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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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33화
32화. 입불역방(立不易方)
스스로를 마종(魔宗)이라 칭한 사내가 찾아왔다.
약관에 못 미치는 청년이었다.
현우자와 그는 화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사흘 밤낮을 두고 싸웠고 그 지형마저 바꾸어 놓았지만 그를 넘지 못했다.
좋은 상대와 겨루었다 생각했던 검존은 젊디젊은 그가 마도를 걷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술을 청하며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가 정말로 청년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무릇 도는 길이 다를 뿐 서로 통한다 하지 않던가?
마를 설법하는 그의 말에는 현기가 담겨 있었고 세상을 초탈한 사람처럼 깊은 도리가 담겨 있었다.
그가 남긴 화두는 오히려 검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가 떠난 이후 심마에 빠지고 말았다.
원래 흰 바탕에 검은 물은 쉽게 드는 법이니, 마음 깊은 곳에 생긴 마(魔)는 약한 곳을 찾아 금세 물들이고 떨쳐 내지 못한 그의 작은 욕구를 잠식했다.
“결국 스스로를 가두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십 년을 보냈네.”
소청은 현우자의 말을 단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새겼다.
‘마종? 처음 듣는 이름이다. 마천정벌을 이끈 것은 마천 삼 공자였다. 그로부터 삼십 년 전인 지금 마종은 누구인가? 마천의 주인은 언제나 천주라 불렸다. 이것 역시 바뀌어 버린 역사의 일부인가?’
신투가 되기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와 버린 소청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있었던 역사인지 아니면 변해 버린 역사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검존은 방유현의 뒤를 이어 정천맹주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거다. 그런 그가 심마에 빠져 십년면벽에 들어 있었다면 역사는 확실히 바뀌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바뀌어 가는 역사는 소청의 마음에 작은 의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혹, 자네는 그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음인가?”
“알지 못합니다. 그저 군사의 명을 받는 처지라. 하지만…….”
소청은 적당한 선에서 둘러대고 제갈휘문과 나누었던 고잠비록에 대해서 전했다.
“오위합취 마천혈세라……. 그렇군. 아마도 그는 마천이라는 곳의 주인이었던 모양이군.”
“주인인지 주구인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그도 그렇군. 하나 그가 떠났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지. 분명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 같다는. 그리고 돌아온다면 훨씬 더 강해져서 감히 막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야.”
현우자의 얼굴에 작은 수심이 어렸다.
하지만 소청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건 말건 상관없었다.
‘마종.’
사천과 운남, 진가의 변화에 자신이 끼어 있듯이 역사의 변화에 그가 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이 마천을 찾는 첫 번째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어디로 간다든지.”
“없었네. 그가 떠난 이후 심마에 빠져 뒤쫓지 못했네.”
소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검존께서는 어떠신지요? 다시 마기에 잠식당할 위험은 없으십니까?”
“괜찮네. 다행히 자네로 인해 내력을 모조리 뽑아낸 터였고 깨어난 뒤 혈도를 막아 두었으니 이전과 같지는 않겠지.”
“다행이군요. 하나 화산에도 지켜보는 눈이 있을 겁니다. 혹여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제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흠…… 화산의 치부를 알려 달라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헛헛헛. 아닐세. 나도 그쯤은 생각하고 있었네. 내 반드시 연락을 하지. 군사에게 연통을 보내면 되겠는가?”
“예.”
소청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현재는 마종이 유일한 단서. 그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마종이라는 자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소청은 몸 안에 자리 잡은 기운을 느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처음으로 겪은 패배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기연을 얻었다.
무릇 기연이란 고수와의 비무만으로도 얻어지는 것이라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죽음의 경계에 이르렀고 생(生)에 대한 의지가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미려와 회음 두 개의 기운을 합일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오존의 공격을 찢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함. 좀 더 수련을 한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청은 새롭게 생긴 힘에 자신감을 이루었다.
졌다고는 하지만 전생에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가능성이 생겼다.
만약 세 가지 기운을 뭉쳐 삼태극을 이룬다면 오존과 대등해지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갈망.
언제부턴가 좀 더 강한 힘을 갈구하고 있었고 그 변화는 무공에 대한 갈망을 만들었다.
하지만.
‘입불역방(立不易方). 뜻을 세웠는데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마천 비고를 찾고자 했으니 끝까지 찾는다.’
화산에 좀 더 머물라는 현우자의 청이 있었지만 마종의 특징을 비롯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소청은 후일을 기약하며 떠났다.
‘검존의 변화에는 마종이라는 자가 관여되었다. 하면 남궁천세에게 찾아온 변화에도 무언가 있을 것이다.’
