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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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7화
26화. 또 다른 잠룡 (2)
“…….”
소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참았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형을 함부로 말하는 게 심히 거슬렸지만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촌놈이 출세했지. 듣자 하니 당가의 주 전력도 아니었다며? 당태위 놈이야 이제 막 칠룡이 된 암기 얍삽이였고, 당 가주는 백대 고수에도 이르지 못한 양반이잖아? 그런 것들을 이겨 놓고 중원에 이름을 걸다니, 정말 문턱이 너무 낮아졌어.”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황보인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을 참는 소강의 모습에 소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 짜증 나서 같이 못 앉아 있겠네. 가요!”
“소, 소저?”
“가자고요. 뭐 하러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함께하는 동안 그녀가 화내는 것을 처음 본 소강이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나자, 승혜도 황보인 일행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일어났다.
“어이, 이거 좀 그러네. 마치 날 피하는 것 같잖아?”
“피하는 게 아니라 다 먹은 거예요.”
소혜도 괜스레 시비가 붙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거 진가의 그 자식을 보호라도 하는 모양새잖아? 심히 기분이 뭐 같네. 얼굴 좀 반반하다고 봐줬더니 같은 식구를 무시하는 거야?”
황보인의 이죽거림에 소혜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같은 식구예요? 엄연히 가는 길이 다른데.”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봤는데 다 먹었으면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하지. 예쁜이 둘은 앉아. 거기 진가는 돌아가고. 함께할 신분도 아닌 것 같으니까.”
황보인의 말에 악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려는 것을 뿌리친 소혜가 발끈했다.
“놓지 못해요! 이 사람들이 말이면 단 줄 알고! 어디서 행패를…….”
“소혜!”
화가 치밀어 쏘아붙이는 소혜를 말린 승혜가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합장을 하고 나서려는데 황보인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파하하하! 이거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네.”
와장창!
황보인은 연회석 탁자를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 따위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앉아.”
비릿하게 웃는 그의 몸에서 막대한 투기가 흘러나와 용소 객잔의 이 층을 무겁게 짓눌렀다.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네. 칠룡이면 칠룡답게 행동해요. 이런 식이니까 사람들이 당신들을 정천맹의 삼이룡일계(三螭龍一鷄)라 부르는 거예요!”
소혜의 말에 황보인 일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룡이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함이었고 일계란 봉황이 되지 못한 닭을 일컬었다.
몰려다니며 사고만 치는 황보인과 서문란, 팽천기, 악표를 일컬어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절강 꼬맹이 동생 년이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까 버르장머리가 없네.”
서문란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눈매가 뱀처럼 사이하고 차가워 보였다.
“너 같은 언니 둔 적 없거든! 그리고 아무리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너만 하겠어?”
소혜가 그녀를 비웃으며 서문란을 향해 다가서려 했다.
“소혜.”
그녀를 소매를 잡아당긴 승혜가 고개를 내저으며 황보인을 향해 말했다.
“대회합이 있기 전에 후기지수들 간의 마찰은 금지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여기까지만 하고 서로 물러나시지요.”
“지랄하네. 이 마당에 고상한 척은…….”
서문란의 말에 황보인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앉아서 술만 따르면 돼. 그 정돈 괜찮잖아?”
“…….”
승혜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가사에 가려져 있던 고운 손을 꺼냈다.
“결국 싸우자는 말이로군요.”
“뭐, 자신이 있으면 좋을 대로 해석해.”
황보인은 이미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으로 악표가 걸어 나왔다.
“대형, 형께서 나서면 급이 맞지 않지요. 평소 아미창이 얼마나 대단한가 궁금했는데…… 이 동생이 오늘 견식해 볼 모양입니다.”
산동 악가의 대공자 악표.
일찍이 악가의 창술을 이을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고 창 하나로 칠룡에 오를 것이라 기대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아미창으로 승혜가 오봉에 오르게 되자 같은 무구를 쓰는 그는 칠룡에 오를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더 화가 나는 것은 후기지수들 대부분이 승혜의 창을 일절로 꼽았고 그의 아비까지도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승혜에게 평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그의 열등감을 알고 있던 승혜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잡았다.
악표가 나선 이상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만들 하십시오. 대문파의 자제들께서 언행이 어찌 이리 가볍단 말입니까?”
갑자기 소강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나섰다.
