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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3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7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36화

35화. 도둑과 스승

 

 

 

 

‘여자? 그가 여자일 리가 없지. 어쩌면 또 다른 제자일지도 모르겠군. 사제? 사형이라 불러야 하나? 그나저나 어느 쪽 인물이지?’

소청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약 마천의 인물이라면…….

소청은 손안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넌 누구지? 마천인가?”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흑비.”

“흑비?”

“군사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론 당신을 도우라고. 그대가 그림자의 수장이라 하셨다.”

“흑비? 그림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막야다.”

소청은 모른 체하자 흑비가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알아. 그리고 진소청과 동일 인물이지.”

“뭐?”

“진소청은 남궁세가로 간다 했다더군. 그리고 요 며칠 막야라는 자가 뜬금없이 나타나 안휘성을 휘저어 놓은 통에 남궁가의 경계가 느슨해졌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가 나타났고.”

“그래서?”

“사천 당가, 암시장, 개방 오주 지부, 동정호 용소 객점. 그대가 막야이자 진소청이란 이유를 더 말해야 하나?”

“…….”

망할.

물건을 훔칠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버릇이 오히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나게 만들어 버렸다.

“제법이네. 이건 당신의 능력인 거야? 아니면 제갈휘문이 가진 정보력인 거야?”

“둘 다라고 해 두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이미 군사께선 당신이 막야와 동일 인물임을 알고 이곳저곳에 남은 흔적을 조작하시고 있으니까. 진소청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그리고 앞으론 마천을 조사할 때는 막야로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시더군.”

“그래? 잘됐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감추고 있던 비밀 하나를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계속 쳐다볼 거면 거기 있든가.”

퉁명스럽게 말한 소청이 어둠에 몸을 숨기며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가 버렸다.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

작은 논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흑비는 언짢은 눈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소청은 남궁가의 모든 전각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빼서 어질러 놓았다.

‘이자 뭐 하는 거지? 마치 일부러 어질러 놓는 것처럼?’

흑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몰래 조사를 하는 것은 은밀함이 최우선이다.

누군가 찾아온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소청은 아예 대놓고 도적이 왔다 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더욱이 여인들의 처소에 들른 그는 각종 패물들을 마구잡이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보다 못한 흑비가 말리려는데 순식간에 그녀를 안고 입을 막은 소청이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장난하나. 도둑이 말을 하면 어떻게 해!

-…….

도둑이라니.

흑비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잘 들어. 우리는 도둑이야. 아니, 도둑으로 보여야 해. 뭐, 눈치 빠른 놈들이 누군가 자신을 조사한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고.

-설마?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려는 생각인가?

-당연한 거 아냐? 나 참, 제갈휘문에게 뭘 배운 거야?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따라다니려면 좀 도와.

-그, 그러지.

소청의 말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달은 흑비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도둑(?)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굳이 손톱만 한 패물까지 싹 쓸어 담는 소청의 모습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흠, 이것도 아니고.’

총관의 거처에 들러 장부를 뒤지던 소청은 무엇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너무 깨끗했다.

‘결국 가주전인가? 남궁세가 전체가 관계된 게 아니라면…….’

소청과 흑비는 가주전으로 숨어들었다.

남아 있는 무인들이 제법 되었지만 절정에 이른 둘의 은신술을 잡아내기에는 턱없이 실력이 부족했다.

소청과 흑비는 남궁가를 마치 제 앞마당 활보하듯이 돌아다녔다.

‘여기가 가주전이군. 흠.’

소청은 남궁천세의 방문 앞에서 전체를 둘러보았다.

오대 세가의 수장답게 가주전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벽에 걸린 족자의 낙관은 모두가 중원에 이름난 명사들의 것이었고 화병이며 자기가 품은 영롱한 빛깔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 젠장, 자루가 좀 더 컸으면…….’

그가 우두커니 멈춰 있자 흑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 아, 아니. 없다. 흠흠, 혹시나 숨겨진 기관이 있을까 하고…….

소청은 눈동자에 떠오른 탐욕을 지우고 가주전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나 깨끗했다.

‘음, 남궁천세가 마천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나? 하긴 명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가문에서 굳이…….’

그때, 가주전의 한쪽 벽면을 살피던 흑비의 모습을 본 소청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깐, 멈춰!

-…….

흑비가 엉거주춤한 동작 그대로 멈췄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소청은 뒤로 빠져 있는 흑비의 엉덩이를 잡았다.

-아니 이게 지금 뭐 하는!

복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볼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아직 시집도 가 보지 않은 여인의 엉덩이를 대놓고 잡아 밀다니…….

순간 마주친 소청의 매서운 눈빛이 아니었다면 불이 나도록 따귀를 올려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청은 그딴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흑비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밀어내고 벽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둔부가 닿을 뻔한 곳에 삐죽하게 솟은 벽면의 작은 조각상.

-비켜나서 호흡을 멈춰라.

-…….

흑비는 눈을 끔벅이며 물러나 소청이 시킨 대로 호흡을 멈췄다.

반박을 하기에는 소청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소청은 조심스럽게 조각상의 한 면을 눌렀다.

취이익!

시커먼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소청의 옷소매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닿자마자 천을 녹일 정도라면 엄청난 독성을 가진 독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조, 조심…….

흑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순간 소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독연이 뿜어지는 곳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무, 무모…….

순간 방 안에 퍼지고 있던 독연이 그의 손안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사천에서 떠돈 이야기가 생각났다.

