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1화
20화. 마천 비고 (1)
“맹주, 서남 지부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제갈휘문이 찻잔의 김을 불어 내었다.
제갈무후의 현신이라 불리는 그는 정천맹의 총군사이자 청초각의 주인이었다.
정천맹과 대립하고 있는 사도련이 우월한 무력을 가지고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고 작은 시비가 난무하는 무림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의 지략은 언제나 정천맹의 승리를 만들어 냈다.
오죽하면 사도련주 위도혁이 ‘정천맹을 부수려면 제갈휘문 그 개자식 목부터 따야 해.’라며 이를 갈았겠는가.
반응이 없는 방유현을 무시한 제갈휘문이 손짓하자 황의를 입은 청초각의 학사가 소반에서 서찰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하지만 정천맹주 방유현은 분재를 손질하며 이리저리 살필 뿐 말이 없었다.
“이봐, 군사. 이쪽을 좀 잘못 자른 것 같지 않나?”
“…….”
노인의 물음에 제갈휘문이 한숨을 쉬며 일어나 가위를 빼앗아 버렸다.
“아니, 이보게. 야!”
“일단 좀 읽으세요.”
“허 참.”
군사의 직위에 있는 자가 주군 된 자에게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방유현은 입맛만 다실 뿐 그다지 언짢아하지 않았다.
사사로이는 그의 외숙부이기도 했고, 현재 정천맹의 수좌에 그를 올린 것이 바로 제갈휘문이었기 때문이다.
“요점만 이야기해.”
못 이기는 척 의자에 기대앉은 방유현이 귀찮은 듯 귀를 팠다.
그런 방유현을 지그시 째려본 제갈휘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좀 관심 좀 가지세요. 맹이 돌아가는 사정에 어찌 이리 무관심하십니까?”
“시끄럽다 이놈아. 어차피 네놈이 다 알아서 할 일인데, 왜 자꾸 찾아와서는…….”
“맹주님!”
제갈휘문이 뒤에 시립한 청초각 무인들을 흘낏 보면서 눈치를 주었다.
“쯧쯧, 제발 좀 적당히 해라. 너 때문에 쟤들은 뭔 죄냐. 연일 보고서를 종합하느라 밤새우고 아침부터 보고니 뭐니 난리를 치니…….”
“맹주님.”
“저 봐라. 쟤 눈 밑에 검은 거. 다 너 때문이다.”
“맹주님!”
“알았다. 알았어. 숙부를 보는 눈하고는. 일간에 네 아비를 찾아가서 하소연이라도 좀 해야지 원.”
방유현이 툴툴거리며 서찰을 펼쳤다.
“어디 보자. 흠, 진가? 이런 가문도 있었나?”
“간양 진가. 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표국 가문으로 당가의 예하입니다. 이번에 큰 사고를 쳤더군요.”
“호오? 제법인 녀석이 나타났구먼그래. 진소청?”
“예. 나이 십오 세에 당가의 대공자를 비무에서 이겼습니다. 얼마 전에는 운남과의 거래 문제로 당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군요.”
“그 당가를? 허! 진가라는 곳의 무력이 제법인 모양이군.”
“진가가 아닙니다.”
“뭐?”
“혼자입니다.”
“…….”
방유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자?”
“예. 세력이었다면 서남 지부에서 이미 관여했을 것입니다.”
“허, 어떤 놈이길래 혼자 당가를 그리 만들어?”
“맹주께서도 스물다섯에 서문 세가를 홀로…….”
“아, 그 이야긴 됐고. 말해 봐. 어떤 놈이야?”
“진소청, 현재 십구 세. 월창진혼 혹은 진혼창이라는 명호를 가지고 있고 월가창법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월가창법? 처음 들어 보는데? 그리고 열아홉에 녹의단 일백과 당욱, 당가 칠영, 가주인 당구독까지? 허, 그쯤 되면 당가 자체를 부숴 놓은 거나 다름없군그래.”
