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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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4화
53화. 악랄한 자들
먹구름이 달을 가린 틈을 타 야행인 하나가 낡은 건물의 처마 아래로 숨어들었다.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밤을 밝히기에는 충분한 홰가 어둠을 밀어내는 곳이었다.
산서 중부의 령석(靈石).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법이 닿지 않는 무법 지대.
죄를 지은 이들이 가장 많이 숨어들어 있는 은거지였다.
사도련의 영역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로 분류되는 그곳.
낮에는 그저 판자촌에 불과한 그곳은 밤이 되면 질펀한 술자리가 이어지고 노예 경매장과 돈을 걸고 싸우는 격투장이 성행했다.
살인이 일어나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죽은 자는 버려져 들개 떼의 먹잇감이 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령석이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곳에 자리 잡은 하나의 단체 때문이었다.
낭인 시장.
일정한 거처가 없이 모여든 사파의 낭인들이 그곳에 모인다.
살수와 도적. 그리고 낭인.
돈이 되는 일이라면 제 혈족의 목까지 따오는 쓰레기들의 집합처였다.
그곳을 힘으로 지배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세력을 이루지 않는 그들에겐 사파를 통일한 위도혁의 권위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이 지배받는 것은 오로지 ‘금력’.
돈만이 그들을 결집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처마 밑으로 숨어든 야행인이 찾은 곳은 낭인 시장과 조금 떨어진 폐장원이었다.
군데군데 걸어 둔 홰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안이 어슴푸레했다.
와아아!
귀를 울리는 함성과 후끈거리는 열기, 자욱한 연기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잇조각을 손에 구겨쥔 채 환호하고 있었고 환호에 맞춰 철창 안 두 사람은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죽여!”
“죽여!”
“죽여!”
술과 피 맛에 취해 버린 이들은 징그럽게 혀를 내밀고 눈깔을 번들거리며 격투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행각을 부추기고 있었다.
미쳐 버린 듯한 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야행인은 토굴처럼 만들어진 작은 주점으로 다가갔다.
미리 선약이 있었던 것인지 탁자에 자리한 노인에게 다가간 그는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세주. 연통이 왔습니다.
그의 전음에 노인이 쪽지를 펼쳐 읽었다.
-사흘 후 사도련의 본성으로 압송한다?
-예.
-음…….
쪽지에는 뇌령도문에서 있었던 일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토굴을 밝힌 작은 호롱에 쪽지를 태워 버린 노인이 격투장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진소청이 위도혁을 만났다? 그리고 구금되었다?
노인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어렸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 압송된다고 하니 가는 길에 죽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성공만 한다면…….
-멍청한 놈.
-…….
-미끼일 것이다. 진소청이라는 놈이 위도혁을 어찌 구워삶은 것인지가 궁금하군.
-예?
-화가 났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될 일이다. 뭐 하러 사흘 후를 기다려 본성으로 압송한단 말인가?
-아!
-진소청이라는 놈은 필시 제갈휘문의 수족일 것이다.
-하지만 연결 고리가 없지 않습니까?
-없지. 대놓고 보여 줄 리 없다. 얼마 전 환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종남에 잠입해 있던 환영곡의 인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갈휘문이 의심을 품고 꼬리를 잡으려 한다더군.
-하면?
-뻔하지 않느냐? 정천에 잠입한 환영곡에게 내려진 명령은 두 가지였다. 꼬리를 자를 것. 그리고 나에게 합류할 것. 그런데 종남의 인물이 사라지자마자 진소청이 협상단을 구하러 온 걸 보면 제갈휘문과 연결된 게 틀림없다. 필시 명을 받고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이야.
-음…….
-큭큭큭. 어린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뻔하지. 하나,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 아닌가? 성공한다면 정사의 반목을 더욱 깊이 만들 수 있고, 정천에 숨어든 우리 측의 인물들을 이용해 싸움을 붙여 볼 수도 있는 일이다.
-하면 어찌할까요?
-어찌하긴 함정에 빠져 주어야지.
