기지수들은 이를 악물고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천의 바람이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소청은.
“젠장. 참았어야 했는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하고 있었다.
* * *
며칠 전, 사건이 있었던 당가.
승혜의 말을 들은 당구독은 당태위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 나서 밝은 얼굴로 돌아와 진가를 비롯한 아미와 청성 그리고 예하 세가들에게 사과를 했다.
당 가주가 방계나 예하의 문파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걸 본 진가신과 다른 가주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당가는 은원이 명명백백하기로 유명한 문파였다.
은혜를 입으면 배로 갚고 원수를 지면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암기를 날리는 가문이 바로 당가였다.
그런 당가가 사과를 했고 자존심을 꺾었다.
그리고 당구독은 진가신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 가주, 내 오늘 크게 개안을 했소. 자제분을 그리 대단하게 키운 줄은 몰랐소. 해서 말인데 아들 녀석이 한 수 배웠으면 하는데, 어떻소?”
진가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아들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진가신이 머뭇거리자 당구독이 소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떠냐? 내 생각엔 좀 더 뜻깊은 자리에서 우리 태위의 식견을 넓혀 주었으면 하는데?”
모두의 시선이 소청에게 집중되었다.
거절은 곧 당가의 사과를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승낙은 자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한 유흥임을 느낀 소청은 치밀어 오른 화에 호기롭게 대답해 버렸다.
“하지요! 그까짓 비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앞으로 석 달 후.
당구독은 그날 당가를 찾았던 모두를 모시고 비무 대회를 연다 공표했고 소가주 임명식은 자연히 그 이후로 미뤄졌다.
* * *
“아 젠장, 완전 더럽게 엮였어.”
소청이 제 머리를 벽에 쿵쿵 소리가 나도록 찍었다.
“이 멍충아. 그래 그걸 못 참냐?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눈 딱 감고 참았으면 진가와도 안녕인 건데. 아 정말 미치겠네.”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괜히 나서는 바람에 스스로 묶여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소청은 떠나오던 날 당구독과 당태위의 살기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질까 두렵지도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니 지금 다들 박수 치며 좋아할 때야? 비무에서 이긴다 해도 그 좀생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리고 사천을 떠나겠다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이런 미친 작자들 같으니!”
가주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그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비무 이후 당가의 핍박이 이어진다면 다른 곳으로 세가를 이전하겠다는 발표.
물론 수도를 천도하는 정도로 거대한 일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뿌리내린 터를 그리 쉽게 버릴 생각을 하다니 소청은 진가신을 비롯한 진가 식솔들이 미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세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활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유례없는 가문의 위기를 걱정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오히려 모두가 소청에게 웃는 얼굴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래. 됐어. 시팔 나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나? 일단은 이겨 주자. 다들 바라 마지않는데 당태위고 당구독이고 모조리 이겨 주자. 그러고 나서 시원하게 떠나면 되는 거야. 암!”
소청이 다짐하듯이 혼잣말했다.
어차피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꽤 책임감 있는 도둑이었다.
싸우기로 결심한 소청은 후에 진가를 떠나고 나서 실행하려 했던 계획을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당태위는 몰라도 전날처럼 당구독에게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
소청은 바로 진가신을 찾아갔다.
출행을 미루기로 한 이상 허락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님! 소자 청입니다.”
“들어오너라.”
힘이 잔뜩 실려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당가에 다녀온 이후로는 또 두문불출이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담담하고 근엄한 어조였지만 진가신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어리기만 했던 아들이 사천 제일의 기재라 불리던 당태위와 동수를 이루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던가? 이미 당가에서의 일이 소문이 나서 근래 진가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천에서 가장 회자되는 문파가 되었다.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표국의 손님이 배로 늘었고 표사로 지원하는 무인도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로 두문불출의 시간을 가진 아들은 또 어떤 놀라움을 가져올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 기대감이 오히려 소청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수련행을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
“수련행?”
“예.”
“…….”
진가신이 가만히 아들을 쳐다보았다.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었다.
차라리 가문의 비전을 가르쳐 달라든지 돈을 털어 영약이라도 구해 달라 해야 정상이었다.
진가신이 소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자신이 없는 게냐? 너무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 이미 가문을 옮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진가신의 말은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도 조심스러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청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구독을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아해하다가 진가신이 큰 소리로 한참을 웃었다.
당태위가 아니라 당구독이라니.
고작 열다섯 아들이 당가의 가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잔뜩 진장하고 있던 진가신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왠지 속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허어, 정말 너는 가끔 내가 아는 아들이 맞는가 싶구나. 오냐 좋다! 다녀오너라. 가서 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 보고 오너라.”
아들의 당당함에 진가신이 시원하게 승낙했다.
사실 소청은 허락을 받지 못해도 떠날 참이었다.
말은 물음이었지만 마음은 통보라 생각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풀리자 당황한 것은 소청이었다.