“넌 뭐야? 꺼지지 못해? 어디서 감히 이름도 없는 지방의 쓰레기 따위가 나서!”
자신의 싸움을 방해받은 악표가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소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무릇 사내란 여인을 보호해야 마땅함입니다. 보아하니 황보가의 공자께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이 같은 상황을 만드신 것 같은데. 어찌 제가 여인의 뒤에만 숨어 있겠습니까? 때마침 저도 창을 쓰니 악가의 공자께 한 수 배움을 청하지요.”
“하, 지랄하네. 어디서 너 따위가 감히…….”
악표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비록 칠룡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창은 아무나 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밌겠네.”
“예?”
갑자기 황보인이 히죽거리자 악표가 눈을 찡그렸다.
“해봐. 이기면 셋 다 그냥 보내 주지. 대신 네놈이 지면 악표의 가랑이를 기고 개처럼 짖어라. 그리고 거기 절강 예쁜이들은 밤새워 내 술잔을 채우고.”
“하! 그거 좋네. 재미있겠어. 아주.”
반발하려던 악표가 사이하게 웃으며 동조를 했다.
“어때?”
“진다면 그리하겠지만 두 소저의 이야기는 빼 주시죠.”
“왜 자신 없나?”
황보인이 이죽거렸다.
“그건…….”
소강이 뭐라 말하려는데 승혜와 소혜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악표 공자는 뛰어난 창술가입니다. 칠룡에 비견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승혜는 소강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미 그의 실력이 사천에서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질 않았다.
그럼에도 소강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질 것을 두려워하여 불의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형님께 배웠습니다. 도리어 저로 인해 두 분이 고초를 겪으실까 걱정입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공자, 설마 저를 위해 나서 준 거예요? 좋아요. 제가 열심히 응원하겠어요.”
감동을 받은 듯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소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 준비됐으면 시작하는 게 어때?”
황보인이 턱짓을 하자 악표가 창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여기선 곤란합니다.”
“뭐야? 뭘 자꾸 빼? 자신 없으면 그냥 꺼져.”
“그게 아니라, 여기서 비무를 하게 되면 객점은 물론이고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하시지요.”
“역시 우리 공자님은 누구와는 다르게 사려도 깊지.”
소혜가 악표를 째려보며 말하자 황보인이 피식 웃었다.
“새끼 성인군자인 척하기는……. 좋다. 네놈이 언제까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두고 보지. 나가자.”
밖으로 나온 소강은 자신의 방에 들러 창을 챙겨 나왔다.
제법 재정이 탄탄해진 진가였기에 창대를 통째로 한철을 사용했고, 관계가 좋아진 목가에서 정성을 다했기에 실로 뛰어난 물건이 만들어 졌다.
소강은 소청의 패월을 따라 ‘월령’이라 이름 지었다.
언제나 형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살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반영돼 있었다.
비는 그쳤고 인근 주루의 취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창대를 잡고 악표의 앞에 선 소강은 찌르르한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았다.
형에게 배웠고 모자겸과 대련했으며 진무월창의 무인들과 손바닥 껍질이 몇 번이나 벗겨지도록 수련한 창술이었다.
중원 사대 창 중 하나라는 악가창이라 해도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 새끼. 꼴에 창은 더럽게 좋네.”
악표가 양발을 벌리고 창대를 뻗으며 비웃었다.
‘하아, 형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지…….’
갑자기 떠오른 소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소강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간양 진가의 소강! 위명이 쟁쟁하신 악가창에 배움을 청합니다!”
“지랄하네!”
소강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순간 악표가 지면을 박차고 창을 곧추 세운 채 곧게 뻗어 나왔다.
파앙!
악가창의 핵심은 속도에 있었다.
일명 기격찰술이라 불리는 그것은 지독하게 빠른 찰법의 연속기였다.
모든 것을 배제한 찰법.
나서며 찌르고, 달리며 찌르고, 물러나며 찌른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도가 무시무시했기에 감히 단순하다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악가창법에 방어는 없었다.
공격이 곧 방어였고 방어는 곧 공격이었다.
악표가 지면을 내딛자마자 찔러 온 창날이 코앞에 닿았다.
하지만 소강에게는 그다지 빨라 보이지 않았다.
소청에게는 지도 대련을 받았고, 모자겸과는 실전에 버금가는 대련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끝이 명확하게 보인 소강은 창대를 슬쩍 밀어 넣고 닿게 해서 유연하게 넘겨 버렸다.
