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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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1화
50화. 태풍의 시작점
하남, 섬서, 산서의 세 성과 맞닿은 삼문협은 오랫동안 정사가 반목해 온 격전지였다.
섬서에는 화산과 종남이 있었고 하남에는 숭산이 있었다.
그럼에도 삼문협의 절반 이상을 사도련이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의 문파 때문이었다.
뇌령도문.
사도삼위의 일인인 섬뢰.
환갑이 넘은 노구의 무인은 사도련 본성으로 가는 길목에 터를 잡았다.
위도혁의 충복이었던 그는 오랫동안 삼문협의 물길을 막고 사도련을 지켜 왔다.
단강구를 떠난 첫째 날 저녁.
삼문협 내 사도련 영역으로 도착한 혁련휘의 얼굴은 복잡하기만 했다.
소청과 함께 주루를 찾았지만 웬일인지 점소이가 가져온 명주 백화로의 맛은 씁쓸했다.
“마종이라…….”
진지해진 그의 얼굴에서 가벼움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천에 대해서 알게 된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
“일전에 말했지. 자네에게선 정사마를 규정짓는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고 말이야.”
뱃전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네와 달리 그 느낌이 극에 달한 사람도 있다 하더군.”
‘그렇군, 분명 마기에서 벗어난 검존께서는 정기를 느낄 수 있었지.’
마기가 흩어진 검존의 느낌은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온화함이었다.
검존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는 듯했고, 혁련휘의 기운은 모든 것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스승님께 들은 기억이 있어. 한 십 년 전쯤에 한 사내가 찾아왔었다 하셨지. 그가 비무를 청했고 스승님께서 이겼다. 하지만 뛰어난 자라 차마 죽이지 못했지만 스승님께서는 완전한 마(魔)가 있다면 그가 될 거라며 감탄하셨어.”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마종은 위도혁을 찾아왔었다.
아쉬움이 들었다.
빌어먹을 강자의 아량이었을 것이다.
강자의 자신감이었을 테고.
‘마천의 잔인함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봤다면 그런 아량 따위는 베풀지 않았을 텐데.’
위도혁이 그를 죽였다면 마천은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조금씩 비틀려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자신 역시 비틀림의 산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검존을 꺾고 위도혁을 경험했으니 그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오리라.
그 전에 그의 수족을 모조리 잘라 버려야 했다.
만약 괴물이라 평가받는 위도혁보다 강해져서 돌아온다면 그를 막기도 벅찰 테니까.
“자네 말은 알겠네. 어쨌든 현재 정천 내에 마천 예하의 환영곡 소속 무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 마수가 사도련으로 뻗어 올 것이란 말이지?”
“그래. 편살원의 살행이 끝나면.”
“흠, 그렇다면 자네는 그들이 섬뢰께서 구금한 이들을 노릴 것이라고 보나?”
역시 괜히 사도련의 후계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맥을 짚고 있었다.
“내가 잔마라면 그럴 거야. 현 정천맹주의 식솔을 죽이고 협상단까지 죽여 버리면 정사대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혼란이 야기될 거야. 숨어드는 데 그만큼 최적인 상황은 없지.”
“그렇군. 정사대전이 일어나면 전력이 줄 테니 좋고,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혼란을 틈타 내부에 자신들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으니 좋겠지. 결국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뿐이군.”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연에 방지하고 정사가 연합할 수 있다면…….”
“어려운 일이군. 정사가 반목한 지 수백 년. 걸어온 길이 다르고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른 것인데…….”
혁련휘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청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오랜 반목을 끝내고 연합을 만들어 마천에 대항한 두 명의 사내, 그중 한 명이 눈앞에 있었다.
“혹, 자네는 섬뢰, 그분이 마천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는군.”
“정황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내가 아는 섬뢰 그분은…….”
“나는 남궁천세도 의심하고 있다.”
“…….”
혁련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후우, 그렇다면 할 말이 없군. 좋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섬뢰께서 계시는 뇌령도문으로 가 보도록 하지.”
“그래. 이목이 그쪽으로 쏠린다면 더욱 좋겠지. 사도련의 후계까지 있는 마당에 사달이 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잔인하군. 그들을 미끼로 쓸 참인가?”
“그래. 놈들을 잡으려면 그 어떤 방법도 사용할 생각이야.”
“…….”
혁련휘는 점소이가 가져온 명주(名酒) 백화로(百花露)가 비어 가자 빈 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진탕 술을 마셔 보려 했더니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그들이 막 일어서려는데 한 떼의 무인들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소련주를 뵙습니다!”
칼날 같은 기도에 붉은 피풍의를 걸친 인물들이 일제히 혁련휘의 발아래 엎드렸다.
혈랑(血狼) 소속의 무인, 백건이었다.
백건은 혁련휘의 옆에 앉은 소청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련주 이외의 사람과 술자리를 가지는 혁련휘의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다. 백건, 그나저나 용케도 찾아왔군. 연통을 보내지 않았는데.”
“소련주께서 항시 사용하는 귀환로이기에 근방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누구의 지시인가?”
“혈수께서…….”
“사마 장로께서? 어째서?”
“막야라는 자 때문 같았습니다.”
“막야?”
소청의 귓가가 솔깃해졌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막야라면 그 남궁가에 나타났다는 사내 말인가? 파천도를 사용했다는?”
“예. 련주께서 주재하신 회의에서 그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마 장로께서 귀환하는 즉시 모셔 오라 했습니다.”
“…….”
백건의 말에 혁련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와 상관도 없는 일에 장로께서 나를 부른다고? 자네가 미친 건가? 아니면 사마 장로께서 미친 건가?”
