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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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5화
54화. 피로 물든 갈대밭
잔인하게 뻗어 나가는 살기에 호송대의 무인들이 검기를 피워 올렸다.
소련주, 혈랑대.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참작을 보는 순간 습격자들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그들이 의뢰받은 것은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정천의 무인 일백이었다.
살펴본 바로는 호송단은 고작 삼십여 명뿐이었다.
의뢰인이 알려 준 정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도련에 소속된 호송단이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보복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뢰금이 상상을 초월했다.
선금으로 다섯 냥짜리 금원보 하나.
청부 대상의 얼굴 가죽 하나당 추가로 황금 열 냥.
낭인 시장 역사상 최고가의 의뢰였다.
또한 군문에서 사용한다는 전쟁용 살상 무기까지 지원되었다.
낭인들은 그들이 준비한 무기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름난 살수들이 모조리 움직였다.
혹여나 도망치는 이들을 죽여 가죽 하나라도 건질 요량이었던 낭인 수백이 갈대밭의 외곽에 진을 쳤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었다.
산공을 당했어야 하는 진소청은 혁련휘였고, 호송단은 사도련주의 호위대인 혈랑대였다.
의뢰 자체가 잘못되었다.
아무리 돈 앞에 목숨을 거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돌아가지 못해서는 받은 돈도 받아야 할 돈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상대가 사도삼위의 혁련휘에 혈랑대라면 승산은 없었다.
사태 파악이 끝난 근처의 낭인과 살수들이 재빨리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바람일 뿐이었다.
스걱!
참작이 휘저어질 때마다 싯누렇게 말랐던 갈대가 핏빛으로 물들며 살아났다.
일도에 서너 명의 습격자가 쓰러졌다.
“차돈!”
“예! 소련주!”
“혈랑 열을 데리고 종현자를 지키고 포로들을 호위하라! 지금부터 단 한 명의 목숨을 잃어서도 안 된다.”
“존명!”
빠르게 명을 내린 혁련휘가 습격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갈대를 헤치고 길을 만들어 오던 낭인들을 향해 참작이 내리그어졌다.
콰콰콰콰!
만경창파의 초식이 펼쳐지자 갈대밭의 한쪽 방향이 거대한 낫으로 밀어 버린 것처럼 잘려 나갔다.
휑하니 바닥이 드러난 갈대밭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갈대를 대신해 잘린 육편과 핏물이 가득히 차올랐다.
한쪽으로 모인 정천의 무인들을 감싸듯이 방진을 이룬 혈랑들은 다가오는 낭인들을 베어 내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피융! 퍼엉!
누군가 쏘아 올린 폭죽이 솟구쳐 산화하자 쏘아진 화살이 하늘을 거멓게 수놓았다.
‘하아! 이놈들이 준비를 단단히 했구나.’
해마저 가려 버린 화살비를 바라본 혁련휘의 얼굴이 분노에 물들었다.
낭인들이라고는 해도 사파에 적을 둔 자들이다.
동도가 함께 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사파의 특징이기도 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피어오르자 기운의 폭풍에 반경 십여 장에 서 있던 갈대가 모조리 뽑혀 나갔다.
경천기개.
그리고.
우웅!
애도 참작이 긴 울음을 토해 내었다.
쏟아지는 화살 비를 향해 솟구친 혁련휘가 하늘을 향해 참작을 내질렀다.
우르르릉!
뇌성이 토해지는 소음과 함께 붕산진곤이 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쩌저저적!
화살비가 기운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모조리 터져 나갔다.
“어찌 된 것이냐!”
낭인들을 공격을 지켜보던 편살원의 살수가 전투가 예상과 다른 양상으로 흐르자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세주님의 말씀대로 함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살수들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제길. 망할 놈 같으니. 하나 상관없다. 이대로 밀어붙인다.”
편살원의 살수들은 갑작스런 소요가 일어나자 당황하는 낭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투창기를 준비하라!”
드르륵, 드르륵.
거대한 수레가 밀려 나오고 쇠로 만든 살(虄, 화살)이 걸렸다.
말이 살이지 반 장에 이르는 크기는 창이나 진배없었다.
