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화
1화. 신투! 회귀하다
‘아이고 머리야.’
막야는 깨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눈을 떴다.
‘젠장. 조금만 더 가면……. 응?’
분명 청동상들의 무구가 몸을 꿰뚫었던 느낌이 선명한데…….
살았다.
“어? 이게 뭐야? 몸이?”
혹시나 해서 상처를 살펴보던 막야가 눈을 끔벅거렸다.
작았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너무도 앙증맞고 귀여운 손.
아무리 길게 뻗어 봐도 이전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짧은 팔.
까치발을 들어도 천장이 멀게만 느껴지는 작은 키.
“애가 됐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막야는 놀란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능한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분명해. 마지막 순간에 뿜어져 나온 빛이 조화를 부린 게야.”
막야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전설 속에 나오는 무슨 젊음의 샘도 아니고…….”
기운을 돌려 보니 단전에 내공이 미미하다 못해 흔적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좁쌀 같은…….
“허, 내공까지! 마천 비고, 이리도 신기할 줄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막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이었다.
소담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한 서가에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창문 아래 놓인 자개 서랍장 위에는 제법 손질이 잘된 분재가 놓여 있었다.
“어마어마한 관문의 뒤에 있는 마천 비고가 고작 이런 방이라니?”
하지만 어려졌다는 사실은 막야에게 기대감을 주기 시작했다.
사람을 어려지게 만드는 곳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보다 더욱 커진 기대감에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막야는 방 안을 세밀하게 살폈다.
“헛! 이런 귀한 물건이!”
서안(글공부용 탁자) 위에 놓인 용각 벼루를 발견한 그는 탐욕스럽게 눈을 떴다.
“대단한 장인의 작품……은 아니잖아. 잘 만들긴 했지만 황제의 용연(龍硯)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군.”
이리저리 살피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놓으려던 막야는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벼루를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지. 비고의 물건이 그럴 리가 없어. 설마! 무언가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절세의 초식이 어딘가에 적혀 있다든가? 기운을 주입하면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나타난다든가 하는?”
은근한 기대감에 그는 벼루를 품속에 슬쩍 집어넣고 허리띠로 고정했다.
“일단 가지고 나가자.”
도적에게 필요한 건 정확한 감정이 아니라 신속함이었다.
좋은 물건을 발견했다 해서 넋 놓고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잡히기 십상이었다.
마천 비고의 어떤 힘에 의해 어려진 상태라 공력도 무공도 사라졌다.
“애새끼 몸이 되고 나니…… 불편하네. 자, 서두르자.”
막야는 볼록하게 솟은 배를 하고 책장 위의 분재로 다가갔다.
“명색이 마천 비고인데 어디 보통 영초겠어? 보기엔 저래도 분명히 어마 무시한 공능을 가지고 있을 거야. 이 봐, 때깔부터가 곱잖아?”
그저 오엽송에 자금우(천량금)처럼 보였지만 막야는 그것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영초일 거라 생각하며 흐뭇하게 줄기를 움켜쥐었다.
푸학!
오엽송을 닮은 분재를 뽑아내자 흙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이건 뭐? 뿌리를 먹는 건가? 아니면 잎? 영물 도감을 외우다시피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오엽송을 품에 넣자 임산부처럼 배가 더 불룩해졌다.
“이건 희한하게 자금우 열매를 닮았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지.”
탐욕에 찌든 막야는 붉은 구슬처럼 생긴 열매를 모조리 따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 영초는 됐고, 그럼 이제 서책인가? 흐흐흐. 필시 보통 비급이 아닐 게야.”
음흉하게 웃은 막야는 책장으로 다가가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쳤다.
“…….”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
춘추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허허, 이 자식들 이런 책들 틈에 비급을 감춰 둔 모양이지?”
책을 빼내는 속도가 빨라졌다. 삽시간에 서가의 책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쏟아졌다.
하지만 책들은 모조리 유교 경전이요 정신 수양을 강조한 서적들뿐이었다.
“허억, 허억. 이 자식들! 설마? 제목을 바꿔 놓은 건가? 맞아! 분명히 바꿔 놓은 걸 거야!”
막야는 쏟아진 책들의 내용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망감만 더해졌다.
“이럴 리가 없어. 마천의 비고가 이따위일 리 없어. 설마? 파자?”
재차 책들의 내용을 세밀하게 살펴보았지만 너무도 평범했다.
