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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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8화
27화. 대회합의 금기
잔뜩 이죽거리며 나선 소청을 본 소강이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형님!”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하게 맺혀 달려왔다.
딱!
소청은 그런 동생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았다.
“아극!”
“이 녀석아. 내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네?”
“네가 그렇게 정정당당하게 싸워 준다고 저런 비열한 놈들이 알아 줄 것 같아?”
“예?”
“다 보고 있었다. 이 녀석아.”
“아…….”
“쯧, 좀 변하라고 대족장이랑 대련도 붙여 줬더니. 하여간 너는…….”
“형님…….”
소청이 미소를 지으며 소강의 머리를 쓸어 주자 이제껏 든든한 명문 정파의 무인처럼 행동하던 소강이 코흘리개 어린 동생으로 돌아갔다.
“진 공자.”
승혜가 다가왔다.
“아, 오랜만이네요.”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하는 소청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황보인은 강합니다.”
“그래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승혜의 말에 소청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듯 싱글거리기만 했다.
“공자.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공자께서 강한 건 알지만, 회합 전의 마찰은 맹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황보 세가의 장남입니다. 더욱이 악가, 팽가, 서문가 모두가 쉬이 볼 수 없는 세력을 가진 곳의 자제들입니다.”
소청은 피식 웃으며 승혜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황보인을 향해 다가갔다.
“자, 꼬워서 직접 나섰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는 소청의 모습에 황보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가와 혼자 싸웠다고 헛소문을 내더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이지?”
“…….”
“진혼창? 웃기지도 않는군. 당가의 혼을 눌렀다고? 당가가 무슨 동네 개 이름인 줄 알아? 고작 막 칠룡에 오른 당태위와 당가주에게 마찰이 조금 있었던 정도겠지. 근데 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놈들이 당가를 박살 내? 개소리하고 있네.”
그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가 일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과장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림이라는 곳은 원래 소문이 무성하고 과장되기 마련이니 진혼창에 대한 소문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한 개인, 그것도 약관의 무인이 문파와 싸워서 이긴 경우는 정천의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다.
방유현.
스물다섯에 서문 세가를 홀로 박살 내며 단번에 백대 고수의 최상층에 이름을 남겼고, 마흔이 되기 전에 오존에 오른 정천맹의 맹주였다.
“어디 맹주님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모양이지?”
황보인의 비아냥거림에 구경꾼들의 얼굴에 소청을 향한 불신이 넘쳐 났다.
“거참,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소청의 이죽거림에 황보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죽고 싶은 모양이지?”
화가 난 그의 기운이 회오리치듯이 퍼져 나가자 대기가 잔인하게 떨려 왔고 살기가 사방으로 짓눌러 소름이 돋아 오르게 했다.
“해 봐.”
소청의 입가에 피어오른 비웃음에 황보인이 불을 토하듯이 주먹을 내뻗었다.
뻗어 낸 주먹의 회전을 따라 강맹한 기운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소청을 향해 날아갔다.
일권의 기운으로 산을 허문다는 붕산격(崩山擊)의 초식이었다.
말도 못 하게 패도적인 기운이 소청을 집어삼켰다.
콰앙!
깔끔한 권격이 소청을 때리며 폭발했고 대기가 진동하듯이 떨렸다.
구경꾼들은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재빨리 수십 장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권격을 뻗어 낸 황보인은 멈추지 않았다.
뒤이은 주먹이 수십 개의 거대한 권영을 만들어 내며 소청과 그 주위에 폭발했다.
파도를 쪼갤 정도로 빠른 권격인 벽파격(劈波擊)에 이어 슬쩍 뒤로 물러났던 황보인이 양 주먹을 동시에 뻗어 내었다.
하늘을 밀어내는 주먹이라는 배천격(排天擊)이었다.
황보 세가가 자랑하는 천왕삼권의 극절예가 모조리 펼쳐지자, 구경꾼들은 당가 일전에 대한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더욱 강해져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휘오오오.
황보인의 주먹이 뻗어 낸 기운으로 자욱하게 끼었던 먼지가 걷히기도 전에.