방유현이 조금 관심이 생긴 듯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당가 전체가 아니라 삼 할 정도의 전력이죠. 당가가 신성이라고 방심했을 겁니다. 원로원과 당가의 주력, 그리고 방계의 무인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싸움으로 복부에 두 번의 칼을 맞아 죽기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운남의 모자겸이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맹주님의 과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죠.”
“하여간 짜기는……. 어쨌든 대단한 친구군. 당가의 삼 할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전력인데…….”
방유현은 슬쩍 자신을 치켜세우는 그의 평가가 싫지 않은지 피식 웃었다.
“당태위와의 비무를 참관한 멸절사태의 말에 따르면 내공을 제외한다면 창술이 백대 고수에 버금간다고 하더군요.”
“백대? 뭐?”
“백대 고수요.”
“말도 안 되는. 당가의 삼 할 전력을 백대 고수가 상대할 수 있다는 겐가?”
“일단 당가의 문제에는 운남의 대족장도 있었으니까요.”
“…….”
방유현이 샐쭉하게 눈을 뜨고 제갈휘문을 쳐다보았다.
“물론,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요.”
“재미있군. 한번 보고 싶네. 얼마나 대단한 기재이기에.”
“아쉽게도 개방 사천 지부의 오취개를 보냈을 때는 이미 강호행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강호로?”
“예.”
“그래서 어딘데?”
“그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뭐? 파악을 못 했다고?”
“예.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만…….”
제갈휘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게 틀림없었다.
“애쓰지 마라. 어차피 오다가다 만날 것을. 그나저나 당가가 자존심에 타격을 좀 입었겠어. 제 놈들이 제일인 줄 아는 놈들인데 나이도 어린 한 놈에게 당했으니…….”
방유현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다음 보고입니다.”
“아 또 무슨 보고를…….”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다가 제갈휘문이 짜증스럽게 쳐다보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 그래. 해라. 해. 하여간 못돼 먹어서는…….”
“한 달 뒤, 동정호 악양루에서 정천맹 예하 후기지수들의 회합이 있습니다.”
“회합? 그건 또 누가 준비한 거냐?”
“원로원입니다.”
“하여간 노인네들이 매년 쓸데없는 일들을 만들어서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으신 맹주님도 곧 그 안에 포함됩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뒷방에 앉아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위인으로 보이냐? 다 털어 버리고 중원 유람이나 할 생각이다.”
“그건 곤란합니다. 정천맹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맹주에겐 강제 사항입니다.”
“안다, 이놈아. 호위니 뭐니 하며 그림자를 붙여 놓고는 감시할 생각이지. 해서 너는 다를 줄 아냐?”
“당연히 저도 포함되겠지만 거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여간 말은…….”
방유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짜증을 부렸다.
“어쨌든 회합은 중요합니다. 모임의 특성상 후기지수들 간의 교류 목적도 있지만 정천맹 자체로는 다음 대를 이끌어 갈 핵심 무인을 미리 점찍어 놓는 자리입니다.”
“뭐, 그렇겠지. 그 때문에 원로원에서도 매년 주관하는 걸 테고. 노인네들 그 나이가 먹도록 어찌 변하는 게 없어. 될성부른 나무에 물이나 더 줄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어떻게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만 하다니.”
“상생의 방법 중 하나죠. 해서 이번 모임의 주관은 맹주님께서 직접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방유현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부라렸지만 제갈휘문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지금 눈싸움하자는 건 아니시죠?”
“쳇!”
“말들이 많습니다. 임기 말이 돼서 그런지 맹주님께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요.”
“그게 뭐 어때서?”
“병에 걸리셨다는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병? 뭐 알아서 생각하라고 해라.”
“그 외에도 오존의 일인이신 맹주께서 늙어서 위도혁을 겁내는 건 아닌가 하는 소문도…….”
“누가 그래!”
제갈휘문이 피식 웃으며 속을 긁어 놓자 방유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직접 주관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하면 전 이만.”