“설마? 마천 비고의 보물이라는 게 겨우 어려지게만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핫핫핫. 그래, 일단 몇 권이라도…….”
막야는 머릿속에 생긴 불안감을 떨치며 늘어놓은 책들 중에 몇 권을 또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젠장, 애새끼의 몸은 여러모로 불편하군.”
품에 책까지 집어넣자 배는 물론 목까지 가누기 힘들어졌다.
그때, 밖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기침하셨습니까?”
‘뭐? 형님? 나 말고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나?’
막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가 들어왔다고 하기에는 방 안이 너무 작았다.
필시 인기척을 듣고 착각을 하는 것이리라.
‘근데 마천에 생존자가 있었나?’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열 살 정도 되는 아이의 것이었다.
‘뭐야? 마천 비고는 죄다 애들로 변하게 하는 거야?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일단 숨어야 하는데…….’
숨을 곳이 없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용을 써 대느라 이마와 등줄기로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형님?”
왜 자꾸 부르는 거야!
“형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안된다고 이 자식아!
“들어가겠습니다.”
안 돼애!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명색이 도둑인데…….
거침없이 문이 열리고 어린 소년이 당차게 들어왔다.
“형님.”
급한 마음에 창문을 향해 뛰던 막야는 엉거주춤하게 멈춰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멍한 얼굴로 막야를 쳐다보았다.
“아니 형님 뭐 하시는?”
투둑.
무게를 이기지 못한 복대가 풀어졌다.
투두둑. 쾅!
“아그극!”
쓸려 내려온 벼루가 막야의 오른발을 거세게 찍어 버렸다.
“형님!”
소년이 제 발을 부여잡고 뒹굴어 대는 막야를 향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근데…… 이게 뭔?”
뼛속을 파고드는 아픔에 좌우로 굴러 대느라 품속에 있던 분재와 책들이 삐져나왔고, 주머니 속에 들어갔던 자금우 열매가 터지며 옷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아니! 피!”
놀란 소년이 급히 밖으로 소리쳤다.
“왕칠! 왕칠! 게 있는가!”
“예, 작은도련님.”
다급한 부름에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뛰어들어 왔다.
“어서 아버님을 모셔 오고 강 의원을 부르게!”
“예?”
“빨리!”
“예!”
잠시 후, 웬 여인 하나가 연락을 받고 버선발로 뛰어왔다.
“아이고 소청아!”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자 막야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 이렇게 되면! 하압! 양사탈위(佯死脫危)!’
거짓 양! 죽을 사! 벗을 탈! 위급할 위!
오래전 ‘양 선생’이라는 분께서 소싯적에 창안한 고명한 기술로 수많은 도적들이 애용하는 초식이었다.
일명 ‘죽은 체.’
어려진 데다 내공도 없으니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근데 저 여인은 왜 안 어려진 거지?
막야가 죽은 체를 하는 와중에도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허겁지겁 뛰어왔고, 그 뒤를 따라 근엄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
모두가 어지럽혀진 방 안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님! 형님 배에 피가!”
그제야 붉게 물든 옷을 확인한 여인은 급히 의원에게 확인하도록 했다.
“설마? 도둑이라도 든 것이냐!”
어지럽혀진 방 안, 복부에 피를 흘리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막야.
모든 정황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근엄한 사내는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밖에 소리쳤다.
“문노!”
“예!”
“도둑이다! 서둘러 주변을 수색해라!”
“예! 가주!”
그런데 막야의 배를 확인한 의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년 사내를 쳐다보았다.
“뭐? 왜?”
“그게…….”
그의 손에는 터져 버린 자금우 열매가 들려 있었다.
“…….”
모두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후 중년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이런 못난 놈! 장난을 쳐도 정도가 있지 감히 이따위 짓을 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주위를 살피다 발견한 총채를 들고 막야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아팠다.
아이의 몸으로 변해 버린 터라 오랜 세월 수련해 온 경기공을 일으킬 수 없었기에 너무 아팠다.
“그만하세요. 애 잡겠어요!”
여인이 서둘러 막야를 감싸 안았고 소년이 중년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헉, 헉. 닥치시오! 항상 그리 감싸니 이놈이 이 모양이 아니오!”