-예?
-잊었느냐? 이곳은 낭인 시장이다. 돈만 주면 우리를 대신해 놈들의 함정에 빠져 줄 놈들이 넘쳐 난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함정을 팠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를 해 주어야지. 그저 살수만 보내서야 되겠는가?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낭인들을 보내되 준비를 단단히 해서 보내라. 전투가 벌어질 수 있도록. 함정 자체를 부숴 놓도록.
-알겠습니다. 협상단에 숨은 우리 측의 인물은 어찌할까요?
-종현자라는 놈? 그깟 걸 뭐 하러 신경 쓰지? 어차피 쓰고 버릴 놈이다. 같이 묻어 버려라.
-존명.
* * *
위도혁이 돌아간 뒤.
정확히 사흘 후.
머리가 풀어 헤쳐져 얼굴을 가린 진소청을 필두로 포승줄에 묶인 일백여 명의 무인들은 삼엄한 경계 속에 뇌령도문을 떠났다.
산공독에 의해 내력이 금제당한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신발마저 빼앗겨 버린 그들의 맨발에 나뭇조각과 돌부리가 만든 상처가 새겨져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음 소리라도 내는 차에는 어김없이 몽둥이가 날아왔다.
식사는 소금에 절인 주먹밥이 전부여서 허기를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선두의 진소청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했다.
“망할 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버님이 구해 주실 일이었는데.”
남궁가의 삼 공자 남궁진린이 원독에 찬 눈으로 진소청을 쏘아보았다.
“잠깐 쉬어 가지.”
물이 마르고 갈대로 가득 찬 내천에 도착한 사도련의 호송 무인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저리 풀어 놓아도 되겠습니까?”
“왜 도망이라도 칠까 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산공을 당한 놈들이 도망쳐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저놈들 때문에 갈 길도 더딘데 술이나 한잔하자.”
“술요?”
“그래, 어차피 내일 안에만 당도하면 될 일 아닌가.”
“흐흐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래. 가져온 술이 제법 있으니까 저놈들에게도 몇 병 나눠 줘. 곧 죽을 놈들이니 마지막 가는 길에 술이나 올린다 생각하고.”
호송단장이 짐에서 술을 꺼내자 수하들이 군침을 삼키며 주위에 둘러앉았다.
‘멍청한 놈들. 이런 습격받기 좋은 위치에서 휴식이라니. 큭큭큭.’
종현자는 고초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락을 보냈으니 필시 움직일 것이 틀림없었다.
근래에 주목하고 있는 진소청이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살아 돌아가서 본 대로 고하기만 하면 된다. 사도련이 협상단을 모조리 죽였다고.’
종현자가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는데 남궁진린이 나눠 받은 술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일 조장님. 저희 때문에 괜한 고초이십니다.”
그가 내민 대나무 술병을 받아 든 종현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남궁 공자, 고초라니 당치도 않소. 내가 가진 힘이 모자라 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그게 어디 조장 때문이겠습니까? 다 멋모르고 날뛴 저 개자식 때문이지.”
남궁진린이 고개를 처박고 주저앉아 있는 진소청을 노려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망을?”
“예. 저들의 경계가 느슨합니다. 조금 더 술이 오르기만 기다리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종현자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쓰레기 같은 놈. 나는 적어도 곤륜의 미래를 위해 협력했을 뿐이다. 곤륜을 살리기 위해…….’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종현자는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췄다.
“가능하겠는가? 자네나 나나 내력이 금제되어 있는 상태인데?”
“힘들겠지요. 하지만, 저들을 미끼로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끼로?”
종현자가 잔혹하게 변한 남궁진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남궁진린은 남궁가에서 함께 온 창궁검수들과 협상단으로 온 청룡단의 무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현자가 속으로 남궁진린을 비웃었다.
하지만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동도의 생명을 담보로…….”
“일단은 우리가 살아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의 도주를 도와주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죽음은 우리가 살아 나간 뒤 저들의 가족에게 보상하면 될 일입니다. 또한 저와 조장님의 목숨을 살린 의인이 될 터이니…….”