찌이이익!
수차를 닮은 회전대가 돌아가자 거대한 살이 당겨졌다.
투웅!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쏘아진 반 장짜리의 쇠꼬챙이가 갈대밭을 꿰뚫었다.
따앙!
무지막지한 투창의 힘에 막아 내고 있던 혈랑의 무인과 포로 몇몇이 꼬치처럼 꿰여 튕겨 나갔다.
방진에 틈이 생기자 낭인 살수들이 정천의 무인들을 향해 공격해 왔다.
‘젠장!’
화살 비를 막아 낸 혁련휘가 욕설을 내뱉으며 틈이 생긴 방진을 막아 내었다.
“망할 놈들, 군문의 투창기까지 동원한 것이냐.”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파의 무인들은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오로지 전진을 위해 싸웠다.
동료를 생각하기보다는 적을 죽이는 데만 치중하는 성향이 강했고, 무공 역시 그런 목적에 맞추어 발전해 왔다.
동료를 구하는 것보다 가장 먼저 적의 목줄을 따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켜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소청이 말하길 정천의 무인들을 미끼로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 했다.
한둘이 살아서는 턱도 없었다.
오늘 일어난 일들에 대해 정천에 증언을 해야 하니 살아 있는 인원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야만 미끼로 사용된 정천의 무인 중 일부가 죽더라도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마천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있다 했다.
문제는 한 방향이 아닌 전 방향에서 공격해 오니 방진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혁련휘가 방진을 떠날 수는 없었고 과한 기운을 사용했다가는 산공을 당한 무인들이 도리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짜증만 치밀었다.
‘젠장, 망할 친구 놈 같으니. 이런 어려운 일을 나한테 맡겨? 나중에 반드시 술을 톡톡히 받아 낼 테다!’
자신에게 일을 부탁하고 사라진 진소청을 향해 어금니를 뿌득뿌득 갈아 댄 혁련휘가 허공에 멈춰 서서 고함을 질렀다.
“혈랑대! 지금부터 퇴로를 만들겠다. 포로를 호위해 갈대밭 밖으로 벗어나라! 뒤는 내가 맡겠다!”
혁련휘는 어쩔 수 없이 퇴각을 선택했다.
사람 키만 한 갈대밭은 방어하는 쪽에게는 매우 불리한 장소였다.
적의 공격이 어디로 올지, 병력이 얼마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혁련휘의 외침에 습격자들과 싸우던 혈랑대가 포로들을 향해 모조리 물러나 방진을 최대한 좁게 만들었다.
퉁! 쐐애액!
시위가 놓이는 소리와 함께 쇠로 만들어진 창이 혁련휘를 향해 날아왔다.
턱!
얼굴을 향해 날아온 창을 움켜잡은 혁련휘가 온 힘을 다해 한쪽 방향으로 던졌다.
짜자자자작!
회전을 먹은 투창이 마른 갈대를 모조리 잘라 내며 커다란 길을 만들었다.
“지금이다! 추형진을 갖추고 퇴각하라! 차돈! 선두에 서라! 안창, 호개! 측면을 방어하라!”
추형진은 선봉에 대장이 자리를 잡아 쐐기 모양으로 병력을 배치해 적을 돌파할 때 사용하는 공격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포로를 지켜야 했기에 혁련휘가 뒤에 서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혈랑대가 진형을 갖추었다.
차돈은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나가며 전방의 갈대와 적들을 베어 내었고, 안창과 호개가 길게 늘어선 혈랑대를 이끌고 포로를 호위했다.
그러나 내공이 없는 포로들은 속도가 더뎠다.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망할, 정말이지 이런 싸움은 다신 하고 싶지 않군. 망할 놈들, 도대체 얼마나 동원한 거야?’
모조리 박살 내 버릴 힘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하니 혁련휘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콰콰콰콰!
만경창파로 뒤따르는 적을 단번에 쓸어버린 혁련휘가 좌우를 번갈아 움직이며 몰려드는 적들을 베어 나갔다.
“적이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폭뢰를 준비해라. 화공을 펼쳐 적을 불 속에 가두고 편살원은 물러난다.”