“네 어머니께 여비를 챙겨 주라 이르마. 그리고…… 언제 줄까 고민했다만.”
진가신이 일어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가문의 비보로 전해지는 창을 진열한 곳이었다.
소청의 눈에는 그다지였지만…….
“처음에는 우리 가문 최고의 창술가이셨던 오대조 할아버님의 ‘묵혈창’을 주려 했었다.”
그 말에 소청이 벽의 맨 위에 걸린 창에 시선을 두었다.
새빨갛게 녹이 슨…….
‘저걸 준다고? 움켜쥐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데?’
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는 지금까지 가문의 어느 누구와는 달라야 한다 생각했다. 굳이 과거와 연연할 필요가 없지. 너는 이미 새로운 길을 가고 있으니까. 당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말이다.”
“…….”
진지한 아비의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무거워지고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진가신은 두 자(60cm) 정도 되는 나무 함을 꺼내 왔다.
“너의 창을 처음 보았을 때 목가 검장에 어렵게 부탁해 만든 것이다. 백련정강에 묵철과 한철을 조금씩 섞어 만드느라 꽤 오래 걸렸지만 아마도 이전처럼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다.”
딸깍.
함이 열렸고 그 안에는 검은빛과 하얀빛이 뒤섞인 단창이 들어 있었다.
“이건?”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 네가 정해야 할 듯하여.”
“…….”
“쥐어 보거라.”
소청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창을 잡았다.
‘찌르르’ 하며 느껴지는 한기가 손을 타고 전해져 왔다.
두 자의 단창.
진가를 상징하는 초승달 무늬가 창날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창이 아닙니까?”
“그래. 어떠냐?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진가신이 어울리지 않게도 답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졸이며 소청의 눈치를 살폈다.
단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청이 빙긋이 웃었다.
“좋군요. 느낌이 좋은 녀석입니다.”
그러자 진가신의 표정이 환해졌다.
“내공을 불어 넣고 힘주어 내리치듯이 뻗어 보거라.”
“예?”
진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은 기운을 일으키며 단창의 끝을 잡고 힘껏 내리쳤다.
차자자작!
순간 단창 속에 감춰져 있던 대가 빠져나오면서 육 척의 장창으로 변했다.
파삭!
창날이 바닥에 흠집을 내었다.
“……!”
놀람을 감추지 못한 소청이 신기한 듯이 창대의 연결부를 눈여겨 살폈고 진가신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휴대도 간편하고 검과 창의 장단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언제까지 창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아마 언젠가는 필요에 의해 검이나 도를 익혀야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연결부는 특별히 한철과 묵철을 많이 넣었으니 웬만한 충격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껏 고수해 온 ‘창’이라는 가문의 전통을 벗어나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만년한철까지는 아니었지만 묵철과 한철이 아무리 적은 양으로 들어갔다 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비록 그것이 막야라는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아들인 소청을 위한 것이었지만…….
‘제길…… 자꾸만……. 어미라는 사람도 그렇고, 냉정한 줄 알았던 아비도 그렇고.’
소청은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 조금만 도와주자. 조금만. 어차피 진소청의 몸으로 다시 사는데 조금 도와준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그리고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내가 마무리 지어야지.’
소청이 결심을 하고 내공을 거두자 장창이 다시 단창으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진심이었다.
이 순간 소청에게 아비가 건넨 창은 이제껏 훔쳐 왔던 진귀한 보물보다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그래. 생각해 둔 이름은 있느냐?”
“음…… 패월이라 부르겠습니다.”
“패월(覇月). 으뜸가는 달이라. 좋은 이름이다. 본가의 월식창법을 펼치기에도 딱 맞는 이름이구나. 너처럼.”
“네.”
소청은 창을 쓰다듬었다.
제 이름이 지어진 게 좋은지 창의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 언제 떠날 참이냐?”
“마음을 먹었을 때 행하고자 함입니다.”
“뭐? 바로?”
“예.”
“허! 어디로 가려 하길래?”
“운남으로 가 볼 참입니다.”
“운남?”
운남은 습한 밀림 지대가 대부분인 곳으로 독물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아마도 용독의 제왕이라 불리는 당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진가신은 생각했다.
“알았다. 하지만 점심은 먹고 가거라. 떠나기 전에 가족이 다 같이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를 얻게 된 소청은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고,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가볍게 짐을 챙겨 든 소청의 뒷모습에 어미는 속절없이 눈물을 훔쳤고 소강은 간양 관도가 끝날 때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었다.
“왜들 이래? 다들. 평생 못 볼 것도 아니고 석 달만 있으면 다시 볼 텐데…….”
툴툴거렸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소청이 거세게 말채찍을 때렸다.
히이잉!
별안간 볼기짝을 얻어맞은 흑마가 깜짝 놀라며 질주했고 먼지바람이 부옇게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