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4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46화
45화. 사도련주 위도혁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대 맹주 방유현.
맹주의 자리가 끝나면 언제나 정천맹을 떠나 강호를 유랑하겠다던 그는 원로원에 들어앉았다.
그의 무공 수위와 명성으로 인해 전 원로원주가 자리를 내놓아 새로운 원주가 된 참이었다.
“원주님.”
“딱딱한 성격하고는. 이젠 그냥 뒷방 노인이니 외숙이라 불러라.”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빙긋이 웃은 제갈휘문은 적당한 방안을 찾아내었다.
정천맹에서 자신 다음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자 호법원이 아니라도 남궁천세를 감시해 줄 수 있는 사람.
“어떠냐? 남궁맹주가 나보다는 낫지? 듣자 하니 열의와 성의가 넘친다 하더구나. 벌써부터 장로들과 친분을 쌓고 각파의 수장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지?”
“예.”
“좋은 일이다. 정천을 이끌어 가자면 그리해야지.”
“원주님과는 다르죠?”
“뭐? 핫핫핫. 이 녀석. 이젠 아예 대놓고 질책하는구나. 소속이 달라졌다 이거냐?”
“잘 아시네요.”
“쳇.”
제갈휘문이 빙긋이 웃으며 원로원을 향해 걸었다.
후원의 정자에 도착하자 시비가 차를 준비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늘 분재나 손질하며 소일거리 하고 있지.”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불편할 것이 무에 있을까? 그저 할 일이 없어서 답답할 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강호나 둘러볼 것을.”
투덜거리는 방유현을 보며 제갈휘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도련의 일은 어찌하기로 했느냐?”
“협상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협상단?”
“예. 해서 이번에는 청룡단을 보낼 생각입니다.”
“청룡단을?”
방유현의 얼굴에 수심이 생겼다.
“예. 일단은 예물이라도 보내 보아야겠죠. 굳이 저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음, 네가 생각이 있겠지만 잘못하면 마찰이 커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해서 한 사람을 더 보내 볼 생각입니다.”
“누굴?”
“진소청입니다.”
“뭐? 진소청? 그 아이를 보냈단 말이냐?”
“아니요. 아직 뜻을 전하진 않았지만…….”
“흐흠, 그래?”
방유현이 턱을 쓸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겠느냐? 지금까지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말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구나. 허, 제발 위도혁 그 친구와 부딪히지 말아야 할 것인데…….”
“예. 하지만 이번 일은 진소청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
제갈휘문의 중얼거림에 방유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숙부님.”
“허, 이놈이 숙부라 부르는 것을 보니 부탁할 게 있나 보구나?”
“예. 조카로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놈이 그리 나오면 영 불안한데……. 그래. 근자에 심심하던 차였으니 한번 해 보거라.”
“남궁 맹주를 살펴봐 주십시오.”
“응? 뭐?”
뜬금없는 부탁에 방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방유현이 얼굴을 굳힌 채 제갈휘문을 바라보았다.
맹주를 살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잘못하다가는 서로 악감정이 쌓일 수도 있었다.
더욱이 꽤나 탄탄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으니 이유를 알지 못하고는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었다.
하지만 방유현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의뭉스러운 놈 같으니. 좋다. 어찌해 주면 되겠느냐?”
“아직 호법부에 연이 남아 있으시죠?”
“그야…….”
“그들을 이용해 주변만 살펴 주십시오.”
“어렵지 않다만 남궁 맹주가 알면 많이 언짢아할 게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흐흠. 알았다. 내 좀 살펴봐 주도록 하마.”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제갈휘문을 향해 방유현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 * *
하북 석가장(石家莊).
그리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
오랜 과거 ‘중산’이라는 소국의 수도였다고는 하나 세월이 흘러 그저 지방의 작은 현에 불과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후 태행산맥(太行山脈) 동쪽 기슭에 한 세력이 자리를 잡으며 강호에서는 더없이 유명한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사도 연맹, 통칭 사도련.
단숨에 사파를 통일했으며 중원 최강의 무인인 위도혁의 본거지인, 그곳으로 인해 석가장이라는 이름보다는 사도련의 땅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딱. 딱. 딱.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평상 모양의 의자에 턱을 괴고 앉은 반백의 중년인이 손톱으로 팔걸이를 때렸다.
그의 앞에 좌우로 늘어선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다물고 있었다.
반개(半開, 반쯤 열림)한 시선은 부드러우면서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낮게 깔리는 음성이 대기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딱히 화를 낸 것도 아니고 신경질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한마디의 물음뿐이었음에도 모두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할 말을 찾아야 했다.
무황 위도혁.
나이 서른에 사파의 모든 문파를 발아래 꿇리고 중원 최강으로 군림하는 무인이었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지만 오히려 그마저도 멋스러워 보였다.
“구금된 남궁가의 무인들을 구하기 위한 협상단이 무한에서 예물을 싣고 출발했다고 합니다.”
맨 앞에 선 노인 혈수 사마현이 연신 식은땀을 닦아 내며 눈치를 살폈다.
“흐흠.”
그저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는 소리에도 심장이 철렁거렸다.
“남궁가의 아이들에 대한 문제는 누가 처리하고 있나?”
“섬뢰(閃雷)입니다.”
섬뢰는 사도삼위의 한 사람이었다.
“섬뢰라……. 근래 그의 움직임이 많군.”
위도혁의 목소리에 작은 귀찮음이 생겼다.
“어째서였지?”
“남궁가의 영역에서 막야라는 인물이 파천도를 사용했다 합니다. 이를 항의하기 위해서…….”