피윳!
먼지를 뚫고 쏘아진 소청의 사악한 얼굴이 황보인을 향해 다가왔다.
황보 세가가 자랑하는 천왕삼권의 권격에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에 누군가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허!”
그사이 소청이 손을 뻗어 내자 당황한 황보인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권격을 바꾸었다.
우르릉!
걷히지 않은 먹구름 사이에 천둥이라도 치는 듯 황보인의 몸에서 벽력성이 만들어졌다.
단 일 초로 구성된 벽력신권의 폭풍 같은 권격에 뇌기가 맺혀 소청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허공에서 몸을 틀며 황보인의 팔을 감아 쥔 소청이 역으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고목의 가지처럼 우람했던 팔뚝이 힘없이 꺾였고 내지른 소청의 발길에 황보인의 몸이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크윽.”
힘을 잃고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은 황보인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소청의 신형을 찾았다.
뻐억!
그 순간 옆구리를 파고든 창대에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접혀 버린 황보인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소청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소청의 곧게 펴진 오른발이 직각으로 내리쳐졌다.
쩌어엉!
내리밟은 발이 일 장여의 지면을 통째로 터트려 버렸다.
“…….”
하지만 그의 발아래 황보인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소청의 싸늘한 눈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소청의 발이 들어 올려진 순간 아슬아슬하게 끼어든 팽천기가 황보인의 몸을 안고 굴렀던 것이다.
악표가 창을 곧추세웠고 서문란이 검을 뽑아 소청의 앞을 막아섰다.
“뭐 하는 짓이지?”
소청의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뻗어 나왔다.
먹잇감을 놓친 범처럼 살기 어린 눈동자가 그들을 향해 번들거렸다.
“그만해라. 네가 이겼다. 더 이상 공격한다면 우리가 참지 않겠다.”
“…….”
창극을 세워 위협하듯이 소청의 앞으로 나선 악표였지만 그의 몸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소청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천왕삼권을 어떻게 막은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황보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빠른 움직임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
턱.
생각이 멈췄다.
분명 일 장여 밖에 있었던 소청이었는데 어느새 악표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커헙. 이놈, 감히 우리가 누군 줄…….”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소청은 그의 목을 옴켜쥠과 동시에 악표를 바닥에 꽂아 넣어 버렸다.
세상이 빙글 돈다는 느낌을 느끼는 순간 후두부를 통해 전해진 통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악표의 얼굴에 소청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틀어박혔다.
빠악!
빠악!
잔인한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구경꾼들은 질색하며 몸을 떨었다.
악가의 기재이자 칠룡에 버금간다 생각했던 악표는 힘도 쓰지 못하고 짓이겨진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소청이 겁에 질린 채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팽천기를 향해 다가가는데 갑자기 긴 호각성이 울렸다.
삐이익!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붉은 범이 수놓인 무복의 무인들이 끼어들었다.
“멈춰라!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겠다!”
소청의 앞을 가로막은 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사방을 쳐다보았다.
정천맹 삼단 중의 하나이며 오대 무가의 무인들로 이루어진 적호단.
대회합이 진행되는 동안 동정호의 치안을 맡게 된 그들이었고, 외곽의 소란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눈앞에 보인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악가의 이공자인 악표가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고, 황보인이 신음을 토하며 팽천기의 품에 안겨 있었다.
비록 ‘삼이룡일계’라 하여 오대 무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무릇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파락호라 할지라도 이겼으면 이겼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다는 것은 오대 무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당가를 무너뜨린 진혼창이라면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당가도 모자라 팽가, 악가, 황보, 서문가에 이르는 네 곳의 가문이 진가의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수치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대회합이다. 후기지수들 간의 소란은 금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일은 묻지 않을 테니 그만 돌아…….”
픽!
적호단를 이끌고 온 제룡검 남궁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청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뻐억!
황보인을 안고 있던 팽천기가 복부를 얻어맞고 튕겨 나갔다.
“어, 어떻게?”
눈이 좇아가질 못했다.
뻐억! 뻑!
