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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4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5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47화

46화. 시대를 이끌어 가는 자

 

 

 

 

사도련에서 ‘막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났던 그때.

모든 사건의 원흉이기도 한 소청은 한수(漢水)의 지류를 통해 단강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가 오른 평저선은 이백 섬의 쌀과 오십이 넘는 사람을 실을 정도로 거대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검은 방립에 피풍의를 두른 소청은 뱃전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를 안은 여인을 볼 때는 어머니 섭약란이 생각났다.

당과 하나를 들고 나누어 먹으며 웃고 있는 형제를 보면 소강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지워 버린 소청은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피해 선미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 녘이라 그런지 안개가 강가에 옅게 스며 있었다.

왠지 감성을 끓어오르게 하는 풍경에 소청이 미리 준비해 온 술을 입가로 가져갔다.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평저선 위는 한가하기만 했다.

그때 주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당가 소식 들었습니까?”

“진가한테 괴멸당했다며?”

함께 배에 올랐던 종남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이권 때문이겠지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들이 제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게 하루 이틀인가?”

“저급한 놈들 같으니. 그런 놈들과 같은 맹에 소속되어 있는 게 부끄러웠는데 잘되었습니다. 암기나 독같이 비열한 수를 쓰는 놈들이 종남의 이름과 같은 자리에 놓이다니요.”

“그렇긴 하지. 어찌 보면 차라리 망해 버린 것이 잘된 것인가?”

“암요.”

사제라는 자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표했다.

“그런데 그 진가라는 곳 말이야. 근자에 오대 무가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던데.”

“정말 말 같지 않은 소리입니다. 고작 무인 하나 나왔다고 해서 오대 무가라니요. 맹주께서 나신 방가(房家)장도 오대 무가로 추대되지 못했는데.”

“그도 그렇군. 하여간 세가라는 것들이. 쯧쯧.”

그들이 나누는 말에 소청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종남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던 장로 혁세기가 마천의 종자로 바뀌었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그들이었다.

발 앞의 똥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남의 발만 쳐다보고 있는 자들이 명문 정파라 으스대는 꼴이 우스울 뿐이었다.

‘저런 것들이 판을 치니 그리 쉽게 세작들이 숨어들었을 테지.’

소청이 무시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보오.”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어디서 봤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 좀 같이 먹읍시다.”

“…….”

그의 시선이 소청이 들고 있는 술병에 닿아 있었다.

빙긋이 웃는 그의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큭큭큭,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인정이 많을 줄 알았지.”

틀렸다.

소청은 절대 인정이 많지 않았다.

그저 익숙함에 작은 성의를 보인 것뿐이었다.

“어디까지 가오?”

“단강구.”

“이런! 나랑 방향도 똑같구먼그래. 핫핫핫.”

짧은 대답에도 언짢아하기보단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쾌활한 사내, 싫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캬아! 이거 술맛이 끝내주는구먼 그래. 형장은 어디서 이런 좋은 술은 구한 거요?”

그저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백주일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의 공치사가 싫지 않아 맞장구를 쳐주었다.

“있는 돈을 다 털었소.”

“어쩐지. 술맛이 좋더라니. 나는 혁련휘요.”

그가 이름을 밝히는 순간 소청의 얼굴에 놀람이 생겼다.

‘혁련휘라고?’

“응? 왜 그러오? 하아! 이거 참, 가명을 댈 것을 그랬나? 하도 훤칠하길래……. 흠흠, 남색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

별안간 먼 미래의 영웅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무인 중 한 명이었다.

모자겸이나 제갈휘문을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무황이라 불렸던 위도혁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천재였다.

일 도에 대해를 가르고 이 도에 적들을 두려움에 빠트리며 삼 도에 적을 압살했던 전신(戰神).

그는 영웅이었다.

사파에 적을 둔 이들, 더구나 신투였던 막야에게 있어 혁련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천 정벌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무위와 용맹은 존경받기 충분했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자.’

왠지 그와의 만남이 묘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사파의 영역은 제갈휘문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이었다.