화산을 내려온 그의 발걸음은 안휘를 향해 가고 있었다.
* * *
“군사님.”
“무슨 일인가?”
대회합을 끝내고 맹으로 돌아와 있던 제갈휘문에게 검은 피풍의로 몸을 가린 사내가 찾아왔다.
그는 흑의를 입고 귀신 탈을 쓰고 있었다.
제갈휘문이 만든 그림자.
그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화산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그가 내민 한 장의 밀지에는 잘린 손톱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소청?’
제갈휘문은 급히 밀지를 펼쳤다.
@[‘마종’에 대한 조사가 필요.
@십 년 전 검존의 면벽과 관련.
@남궁가로 가겠다.]
세 줄로 된 글귀 아래 소청이 검존에게 들은 마종의 생김새가 적혀 있었다.
‘마종? 그가 검존의 면벽에 관여했단 말인가? 그리고 남궁세가로 직접 가겠다니?’
밀지를 구겨 든 제갈휘문은 서둘러 청초각의 서가로 달려갔다.
익숙한 손으로 한곳을 누르자 기관이 작동되며 서가가 밀려나며 작은 통로가 생겼다.
제갈휘문이 모습을 감추자 기관을 알지 못하는 자나, 아는 자라 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통로를 지나자 야명주로 내부를 밝힌 거대한 밀실이 드러났다.
밀실 안에는 다섯 줄로 세워져 둥글게 벽면을 채운 서가에 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그 중심에 원형의 탁자가 있었다.
정천맹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청초각 내에 감춰진 또 다른 공간과 조직.
마천에 대비하기 위해 그가 손수 뽑아 기른 ‘그림자’ 묵영(墨影).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오는 묵색 창의를 입은 학사들은 모두가 묵영단 소속의 현학(玄鶴, 검은학)들이었다.
“화산 인근의 동향이 필요하다.”
그의 말에 지체 없이 서책들이 꺼내어져 왔다.
“화산, 십 년 전 검존의 은거가 있었던 시기의 정보를 샅샅이 뒤져라. 거처를 두지 않은 자가 방문한 흔적이 있을 것이다.”
화산과 관련된 서책을 든 이들은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화산뿐 아니라 화산이 자리 잡은 섬서의 동부지역 전체에 관련된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소청을 만난 이후 남궁가에 대한 정보는 새롭게 뒤져 보고 있었다.
차라라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빨라지고 서책을 뒤지던 학사들이 지필묵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남궁세가에 특이점은 없었다. 지극히 평이하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그는 분명 남궁가를 살피라 했었다. 무언가 빠진 곳이 있을 것이다. 아직 진소청이라는 자를 정확히 믿을 수는 없지만 분명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눈을 감은 제갈휘문은 엄지와 검지로 소매를 만져 대었다.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생긴 습관 같은 것이었다.
‘마종이라는 자는 검존을 노린 게 틀림없다. 어째서? 검존은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까운 자였다. 가만! 차기 대권에 가까운 자? 내가 마천의 주구라면? 세작을 운용한다면? 차기 대권을 쥐면 그들이 정천맹 내에서 활동하기 편해진다. 설마 남궁천세가?’
제갈휘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분명 소리 높여 남궁천세를 지지한 자들이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막 오존에 오른 그가 유일한 대안이었으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면?’
소매를 만지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남궁가에 대한 조사의 요점을 바꾼다. 현 시점에서 이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갑자기 남궁천세를 지지해 온 이들에 대해 살펴라. 그들 중에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다!”
명이 바뀌었지만 현학들은 머뭇거림도 없이 서가에서 또 다른 서책들을 꺼내 왔다.
남궁세가가 아니라 그들을 지지해 온 이들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니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내밀어진 종이들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좋아. 주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가 남궁가로 갔다고 하니 무언가를 알고 있을 테지. 남궁가에 대한 것은 일단 그에게 맡긴다.’
제갈휘문은 학사들이 제 앞으로 올려놓은 종이들 중 몇 가지를 골라 움켜쥐었다.
“화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종합해라.”
그의 외침에 현학들이 고개를 숙였고 제갈휘문은 탁자의 중앙을 눌렀다.
그그긍.
돌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탁자의 중앙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제갈휘문은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밀실 안의 또 다른 지하 밀실.
불빛조차 없는 그곳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십의 복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나누어 확인하라.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저 확인을 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그의 명에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은 제갈휘문이 건넨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가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흑비(黑妃).”
그의 부름에 속눈썹이 무척이나 긴 흑의인이 다가왔다.
“남궁세가로 가거라. 진소청이라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막야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것이다. 앞으론 그가 너희들의 수장이다.”
무심하던 흑비의 눈에 동요가 일어났다.
