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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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5화
24화. 흑웅방, 두 번째 방문
달라졌다.
기억하고 있는 추억 속의 풍경과 사람은 그대로인 곳에서 과거의 자신이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진가에서 사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어딘가 과거의 자신이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천의 흔적을 알고 있다는 제갈휘문을 만나기 위해 동정호로 온 그는 잠시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대삼은 얼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과거의 내가 사라지다니?’
의문이 생긴 소청은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려갈 것도 없이 벗어 둔 방립을 쓰고 창가를 통해 몸을 날렸다.
“어? 어디 가신 거지? 소피라도 보러 가셨나?”
받은 돈이 많았기에 특별히 추가로 음식을 가져온 대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객점을 나와 찾아간 곳은 동정호 외곽의 부랑촌이었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화려한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는 곳을 벗어나면 혜택받지 못한 이들의 마을이 있었다.
판자나 짚으로 대충 엮어 만든 집들이 촌락을 이룬 곳.
그곳이 과거 자신이 살고 있던 거처였다.
하지만 없었다.
그때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자신은 없었다.
부랑촌에서 얼굴이 익숙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막야’라는 이름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겨 버린 사실들이 떠올랐다.
모자겸.
그가 삼두홍사를 취해 대족장이 된 것은 신투였던 자신이 서른을 넘은 뒤였다.
당태위.
암왕으로 명성을 날린 그가 자신에게 진 이후 독공을 수련한다 했다.
그리고 마천.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세 가지는 확실히 과거와 바뀌었다.
한 사람은 시기가 바뀌었고, 또 한 사람은 아예 무공이 바뀌어 버렸다.
더구나 마천은 어딘가에 있겠지만 십만대산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환생으로 인해 변한 건가? 과거로 돌아와 버려서 원래의 내가 사라진 건가?’
환생한 이후 새로운 몸을 얻고 진가를 키우는 것에 빠져 있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빛. 그 때문에 환생을 했던 게 분명한데……. 과거까지 바뀌어 버리다니. 정말이지 점점 더 궁금하게 만드는구나, 마천 비고.’
소청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또한 마천 비고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져만 갔다.
‘필시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 같단 말이야.’
호기심은 넘쳐 났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지만 반드시 찾아내고야 만다.’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사이 소청의 걸음은 산기슭에 닿아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폐가가 보였다.
그곳은 흑웅패라 불리는 건달패들의 거처였다.
“어!”
불현듯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긴? 그래, 내가 처음 진가에 온 것이 열두 살……. 그러고 보니 그 나이 때 이 개새끼들이 나를 객점에 팔았었지! 그리고 왕철 형님도 분명히 이놈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천 비고에 대한 호기심이,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건달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거의 처절했던 기억으로 대체되었다.
“어? 누구?”
술에 취한 사내가 방립을 쓴 소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청은 익숙한 걸음으로 제일 중앙에 앉아 있는 털보에게 다가갔다.
사도련의 끝자락, 사도련의 한 갈래라고 할 수도 없으리만큼 미미한 흑웅패의 두목 한상인.
고아였던 자신을 객점에 팔아넘긴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품삯을 갈취한 악랄한 자식이었다.
사도련이라는 거대 연합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쁜 짓이라는 나쁜 짓은 모조리 하고 다녔던 놈.
신투가 된 이후로 흑웅방을 지워 버리고자 했었지만 그때만 해도 살아 있었던 왕철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이젠 말려 줄 왕철이 세상에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래전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응? 뭐냐?”
방립을 벗어 낸 소청의 얼굴에는 괴롭힐 곤충을 발견한 아이처럼 사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야? 이 애새끼는…….”
소청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빠각!
순간 술을 마시고 있던 건달패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칼이며 몽둥이 같은 무기들이 쥐여 있었다.
소청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코피를 줄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한상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자신의 가까이로 들어 올렸다.
“잘 있었냐? 이 개자식아.”
한 발을 걸쳐 올린 소청의 살벌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한상인은 등줄기로 소름이 ‘쫙’ 하고 돋아 오르는 것 같았다.
“너 뭐 하는 새끼냐!”
건달패들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나?”
소청이 이죽거리며 바라보다 한상인의 머리를 그대로 벽에 처박아 버렸다.
“아악!”
앞니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너희들은 모르겠지. 내가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알려 주려고. 내가 누군지.”
소청은 무릎을 꿇은 채 부들거리며 피가 줄줄 흐르는 제 입을 감싸 쥐고 있는 한상인의 복부를 거칠게 걷어찼다.
“커억!”
그는 한참이나 튕겨 나가 새우처럼 꺾인 채 꿈틀거리는 한상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건달패를 향해 씨익 웃으며 한상인의 발목을 비틀어 꺾었다.
꽈드득!
“끄아아아악!”
뼈가 뒤틀리는 잔인한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울려 퍼졌고 한상인의 발이 가죽만 붙은 것처럼 덜렁거렸다.
하지만 소청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직 내가 누군지 궁금한 사람?”