“아무리 그래도…….”
종현자가 꺼림칙해 하자 남궁진린이 다급한 소리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갈대밭을 지나고 나면 사도련으로 가는 본성 관도입니다. 그리되면 도망칠 수 없습니다.”
“으음…….”
“일단은 살아야 합니다. 어찌 저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십니까? 저와 조장의 목숨이 저들과 비교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자식, 제 목숨이 위험해지면 나를 이용할 생각이겠지.’
뻔히 보이는 수에 종현자가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이곳에서 삼문협까지 거리는 백여 리입니다. 저들이 잠시만 시간을 번다면 화산과 종남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되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진린의 모습에 종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편살문의 살수들이 도착할 것이다.
호송대건 정천의 인물이건 모조리 죽을 것이다.
‘흐흐흐, 놈. 빠져나가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다.’
종현자의 동조를 얻자 남궁진린이 천군만마라도 얻은 표정으로 호송대의 눈치를 살폈다.
우득.
남궁진린은 술병을 옷자락에 싸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깨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대나무 조각 하나를 들어 종현자의 포승줄을 끊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촤자작!
갈대 잎을 빠르게 스치는 소리.
“습격이다!”
술을 마시던 호송단이 검을 뽑아 들었고, 사방에서 검을 든 흑의인들이 솟구쳐 올랐다.
“아니 이런!”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해하던 남궁진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듯이 움켜쥔 것은 다름 아닌 종현자였다.
“큭큭큭. 정말 때맞춰 도착해 주었군.”
파하학!
짧게 그어지는 날카로움에 의해 남궁진린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종현…….”
남궁진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고 피가 사방을 적셔 놓았다.
“조장! 이게 무슨 짓…….”
청룡단의 무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께로 쇠붙이 하나가 삐죽하게 솟아올랐다.
“큭큭큭, 무슨 짓은. 이런 짓이지.”
종현자가 자신의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마셨다.
“…….”
정천의 무인들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무인들이 곳곳에서 습격자들의 검에 꼬치처럼 꿰여 쓰러졌다.
“내력이 돌아오는군.”
산공독에 대한 해약을 마신 종현자가 단전을 채우는 기운을 느끼며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조장!”
청룡단의 무인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현자를 노려보았다.
“큭큭큭. 이곳에서 모조리 죽어라. 살아 나가는 것은 나 혼자로 족하니까 말이야.”
갑자기 돌변해 버린 종현자가 살기를 머금고 동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세운 손이 심장을 파고들었고 후려친 주먹에 허연 뇌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텁.
세 번째 무인을 공격하던 종현자의 손이 누군가에 의해 잡혔다.
뿌드득.
“끄아아악!”
남궁가의 무인을 노렸던 종현자의 손가락이 역으로 꺾이며 잔인한 소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목이 비명과 함께 꺾어져 허연 뼈를 드러내었다.
“쓰레기 같은 놈.”
진소청.
힘없이 누워 있던 진소청이 종현자의 손길을 막았다.
터덕.
손목을 꺾어 버린 진소청의 손이 종현자의 아래턱을 뽑아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을 종현자의 입에 집어넣어 아래 이빨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그 친구가 그러더군. 독단을 씹어 자결할지도 모른다고.”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진소청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
“헐얼언이?”
아래턱이 빠져 버린 종현자는 놀란 경악한 표정으로 진소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소청이 아니었다.
사도련의 후계자, 혁련휘.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혁련휘는 싸늘하게 웃으며 종현자의 마혈을 짚었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종현자의 몸이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련주!”
그때 술을 마시고 있던 호송단이 한달음에 달려와 붉은 도갑을 건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나태하기 짝이 없던 그들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투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죽으면 안 되겠지? 우리의 결백을 정천에 가서 알려 줄 증인들이니까.”
혁련휘가 자신의 애도 참작을 꺼내 손에 쥐고 스산하게 말했다.
“쓰레기를 청소할 시간이다. 모조리 죽여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