“…….”
제갈휘문과 청초각 군사부 학사들이 나가자 방유현이 분재용 가위를 들고 턱을 괴었다.
“진소청이라……. 홀로 당가와 대적했다니 예상치도 못했던 녀석이 나타났군.”
찰칵.
어린 가지 하나를 잘라 내는 방유현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싸늘했다.
* * *
끼익, 끼익.
낮볕에 시커멓게 탄 노인은 힘들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희끗한 머리칼에 주름진 얼굴을 보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싶지만, 가는 팔에는 세월이 만든 근육 위로 힘줄이 잔뜩 돋아 올라 있었다.
검은 방립에 면사를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얇은 피풍의를 걸친 흑의인은 고개를 들어 멀리 줄지은 산악을 바라보았다.
광동과 광서의 경계를 가르며 대륙을 휘감았다가 대해에 이르러 곤두박질치는 산세와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울창한 밀림이 뒤덮인 영산.
중원 오악만큼 험준하지 않았지만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숲과 봉우리의 행렬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했다.
고개들 들며 감탄사를 내뱉은 그의 면사가 들춰지며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한 달 전 강호행을 핑계로 진가를 떠나온 소청이었다.
사천을 떠난 소청은 곧바로 남하했고 귀주를 지나 광서성 동남방의 끝자락인 오주(梧州)에서 배를 탔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배는 노인의 힘찬 노질에 따라 강줄기를 타고 흘러 길고 긴 십만대산의 허리에 도착했다.
‘십만대산(十萬大山).’
꽤 긴 시간을 돌아온 걸음에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떠올랐다.
‘막야의 끝이자 진소청의 시작점이 된 곳.’
과거 신투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마지막으로 찾았던 곳이자 진소청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하게 만든 마천의 비고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 여기가 시작이다. 전생에서 신투로 이루지 못했던 한을 풀고, 진짜 진소청으로 살아가는 거야.’
소청은 흥분된 마음을 다잡으며 결심을 굳히고 또 굳혔다.
“다 왔습니다요, 공자.”
노인이 배를 나루터에 대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여기.”
“아니 이렇게나.”
생각한 금액보다 많았던지 노인이 몇 개 남지 않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청은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는 노인을 뒤로하고 풀쩍 뛰어 강나루에 올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은하촌(隱河村)이라는 곳이었다.
과거에 수없이 와 본 경험이 있었지만 진소청의 얼굴로는 처음 온 곳이니 알아보는 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빨래터의 아낙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 모두 그대로구나.’
과거와 다르지 않은 풍경 속에서 달라진 것은 소청뿐이었다.
호리호리하지만 빼곡하게 근육이 자리 잡힌 무골이 되었고 볼품없던 얼굴은 약관의 잘생긴 미남이 되었다.
더욱이 짐조를 취한 덕에 경공은 더욱 빨라졌고 과거에 없던 강맹한 무공을 익혔다.
소청은 과거의 기억을 따라 은하촌의 중앙 길을 따라 정상을 향했다.
나루를 지나자 산등성이를 타고 계단처럼 경작된 논밭이 눈에 들어왔다.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주민들의 모습에 걸음은 느려졌고 마음은 편안해졌다.
마치 과거의 그때처럼 막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밭을 지나자 마을이 시작되었다.
그곳의 집들은 마치 포도송이를 엎어 놓은 것처럼 산자락을 따라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은하촌 장씨 마을.
과거에는 마천에 대한 조사를 위해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수도 없이 백주를 마시며 지냈었다.
‘마을 꼭대기 촌장의 집을 지나면 십만대산의 중심부로 가는 다리가 있었지.’
그의 기억대로 정상에 도착하자 절벽이 나왔고 그 반대편으로 가는…….
“어?”
소청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있어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반대편 절벽으로 향하는 출렁다리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다리가 사라져 있었다.
“이곳에 분명 사냥꾼들이 다니는 현수교(懸垂橋)가 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