피독주를 훔쳐 간 대도 막야.

그제야 흑비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막야와 진소청이 동일 인물이니 그는 분명 입속에 피독주를 물고 있는 게 틀림없다 생각했다.

‘미리 피독주를 물고 있었나? 생각보다 치밀한 사내였군. 훔친 것은 잘못되었지만…….’

내공의 힘으로 독연을 흡수해 작은 환의 모양으로 압축해 버린 소청은 제 입안으로 삼켜 버렸다.

흑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피독주를 물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 그가 만독불침이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독환을 삼킨 소청은 그리고 조각상을 가볍게 비틀었다.

털컥.

벽면 아래에 한 사람 정도가 여유 있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잠시 쳐다보던 소청이 흑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들어가고 나면 문을 닫고 남궁가를 나가도록 해. 이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럴 순 없다. 따라가겠다. 나는 아직 당신을 믿지 않으니까.

-…….

소청이 흑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

그러곤 쑥 하고 사라져 버렸다.

흑비가 그의 뒤를 따르자 통로의 입구가 자동으로 닫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간 지하에 작은 문이 있었다.

주변을 세밀하게 살피던 소청은 그곳에 또 다른 기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신중한 놈들이군. 조심하지 않았다면 발견조차 못 했을 만큼 은밀해. 어쨌든 이런 비밀 통로에 문을 만들었다면 남궁천세에게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해. 그나저나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관인데…….’

소청은 문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혼자라면 다 때려 부수고 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흑비였다.

일보월하까지 알고 있으니 경공이야 최상이겠지만 무공의 수준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처음 본 여자의 맥문을 잡아 볼 수도 없고…….’

소청은 좀 전에 자신이 그녀의 둔부를 움켜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봐. 여기서부턴 조심해. 이제부터는 지켜 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

흑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무시?

-여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전에 없던 한기가 풀풀 날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흥! 내가 앞장서지.

소청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뜬금없이 수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흑비는 잠시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나 문을 밀었다.

-아, 아니 이봐! 거기 기관!

그그그그긍.

이미 늦어 버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사방에서 만천화우보다 더욱 촘촘하게 비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흥!”

일보월하라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함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 치며 수십 개의 환영으로 화해 사방을 점했고 허리께에서 빠져나온 연검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허공을 수놓았다.

따다다당!

무려 반 각 가까이 이어진 비침의 공격을 모조리 막으며 소청까지 지켜 낸 그녀가 보란 듯이 턱짓을 했다.

“이 정도야.”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으며 뒤따랐다.

자신감 있게 문 안으로 발을 디디던 그녀는 갑자기 ‘핑’ 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독?’

쇄골 부분에서 아릿함이 느껴졌다.

모두 피하지 못하고 얇은 비침 하나가 박혀 있었다.

“이, 이런.”

“쯧, 어째 나선다 했다.”

소청이 짜증을 내며 부축해 눕히고 비침을 뽑아내었다.

비침의 끝자락이 검게 변해 있는 것을 본 그가 상의를 벗기려 하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을 움켜쥐었다.

“피, 피독주……를 다오.”

“지랄하네. 피독주가 어디 있냐? 있으면 처음에 줬지.”

“뭐? 아까…… 분명…….”

흑비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부욱!

소청은 망설임 없이 비침을 뽑아내고 그녀의 상의를 찢어 버렸다.

“거참 더럽게 성가시네…….”

 

* * *

 

“으으음…….”

흑비는 고통스러움에 인상을 쓰며 깨어났다.

홰로 군데군데 불을 밝힌 공간에는 일렬로 늘어선 토굴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창살로 막아 놓은 수많은 토굴이 줄지어 있었고, 그 앞에 미끈한 근육질 상체를 드러낸 사내가 보였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구…….’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뜯긴 상의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덮여 있는 또 하나의 흑의.

“네놈!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 깨어났냐?”

소청이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무슨 짓을 했느냐 물었다!”

흑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제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냉혹한 무인이기 이전에 사내의 손조차 잡아 보지 못한 여인이었다.

“거참, 성질하고는. 귀찮게. 하긴 뭘 해? 해독했지. 그리고 옷까지 벗어 준 마당에 그렇게 화를 내야겠어?”

“…….”

“실력이 안 되면 따라다니기나 하든지, 괜히 나서서는. 민폐라고 그거. 알아?”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이성을 잃고 흥분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처음 본 사내에게 속살을 보이긴 했지만 모두가 자신이 조심성 없게 나선 때문이었고, 더구나 생명의 구함까지 받게 되었다.

“그나저나 꽤 예쁘게 생겼던데. 왜 이런 일 하냐? 차라리 그 정도 얼굴이면 고관대작이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줄을 설 텐데. 물론 성격은 빼고.”

그제야 흑비는 자신의 복면이 벗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오.”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어느새 그의 어조는 반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옷을 다 입은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청을 향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어쨌든 생명을 구해 줘서 고맙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좋아서 구한 거 아냐. 흔적을 안 남기려고 구한 거지.”

“…….”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소청이 무심한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왠지 그가 쑥스러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흑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난 군사부 비밀 조직 묵영단 일 조장 흑비요. 이름은…… 곽추.”

흑비는 제 이름을 밝히기 꺼려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토굴을 조사하던 소청은 얼어붙듯이 행동을 멈추고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돌렸다.

“곽,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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