종남의 혁세기로 위장한 자를 통해 마천의 세작들이 사도련 내에서 움직이는 조짐을 파악한 뒤였다.

또 다른 우군이 필요했다.

사도련주 다음으로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라면 더없이 좋은 아군이 될 터였다.

마천을 찾기로 한 이상 모든 것을 이용해야 했다.

묵영단의 단주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목적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었군. 위도혁의 제자라니.”

“뭐 그리 대단하진 않소.”

혁련휘가 눈에 이채를 띠며 빙긋이 웃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해도 자신의 스승이자 무림 최고수인 위도혁의 이름을 함부로 담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많은 자리를 두고 소청의 옆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

배에 오른 순간부터 이상했다.

행색을 보면 그저 사파 낭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보는 순간 특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기도가 있었다.

그것이 무공을 두고 정종, 사종, 마종으로 구분 짓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정사마의 경계에서 벗어나 버린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어떤 사파인도 그와 같은 기도를 가진 자는 없었다.

더욱이 사파인은 제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정파인인가 봅니다. 이름은 뭐요?”

“진소청이오.”

이미 뜻한 바가 있었던 소청은 별다른 고민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응? 진소청?”

혁련휘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 간양의, 당가와 싸운? 그 진소청?”

“…….”

무언의 긍정.

“하아! 이거 정말.”

혁련휘의 얼굴에도 놀람이 떠올랐다.

수로채의 영역인 장강에서 진소청을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근래에 무림으로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쾌활하지만 호전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는 강한 무인이라면 자다가도 칼을 들이밀고 보는 성격이었다.

만나 보고 싶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하오문에 부탁해서 제법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반갑소! 내 당신을 찾아 간양에도 갔었고, 동정호에도 갔었소. 만나지 못해서 허탈하게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럴 수가! 크하하!”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에 뱃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제 귀에 원을 그렸다.

“내 용모파기를 외우다시피 했소! 그런데 이건 뭐, 그린 놈이 쓰레기였구먼. 이런 잘생긴 얼굴을 그따위로 그렸으니 당연히 못 알아봤지.”

갑작스레 쏟아 내는 그의 말에 소청이 살짝 몸을 물리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험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인이 좋소.”

혁련휘는 소청이 생각했던 성격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것도 인연인데 자, 한잔하시오. 내 어찌 술이 아깝겠소.”

“그거, 내 술이오.”

“아! 크하하하! 누구 술이면 어떻소? 파하하하!”

동경했던 시대의 영웅은 너무나 가벼웠다.

“경오년생이면 나보다 한 살이 어리구려. 뭐 우리가 깨복쟁이 꼬마도 아니고 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말 놓고 친구로 지냅시다.”

그는 사도련의 촉망받는 후계였고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당금의 무림에 정사의 반목이 오래되었고 그 경계가 명확한데 정파임이 밝혀진 자신과 친구를 하자니.

자유분방하고 거침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신보다 더한 성격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몇십 년을 살았고, 더구나 제갈휘문에게도 말을 놓는데…….’

“핫핫핫, 보게 소청. 자, 한잔하게. 어찌 술이 아깝겠는가?”

이미 놓고 있었다.

“그거 내 술이라니까.”

“핫핫핫!”

또 웃음으로 때우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야.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 봤는데 자네 같은 느낌은 처음이야. 이건 뭐, 정사마의 구분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런가?”

소청이 싱긋이 웃으며 술병을 받아 들었다.

“있지. 있고말고. 다들 자신들이 익힌 무공에 따라 독특한 기도를 가지고 있거든. 나는 그게 느껴져.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 온 무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흠흠, 세 번째이네만 여인이 확실히 더 좋으니 오해는 말게.”

계속해서 그 부분을 강조하는 걸 보니 오히려 남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 뱃전에서 누군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흐, 흑룡기다!”

순간 뱃머리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검은색 옻칠을 한 쾌속선 세 척이 물살을 가르며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장강수로채로군. 뭐, 긴장하진 말게. 의외로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거든.”