“반문은 허락지 않겠다.”
“…….”
“아! 그리고 한 가지. 앞으론 마천과 관련되어 있는 일을 할 때는 막야로 활동해 달라 말하라. 그것이 진가가 휘말리게 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흑비는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갈휘문은 손안에 쥐인 진소청에 대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진소청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막야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까지…….
“진소청. 그리고 도적 막야. 어떤게 너의 진정한 정체냐. 일단은 그대가 유일한 대안이니 믿겠다. 흑비는 그대의 충직한 수하이자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키는 감시자가 될 것이다.”
* * *
정천맹 동쪽 끝에 위치한 세력권인 안휘성.
그리고 그곳에 자리 잡은 황산(黃山).
일찍이 오악에 들지는 못했으나 오악을 보고 나면 산을 보지 않고 황산을 보고 나면 오악을 보지 않는다 했다.
연중 해를 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운무에 가려진 그곳에는 언제부터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르는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남궁세가.
무림에 수많은 무가들이 있어 그중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오대 세가로 나누었다.
사천의 당가, 하북의 팽가, 호남의 황보가, 산동의 악가, 그리고 남궁이 그것이었다.
네 가문의 강함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겠으나 그 누구도 남궁의 앞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홍무제가 나라를 세울 때 한림아를 죽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영락이 조카의 황위를 찬탈할 때 선봉에 섰으니 그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림에서는 오대 세가의 하나였으나 군문과 무림, 상가에 있어서까지 그 힘이 뻗어 있으니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황산은 남궁의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빠박!
휘돌려 찬 발에 이빨 서너 개가 허공을 날았고 지켜보는 구경꾼들 속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씨발!”
수하가 당하는 것을 본 목척승은 거도를 뽑아 들고 내달렸다.
스걱!
앞발을 내밀며 뻗어진 발검은 휘둘러 보지도 못한 거도를 목척승의 팔과 함께 베어 버렸다.
“끄아악!”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목천승을 제압한 사내는 ‘창천검로 천뢰무망’이라는 글귀가 쓰인 천의(天衣)를 청의의 위에 걸치고 있었다.
“지혈하라.”
사내의 명령에 같은 복장을 한 검수들이 목척승의 어깨를 점혈하고 피를 멎게 했다.
수십이나 되는 이들이 저마다 상처를 입고 무릎을 꿇자 청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위엄 있게 호통쳤다.
“감히 안휘에서 사특한 짓을 일삼다니. 이곳이 남궁의 영역임을 모른단 말인가!”
의기 넘치는 외침을 내뱉는 청년은 다름 아닌 남궁가의 적손이자 삼남인 남궁진린이었다.
“어찌 이곳이 남궁의 영역이란 말이냐! 이곳은 대대로 우리 흑사방의 세력권이었다. 이곳 항만의 이득권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대어 우리를 공격한 것임을 모를 것 같으냐!”
한 팔이 잘리어 버린 목척승은 피를 토하듯이 외쳤지만 지켜보는 중인들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혀를 찼다.
“정말로 사특한 무리구나. 주위를 보아라. 네놈의 말에 조금이라도 동조의 눈빛을 보내는 자가 있는가?”
“동조? 흥, 닥쳐라.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쯧, 상인들을 괴롭혀 강제로 영업장을 집어삼키고, 도박장과 아편굴을 열어 세인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고리를 내어 없는 자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 부녀자와 아이들을 납치해 노비와 종으로 만드는 것이 잘못이 아니야?”
“지랄하고 있네. 남궁가도 보호비를 받고 있지 않나! 전장(錢莊)은? 그곳에서도 돈을 빌려주지 않나? 도박장? 아편? 우리가 오라고 했나? 이끌린 그들이 온 것이다.”
“궤변이군.”
“궤변? 흥, 노비와 종이라고?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냐? 그들을 사러 온 것이 누구냐? 전부 고관대작들이다. 그중엔 네놈들도 있지 않나!”
목척승은 오히려 자신의 죄상을 되지도 않는 이유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결국, 네놈들이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남궁진린은 살기 어린 표정으로 검변을 잡았다.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으나, 축생보다 못한 놈들의 목숨을 거두어 더욱 많은 이들에게 복을 줄 수 있다면 어찌 살생이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미끄러지듯이 앞발을 내미는 순간 검이 뽑혀 올라와 백광의 꼬리를 만들었다.
모조리 참하리라 생각했다.
따다당!
그러나 검기는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 버렸다.
남궁진린은 자신을 가로막은 자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그는 검은 피풍의에 면사를 두른 방립을 쓰고 있었다.
“웬 놈이냐!”
“나? 진…… 아니, 막야라고 해 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