소청의 발길질이 일격에 무력화된 팽천기의 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노옴!”
뒤늦게 노성을 지른 남궁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적호단의 무인들이 제제를 위해 다가가려는 순간.
쩌어엉!
강하게 내리밟은 진각이 지축을 뒤흔들어 놓았다.
순식간에 산처럼 커진 소청의 기세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몰아쳐 나왔다.
“…….”
산중의 범이 지상으로 내려와 포효하는 듯한 환각이 들 정도로 오연하게 선 소청의 일보에 모두가 다가서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방해하지 마.”
스산하게 깔리는 소청의 목소리에 적호대의 무인들이 침을 삼켰다.
‘이, 이런 힘이……. 백대 고수? 아니 그 이상?’
남궁문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각에 실려 뿜어진 기운은 자신 정도로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이 정도인가. 당가를 부쉈다고 하더니…….’
자신이 들지 않았다.
함께 온 적호단의 무인은 모두 십수 명, 뛰어난 후기지수라면 몰라도 백대 고수급의 무인과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물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모두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멈춘단 말인가?
부서지더라도 막아야만 했다.
“대회합의 금기를 어기다니! 네놈이 정녕!”
소청의 시선이 남궁문을 향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뭐?”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대회합에 참석하는 후기지수라면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할 문제였다.
“그들은 오대 무가의…….”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고.”
“…….”
몸이 시릴 정도의 기세를 품은 소청은 서문란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기세에 온몸이 묶인 듯한 서문란이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소청의 주먹이 들렸다.
“이노-옴!”
결국 남궁문이 움직였다.
검을 뽑지 않았지만 빠르게 서문란의 앞을 막아서며 파고든 그는 소청을 밀어내기 위해 가볍게 일 장을 뻗었다.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막는 것이었다.
아무리 백대 고수급이라 해도 적호단 일 조장이라는 무위라면 물러서게 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턱.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혀 당겨졌고 얼굴이 빈 채로 그대로 노출되었다.
움켜쥔 주먹이 날아왔다.
‘젠장!’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형님!”
“…….”
주먹이 남궁문의 얼굴 세 치를 두고 멈췄다.
후웅.
주먹에 실린 풍압이 남궁문의 얼굴에 닿으며 살갗이 예리하게 찢겨 나갔다.
멈추지 않았다면…….
남궁문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소청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 주먹을 멈추게 한 소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궁문을 놓아주었다.
구경꾼들은 입을 쩍 하니 벌리고 그의 모습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황보인, 팽천기, 서문란, 악표…….
더구나 정천맹의 최정예라 불리는 적호대 십수 명과 남궁문까지.
이제까지 그런 위용을 보여 주었던 후기지수는 없었다.
사천에서 일어난 당가 일전은 소문이었다.
소문과 실제는 달랐다.
눈으로 본 소청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감히 압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남궁문이 소란의 죄를 물으려 했지만, 승혜와 소혜가 상황을 설명했고 용소 객점의 주인이 증언을 했다.
네 곳 가문의 후기지수를 짓밟아 놓고 치안을 맡은 적호대의 말을 무시한 것은 중요한 문제였지만, 검후와 멸절사태를 스승으로 둔 그녀들의 증언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또한 자신들의 힘으로는 감히 구금조차 할 수 없었다.
닿지도 않은 주먹에 지독한 패배감이 든 남궁문은 일단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러했다 하니 일단 돌아가 상부에 보고해 보겠네. 하나 자네!”
남궁문이 소청을 쏘아보았다.
“단순히 이렇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말게. 각 무가에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네.”
“흥, 말은…….”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흥이 떨어진 터라 무시해 버린 소청은 몸을 돌려 버렸다.
* * *
“다리 사이를 기어가? 개처럼 짖으라고 했다고?”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 용소 객점으로 돌아온 소청은 소강의 말을 듣고 크게 뜬 눈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동생에게 그따위 언사를 보였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런 썅. 다음에 만나면 팔 하나를 잘라 버리든가 눈깔 하나를 파 버리든지 해야지.’
소청은 다짐이라도 하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동정호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