방향이 틀어져 버린 악표는 짧게 회전해서 돌아오는 소강의 창대에 재빨리 허리를 젖혔다.
소강의 창대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배 위를 지나갔다.
턱.
그런데.
젖혀 피한 줄 알았던 소강의 창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직각으로 떨어졌다.
‘허헛!’
놀란 악표가 창대를 짚으며 몸을 틀어 바닥을 뒹굴었다.
뇌려타곤(懶驢陀坤).
무려 첫수에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구르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소강은 공격을 이어 오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소혜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앞에서 치욕스럽게 스스로 바닥을 구른 꼴이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썅!”
웅혼한 내기가 창대를 타고 흘렀고 눈에 핏발이 잔뜩 돋아 오른 악표가 창대를 물렸다가 단번에 뻗어 내었다.
마치 창대가 늘어난 것처럼 엄청난 기운이 창극에서 뿜어지며 소강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창에 기운을 실은 것이었다.
‘팔괘연환, 손월식.’
휘돌린 창대의 잔상이 궤적을 만들고 수직으로 세워졌던 창대의 끝을 잡은 소강이 내려쳤다.
후웅!
순간 밀려오던 기운이 반으로 갈렸다.
그리고 진각을 내디딘 소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악표가 그를 마주했다.
따다당! 깡!
휘도는 창대의 궤적이 두 사람의 몸을 감추었고 거센 쇳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공수의 교환이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이 이어졌다.
까앙!
결국 한쪽이 휘둘러 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면에 긴 족적을 만들며 밀려났다.
악표였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놀람이 섞여서 떠올라 있었다.
“저거 산동의 악표 아냐?”
“그러네. 허, 근데 저 친구는 누구야? 악표를 압도하고 있잖아?”
“창을 쓰는 무인이 귀한데 악표를 밀어낼 정도라니 대단한 친구구먼.”
주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소강에 대한 관심이었다.
자신과 달리 소강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마치 고수에게 지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개자식이…….’
악표가 어금니를 깨물며 창대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뽑아 올려 창대에 실었다.
무리하게 뽑아 올린 기운에 창을 잡은 팔뚝에 힘줄이 돋아 오르고 입에서는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만혼쇄!”
한 손으로 내지르는 악표의 기수식에 승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밀리고 있다고 해도 악가창식의 금기 살초 중의 하나인 만혼쇄를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험…….”
순간 소강의 창이 지면을 쓸어 올리며 천천히 휘돌려졌다.
휘두름이 궤적을 만들고 춤처럼 변해 사방을 수놓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초식.
소청이 당태위의 만천화우를 집어삼켰던 그 초식이었다.
슈아악!
악표의 창이 찔러졌다.
나뉘기 시작한 창날이 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처럼 변해 소강의 몸을 뒤덮었고, 승혜와 소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집어삼켜졌다.
작은 원이 거대한 흐름을 만들며 만혼쇄의 무수히 많은 창극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팔괘연환 태월식. 소용돌이.
소강의 창에서 펼쳐진 휘두름은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거대했던 악표의 공격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공격을 잡아먹은 소강의 창날이 허공에서 여러 개의 각을 이루며 악표를 향해 날아갔다.
절초를 펼친 후에 생긴 잠시간의 틈.
그 틈으로 인해 악표는 소강의 창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 순간.
쩌엉!
창대가 튕겨 나갔고 소강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솥뚜껑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악표를 가로막은 사내는 황보인이었다.
“거기까지! 촌놈이 제법 기세가 올랐구먼.”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악표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에 밟혀야 하는 개미 새끼가 생각보다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승혜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매서운 눈으로 나섰다.
“무슨 짓은?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놈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닥치시오! 이미 비무에서 승리했거늘.”
“비무? 그딴 걸 했었나? 내가 보니 저놈이 암수를 쓴 것 같은데?”
“암수라니! 이런 비열한!”
“왜 꼬우면 직접 나서 보든가?”
승혜가 화가 치밀어 나서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렇게나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머리칼, 짙은 흑의에 한 손에 든 단창을 어깨에 올린, 흡사 한 마리 야수와도 같은 기운을 품은 사내.
“다, 당신!”
승혜에게 등을 보여 주며 나선 사내는 황보인을 보며 싱긋이 웃었다.
“그래. 꼬워서 직접 나섰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