친절하게 의사를 물은 소청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한상인의 팔꿈치를 잡고 역으로 꺾어 버렸다.
“끄아아악!”
피가 얼굴에 잔뜩 튀어 오른 그의 모습은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위협에 있어서 고절한 무공은 필요하지 않다.
경외감과 두려움은 방향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주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
그만큼 사람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듯했다.
몰래 뒤로 다가온 건달패 하나가 단도를 잡고 소청의 등을 향해 찔렀다.
텁!
‘푹’이 아닌 텁.
단도는 이미 접근할 것을 알고 있었던 소청의 손에 잡혔다.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손에 공력을 돌린다면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겠지만, 소청은 일부로 맨손으로 잡아 피가 흐르게 두었다.
오두광.
과거 소청과 함께 잡혀 왔다가 도망치는 그들을 밀고해 건달패가 된 녀석이었다.
“크크크. 오두광 이 새끼, 여전하네. 전에도 그랬지. 내가 너한테 돌멩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소청의 모습에 오두광은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잔인한 놈의 뒤를 친 적은 없었다.
“그래. 너도 한번 당해 봐야지. 암.”
가볍게 오두광의 발을 걷어차 넘어뜨린 소청이 단창을 꺼내 거꾸로 잡았다.
퍼억!
곧게 뻗어 올렸던 단창이 완벽한 직선을 그리며 오두광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끄아악!”
비명이 나오고 피가 튀든 말든 소청은 내려치는 창대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도망치던 오두광의 손을 창날로 박아 고정시키고 정신을 잃어 늘어질 때까지 짓밟았다.
“하아, 하아.”
소청이 숨을 고르며 일어나는 순간 건달패들의 손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건달패들은 모두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꿇어.”
모두가 단체로 합을 맞춘 것처럼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오두강의 몸을 의자 삼아 앉은 소청이 건달패들을 바라보았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네?”
살벌하게 웃는 소청의 모습에 건달패들은 오두광처럼 저런 악귀 같은 놈을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열심히 떠올려야 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말이야. 너희들 막야라고 아냐?”
“…….”
건달패들은 갑작스러운 이름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난감해했다.
“잘 생각해 봐. 한 놈은 기억하겠지. 네놈들이 용소 객점에 팔았던 아이야.”
대답하지 못하면…….
끔찍한 미래가 떠올랐다.
“대, 대인, 그런 아이는 모릅니다. 막야라는 이름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듣습니다요.”
“…….”
소청의 표정이 이전보다 더 싸늘해졌고 건달패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갔다.
“대, 대인, 살려 주십시오.”
“다시 물어볼게. 그때가 열두 살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쯤 되었겠군. 당시 아이는 고아였어.”
“…….”
“오른쪽 입술 위에 깊은 상처가 있었고 왼쪽 새끼손가락이 하나 더 있었다. 너희는 분명 손가락 여섯이 있는 놈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었어.”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대인 살려 주십시오.”
“잘 생각해 봐. 하중, 모린, 아강과 함께 끌려왔던 아이야.”
아는 이름이 나왔는지 한 놈이 술술 불어 대기 시작했다.
“하중은 포목점에, 반반한 얼굴의 모린은 주루에, 아강은 고관댁 시비로 팔았습니다. 하지만 막야는 정말로 모릅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모두의 말처럼 과거의 그는 사라졌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물어본 건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좋아.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소청은 조금 허탈해진 기분으로 일어났다.
“하나만 묻지. 왕철 그 개새끼는 어떤 놈이 죽였나? 내가 점찍어 두었는데.”
건달패들은 그제야 머릿속으로 소청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왕철과 원한이 있었던 모양이라 생각했다.
왕철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두목이었던 사람이었고 엄청난 실력을 가진 배수였다.
어쩌면 눈앞의 소청은 그에게 주머니를 털렸을지도 몰랐다.
찾아와서 한상인을 저리 만들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것을 보면 주머니의 물건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틀림없다 생각했다.
그놈으로 인해 이런 꼴을 당한다 생각하니 죽은 놈에게 화가 났다.
“접니다! 제가 그놈 배에 칼을 박았습니다.”
“저도 몽둥이로 뒤통수를 쳤습니다.”
“저는 술에 약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호오? 그래. 너희들이 전부 가담한 거구나?”
“예. 그 개자식은 죽어도 싼 놈이니까요.”
건달패들이 왕철을 마구 씹어 대었다.
“그래. 잘했네. 아주 잘했어. 네놈들 모두…….”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겁에 질린 채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건달패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소청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
싸늘하게 지어진 미소.
차자자작!
단창이 장창이 되었다.
소청은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웃으며 사악하게 말했다.
“왕철. 잡혀 온 고아들을 불쌍하게 여긴 그분은 사파이자 뒷골목 배수에 불과했지만 내겐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순간 건달패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든 생각.
‘망할!’
“살려 주지. 무너지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소청의 창이 새하얀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폐가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은 소청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