“존명!”
꽈광!
적진을 뚫고 퇴각하던 전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퇴로를 뚫고 있던 차돈이 큰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
저들은 공격해 오던 습격자들마저 육편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주님!”
혈랑 중 하나의 부름에 혁련휘가 재빨리 달려갔다.
“크으윽!”
차돈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차돈!”
“죄송……합니다.”
위중한 상처를 입은 차돈이 숨을 헐떡거렸다.
“조금만 참아라. 얼마 남지 않았다.”
혁련휘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품으며 일어났다.
“소련주! 화공입니다!”
호개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매캐한 연기가 피어 갈대밭을 뒤덮고 있었다.
“끄아아악!”
사방에서 치솟아 오른 화광에 습격자들마저 휩싸여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
그 모습을 보던 혁련휘의 콧등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 개자식들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수를 꺼내야 했다.
후일을 기약하고 싸우기에는 피해가 너무 컸다.
“그래. 일단은 지금만 생각하며 죽여 주지.”
손에 든 참작에서 일어난 붉은 기운이 전신을 휘감아 올랐다.
파삭.
머리를 묶었던 끈이 끊어져 나가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파천도법의 두 번째 초식이자 호신강기와도 같은 경천기개의 기운이 극의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붉은 그림자, 혈영.
기운이 일어나면 몸 안의 모든 내공이 사라질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내공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적을 베지 못하면 남은 것은 적의 칼에 죽는 파천도 최후의 무공.
목숨이 경각에 달하지 않는 한 위도혁이 절대 사용하지 말라 했던 것이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기운에 휩싸여 눈동자마저 붉은빛이 감도는 혁련휘가 정천의 포로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대신 길을 열어 줄 테니 최선을 다해 달려라.”
말을 마친 그는 지면을 밟고 퇴각하던 방향을 향해 쏘아졌다.
쏴아아악!
붉은 참작이 횡으로 베이자 붉은 빛이 전방을 갈라놓았다.
붉은 파도가 몰아쳐 적의 몸을 잘라 버렸고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적광의 기운은 불길마저 삼켜 버렸다.
더 이상 혈영들은 정천의 포로들을 지키지 않았다.
혁련휘의 좌우로 날개처럼 펼쳐져 마주 오는 적들을 모조리 베며 나아갔다.
살기 위해선 뛰어야 했다.
이미 제 놈들도 불길에 갇혀 있는 습격자들이 뒤를 따라잡으며 칼을 휘둘러 왔다.
최선을 다해 뛰지 않으면 뒤따르는 적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촤아아악!
혁련휘가 선봉에 서자 순식간에 갈대밭을 벗어나 개활지로 나섰다.
갈대밭 외부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을 모조리 반으로 갈라 버린 혁련휘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르고 있던 정천의 포로 일백은 겨우 서른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혈영대는 생존자를 지켜라. 지금부터 한 명이라도 죽임을 당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존명!”
도주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학살만이 남았다.
우우우우!
장소성과 함께 날아오른 혁련휘의 참작이 수직으로 내리그어졌고 붉은빛의 만경창파가 추격자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적광이 갈대숲을 가득 채울 때까지 혁련휘의 참작은 멈추지 않고 휘둘러졌다.
갈대밭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 * *
차라락!
천이 휘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걱.
퓻!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베였음에도 피가 튀어 올랐다.
“섬뢰 님.”
“말하시게.”
“지금부터 낭인 시장의 외곽을 포위해 주십시오.”
“자네, 설마 홀로 들어갈 생각인가?”
“…….”
소청은 따로 대답하지 않고 한쪽에 모여 있는 비마대에게 명했다.
“너희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전투가 아니라 감시다. 없는 실력으로 목숨을 낭비하지 말고 은신해서 도망치는 놈들을 발견하면 즉시 섬뢰 님께 고하라.”
“존명!”
소청의 명령에 비마대의 초사가 짧게 대답했다.
요 며칠간 교육(?)의 성과로 그는 서서히 말 잘 듣는 사냥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살인 좀 한다는 놈들 실력이나 좀 볼까?”
소청이 싸늘하게 웃으며 낭인 시장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