총채를 높이 들었지만 차마 여인을 때릴 수 없었는지 바닥에 내팽개친 중년 사내는 화난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휴우……. 녀석. 아버지 말씀 틀린 게 없다. 어찌 이리 장난만 치는 것이냐.”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질책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막야는 눈만 멀뚱히 뜨고 있는데 발에서 잊고 있던 아픔이 밀려왔다.
“아극!”
“아참, 발! 강 의원!”
그래도 자식이라 걱정이 되었는지 여인이 서둘러 의원에게 발을 보게 했다.
결국 막야는 의원의 도움으로 발을 치료받아야 했고 한 달은 정양해야 한다는 주의를 받았다.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간 뒤에 막야는 멀뚱하게 앉아 눈만 끔벅거렸다.
“이게 뭐야? 설마…… 환영진?”
하지만 환영진이 아니라는 사실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똑같은 하루가 너무나 생동감 있게 반복되었다.
볼이 시뻘겋게 변할 때까지 따귀를 때려 봤지만 아프기만 하니 꿈도 아니었다.
너무도 시뻘건 얼굴을 본 동생이라는 놈이 걱정스럽게 고해바치는 바람에 또다시 의원과 어머니라는 여인이 달려왔고 장난을 쳤다는 이유로 혼만 났다.
결국 한동안 그의 거처인 소진각에서 자숙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여인은 자신을 아들이라 불렀고 일하는 이들은 모두가 대공자라 불렀다.
“…….”
막야는 소진각의 일을 돌보는 왕칠이 심심하지 말라며 가져온 일보(소식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영락 삼 년.
“에이 설마?”
이럴 리가 없다며 일보의 글귀를 닦아 보기도 하고 제 눈을 열심히 비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영락 삼 년’이라는 글자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맙소사…….”
하늘이 노래졌다.
자신이 마천 비고에 들어갔을 때가 정통 십 년이었다.
“사십 년…… 전……. 꼬로로록…….”
소청은 더 이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일보를 든 채 졸도해 버렸다.
결국 또다시 동생에 의해 가족이 불려 왔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로 기절해 버렸으니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 *
이른 새벽.
막야, 아니 소청은 방에 좌정을 하고 앉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찬찬히 정리했다.
“마천 비고가 아니었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환영진도 아니었고 꿈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꿈과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사십 년……. 사십 년 전으로 돌아오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다른 어떤 걸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마천 비고로 들어갔던 그는 사십 년 전의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저 설화나 전설에나 적혀 있을 법한 일이…….”
전생에 그가 읽은 수천 종의 서적 어디에도 사람이 환생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더욱이 어려진 것도 모자라 평생을 갈고닦은 내공이 송두리째 사라져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듯 의욕 없이 멍한 표정으로 앉은 소청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사천 간양(簡陽)의 진가.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당가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방계는 아니었고, 그저 사천 지역에서 대대로 표국이나 운영하는 곳이랄까?
전생에 웬만한 무가 집안은 전부 털어 본 그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면 그냥 별 볼 일이 없는 게 분명했다.
처음 본 아이는 올해 아홉 살이 된 동생 소강이었고, 중년 미부는 어머니 섭약란, 근엄한 목소리로 질책하던 사내는 가주이자 아버지인 진가신이었다.
“하아…….”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밖에서 소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기침하셨습니까?”
벌써 며칠째 아침 동생이 같은 시간에 같은 대사를 읊으며 들어왔다.
정말 칼 같은 녀석이었다.
“험험, 그래.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창술 수련 시간입니다, 형님.”
“수련?”
“예. 다리를 다치셨으니 참관이라도 하라고 아버님께서…….”
걱정스러운 소강의 말에 총채로 때리던 아비의 얼굴이 생각났다.
일단은 힘이 없으니 참을 수밖에…….
“무슨! 알지. 알다마다. 자, 가자. 앞장서라.”
“예.”
* * *
소강을 따라 나선 소청은 가는 내내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 했다.
몸은 어떠하신지, 움직이기 불편한 곳은 없는지, 어머님이 엄청 걱정을 했다든지 온통 형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걸음을 멈춘 소청은 그런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소강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되는 동생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묶은 건(머리띠)에 오차 없이 정돈된 옷차림.
거기다 말투와 행동은 영락없는 중년 아저씨 같았다.
‘아홉 살밖에 안 된 녀석이.’
괜스레 심술이 난 소청이 머리카락이 흩트려 버리고는 수업 장소라는 연무장으로 앞서 걸었다.
“형니임!”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머리칼을 정리한 소강이 얼른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