“…….”

나쁜 놈과 나쁘지 않다는 기준이 모호했다.

정파와 수적, 혹은 정파와 녹림을 두고 사람들은 적대적인 공생 관계라 했다.

수적과 녹림이 있어야 표국이 돈을 버는 법이고 호위가 필요해지는 법이다.

그래야 명문 대파에 속가제자가 늘 것이고 돈이 쌓인다.

수적과 녹림이 정파에 돈을 벌어 준다, 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결국 그것이 무림이 존속해 온 과정이었다.

정말 찬성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정과 사였고 선과 악이었다.

도적으로 오랜 삶을 살아온 소청으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퉁.

배가 서로 부딪치자 선두로 수적들이 올라왔다.

“야! 걷어!”

우두머리로 보이는 털보가 거만한 표정으로 소리치자 상의를 입지 않은 수적들이 칼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멈추어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종남의 후기지수 중 하나가 수적들의 앞에 당당하게 나섰다.

“넌 뭐냐?”

털보가 그를 쳐다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종남의 이대제자 우정안이다.”

“근데?”

“정협의 도를 걷는 무인으로 어찌 수적을 보고도 모른 체하겠는가? 피를 보기 전에 물러나라.”

우정안이 검병에 손을 가져가자 털보가 피식 웃었다.

“지랄하네.”

“뭐…….”

일순간 털보의 신형이 쭉 늘어난다는 착각이 들었다.

“케켁!”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린 우정안의 모습에 종남의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나 수룡채 우량이다. 종남의 무인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나서지 말고 꺼져라.”

그의 몸에서 진득한 투기가 뿜어져 나오자 발 어림의 갑판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수룡채의 부채주 우량.

장강에서만큼은 그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열여덟 곳에 달하는 장강수로채에서도 이십 위 안에 꼽히는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둔해 보이는 몸이었지만 쾌속하기 짝이 없는 권공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의 손에 수장된 배들이 수십 척을 넘었다.

이름 없는 후기지수들이 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망할…….’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우정안은 괜히 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원망해야지.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물러나기에는 명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재빨리 검을 뽑아 올려 원을 그리자 우량이 손을 놓고 물러났다.

“어쭈? 해보자 이거야?”

“네놈! 용서하지 않겠다! 사제들은 검을 들어라! 대의를 위해 이곳에서 수적들을 단죄한다!”

“하아…….”

우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될 수 있으면 정천맹의 세력과는 부딪쳐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거 원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군.”

우량이 치켜뜬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냐,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우량이 쿵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밟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을 솟구쳤다.

한 호흡이 채 끝나기 전에 우정안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 그의 주먹이 쾌속하게 내리꽂혔다.

“웃!”

재빨리 검을 비틀어 쳐올리자.

까앙!

피육으로 이루어진 주먹과 쇠붙이의 부딪침인데 쇳소리가 났고 한수의 협곡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소리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고 여인들은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종남의 제자인 우정안의 검에 실린 검기를 우량이 후려치자 조각난 기운이 사방에 뿌려졌다.

둘의 싸움으로 뱃전이 잘게 떨리고 사방에 칼자국이 생겼다.

짜앙!

일 장여를 두고 떨어진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멀쩡하기만 한 우량과는 달리 우정안은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검병을 잡은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았고 팔이 저려 왔다.

‘망할, 수적 따위가…….’

우정안이 어금니를 깨물며 검기를 잔뜩 불어 넣었다.

실처럼 유형화된 검기가 넘실거리며 뻗어져 나왔다.

“하, 제법이네. 덤벼 볼 정도는 되겠어!”

우량이 발을 굴렀고 우정안이 검을 휘둘렀다.

파앙!

둘의 공격이 부딪치려는 찰나 누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흑포를 휘날리는 혁련휘였다.

한 손으로 우정안의 검을 잡아 꺾어 버렸고 또 한 손으로는 우량의 목을 잡고 패대기쳤다.

땅, 쾅!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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