“…….”
혁련휘의 몸에서 진득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자 백건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잊고 있었다.
이 순간 막야든, 혈수 사마현이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도련의 영역에서 그가 가지는 위치를 잠시 망각했다.
위도혁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가 걷는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소, 속하가 실언을 했습니다.”
백건은 마룻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처분을 기다렸다.
사도련은 그런 곳이었다.
의논, 회의, 토론…….
그따위 것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위도혁의 말이 곧 법인 곳이었다.
반문과 항변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다’라고 하면 그런 것이고 ‘아니다’ 하면 아닌 곳이었다.
그리고 혁련휘는 위도혁이 만든 사도련의 모든 것을 이어받고 있는 후계.
그는 위도혁을 제외한 사파의 모든 이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던 그때.
“하아…….”
긴장감 속으로 소청의 나른한 한숨소리가 파고들었다.
모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혁련휘는 의아함이었고 혈랑들의 눈에는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임에도 주인의 행사에 한숨을 쉬는 소청을 노려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분명 친구라 했는데 눈깔을 모조리 파내야 하나?”
나지막하지만 서늘함이 묻어나는 혁련휘의 목소리에 소청을 향했던 시선이 모조리 마룻바닥으로 돌려졌다.
“아, 미안. 신경 쓰지 마라. 너를 향한 한숨이 아니니까.”
소청의 말에 혁련휘가 천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 수하들 말이군.”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친구들이야. 이런 식이면 하루에 몇을 손봐야 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소청이 ‘픽’ 하고 사라져 버리자 백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청이 사라지자마자.
“끄아아악!”
별안간 주루 밖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잔인한 매타작 소리가 들려오자 혁련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천에 관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하들을 단련시키는 그에게 오히려 감사를 해야 했다.
그의 목적이 사도련 내에 암약하려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마 장로에게 전해라. 잠시 뇌령도문에 가야 할 일이 있다고. 급한 일이면 그쪽으로 오라고 해.”
“존명!”
“아, 그리고. 호위 따위를 목적으로 따라붙지 마라. 뒈지기 싫으면.”
“…….”
혁련휘의 말에 백건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혁련휘의 행보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안하무인에 독불장군 같은 혁련휘의 옆에 난생처음으로 ‘친구’라는 이름의 일행이 생겼다.
백건이 물러난 뒤 구타를 가장한 교육을 끝내고 돌아온 소청을 향해 혁련휘가 가볍게 웃었다.
“끝났나?”
“뭐, 그럭저럭.”
“그럼 출발하지.”
* * *
“뭐? 뇌령도문으로 가셨다고?”
“예! 백건이 보낸 전서에…….”
혈수 사마현은 연락 담당의 무인이 가져온 전서를 읽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예? 그야 저도 잘…….”
“음. 어째서 뇌령도문이지? 설마? 정천의 인물들 중에 아는 이가 있는 건가?”
사마현은 섬뢰가 구금하고 있는 정천맹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곡 장로에게 연락해라! 지금 즉시 뇌령도문으로 간다!”
“존명!”
연락 담당 무인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나갔다.
“그런데…… 친구라고? 소련주에게?”
사마현은 문득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봐 왔던 혁련휘였다.
뛰어나도 너무도 뛰어났던 아이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었고 련주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갇혀 있는 천재일 뿐이었다.
“모를 일이군. 그 외골수 같은 성격 탓에 련주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었는데…….”
혁련휘의 귀환 소식은 장로원뿐 아니라 위도혁에게도 전해졌다.
“휘아가 돌아왔다고?”
“예.”
만중의 대답에 위도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어디쯤이라던가? 녀석,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난 일들을 경험하고 왔을지. 좋은 술이라도 가져왔으려나? 아니면 새로운 미녀에 대한 이야기? 허허, 이거 채비를 해야지. 무공은 또 얼마나 늘어 있을꼬. 녀석과 한판 하고 마실 술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말이 많아졌다.
의자에 일어나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는 그의 모습에 조바심이 넘쳐 보였다.
그런 그를 보는 만중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 련주님.”
“응? 뭐? 왜?”
“소련주께서 뇌령도문으로 갔다는 전갈입니다.”
“…….”
갑자기 위도혁이 정지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찡그려진 눈으로 만중을 바라보았다.
딱히 기세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만중이 재빨리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위도혁이 제자를 너무 아낀다는 사실뿐이었다.
사실 위도혁이 혁련휘에게 가지는 감정은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섬뢰를 만나러 갔다고?”
“예.”
“어째서?”
“그건…….”
“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위도혁이 무언가 깨달은 것인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 제 놈이 ‘막야’로 행동한 때문에 남궁가와 마찰이 생긴 것을 우려한 것인가?”
“…….”
“헛헛, 하여간 너무 물러. 그까짓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거 어쩔 수 없지. 섬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직접 가 보는 수밖에.”
“뇌령도문으로 가시겠습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섬뢰가 혹여 휘아의 부탁을 거절이라도 하면 안 되지. 내 직접 가서 남궁가의 아이들과 정천맹의 협상단을 풀어 주라 해야지. 아니 그런가? 내가 가면 섬뢰의 체면도 서고 휘아의 체면도 서고 일석이조일 테니 말이야.”
“지당하신 판단입니다. 채비를 하겠습니다.”
“됐어. 채비랄 게 뭐 있나. 천천히 가도 금방 도착할 텐데. 헛헛헛.”
위도혁이 휘적거리며 나가자 만중과 혈랑들이 떼를 지어 그 뒤를 따라갔다.
혁련휘로 인해 갑자기 사도련의 시선이 섬뢰의 뇌령도문과 정천맹의 인물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