사마현의 대답에 처음으로 위도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잡아 올까요?”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붉은 적포의 사내가 넌지시 여쭈었다.
만도를 걸치고 매서운 눈을 가진 그는 위도혁을 손발이라 불리는 혈랑의 우두머리 만중이었다.
“되었다. 어쩌면 그 녀석인지도 모르지. 원 녀석도, 이번에는 안휘까지 다녀온 게야?”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끼는 제자가 떠올랐음인지 위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쯧, 그 녀석의 방랑벽은 나라도 고칠 수가 없어. 하필이면 가장 기대를 하고 있는 녀석이 그 모양이라니 말이야. 안 그런가? 만중.”
“속하가 어찌 소련주를 평하겠습니까?”
위도혁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파천도를 전수받은 제자는 혁련휘가 유일했다.
위도혁이 유일하게 마음을 준 다섯 살 꼬마는 마치 흡수하듯이 그의 무공을 빨아들였고 약관의 나이에 사도삼위의 일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도련에서 각기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자들과는 달리 권력욕이라는 것이 없었다.
술, 여인, 무공.
그 세 가지만이 주된 관심사였다.
어찌 보면 한량이었지만 위도혁은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아꼈다.
자신의 친자이자 두 제자인 위웅과 위철에게조차 가르치지 않은 파천도였기에 모두가 그를 다음 대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막나가는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이가 행한 일을 남궁가가 문제를 삼고 있다는 것인가?”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혁련휘가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해도 평소처럼 두둔했을 게 틀림없었다.
위도혁은 과묵했지만 혁련휘의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말이 많아졌다.
그는 파천도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막야’와 혁련휘를 동일 선상에 놓았다.
“남궁가를 지울까요?”
눈치는 없고 충성심만 넘치는 만중이 말을 꺼내 놓자 대전에 모인 이들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정천 오대 무가의 하나이자 다음대의 맹주가 나온 가문이었다.
하지만 위도혁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궁가를 지워 버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정사대전.
어찌 참새와 대붕의 날갯짓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위도혁이 움직이면 오존이 움직일 것이고 그리되면 정사대전은 수순처럼 뻔한 일이었다.
누군가 말려야 했지만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흠, 됐다. 섬뢰가 결정한 일이니 그 녀석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하지만 휘가 돌아오면 주의를 주어야겠군. 주변을 좀 돌아보고 행동하라고 말이야. 다음 대를 준비해야 할 녀석이……. 쯧쯧.”
위도혁의 말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이만하지. 갑자기 그 녀석이 보고 싶군.”
“술을 준비하겠습니다.”
위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도혁이 대전을 빠져나가자 참았던 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파하…….”
터져 나오는 한숨에도 숨 막힐 듯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아니, 그럼 막야라는 자가 혁련 소련주란 말이야?”
“하긴 소련주가 아니면 련주의 무공을 사용할 만한 간 큰 놈이 또 있겠어?”
“정말 미치겠구먼. 왜 자꾸 그러는 건지. 이거 원, 련주님 때문에 한 소리 할 수도 없고.”
“한소리? 목이나 달아나지 않으면 다행이야.”
“자, 조용, 조용.”
사마현이 저마다 투덜거림을 쏟아 내는 사도련의 수뇌들을 안정시켰다.
“일단은 구류하고 있는 남궁가의 무인들이 문제가 아닌가.”
“그야 협상단이 떠났다고 하니 곧 예물을 들고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섬뢰께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겠지요.”
그들의 예상이었다.
반목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만한 일로 항의의 뜻만 전하러 온 사자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사도련에 직접 항의를 하러 왔고 괘씸히 여겨 구금을 했다.
협상단이 적당한 예물을 들고 온다면 받아들이는 선에서 방면하면 될 일이었다.
사도련의 자존심도 지키고 정천맹에서 들고 오는 예물이 적지 않을 테니 그쯤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대전으로 연락을 담당하는 무인이 날 듯이 뛰어왔다.
“어허! 련주의 대전에서 어찌 그리 소란을 떤단 말이냐!”
하지만 무인이 가져온 소식에 그들은 또다시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섬뢰께서 정천의 협상단까지 구금하셨다고 합니다.”
“뭣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무인이 이은 다음 말이 더 가관이었다.
“하오문에서 온 전서인데 막야라는 자는 정천맹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적이라고…….”
사마현이 무인의 손에 들린 전서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이, 이…….”
막야의 행적에 대한 정보가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소련주라고 생각하기에는 말도 되지 않는…….
당가의 피독주를 훔친 막야.
그 당시에 소련주는 사도련에 있었음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이가, 그것도 도적이 파천도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련주가 알게 되면?
당연히 그와 관련해서 사도련의 본전각이자 련주의 처소에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보고(寶庫)에서 만년설삼이 사라졌다.
위도혁이 혁련휘에게 먹이려 구해 놓은 것이었다.
보고를 담당했던 사도련의 수뇌이자 이름난 고수였던 추혼사검 이철승을 비롯해 보고를 경비하던 무인 오십의 모가지가 달아났다.
그 사실이 기억난 것인지 사마현의 옆에 있던 귀령살주 곡반정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어쩌지?”
이미 구출대를 구금했다는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누군가는 이 사실을 보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곡반정과 본전각을 지키는 무인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저어, 아무래도 혈수께서…….”
“어허! 이 사람 그게 무슨 소린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사마현이 생사투라도 불사할 표정으로 화를 내었다.
“당연히!”
사마현이 곡반정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일단은 모른 척들 하게.”
“예?”
“곧 소련주께서 돌아오실 것이네. 그때 보고를 하세. 소련주께서 말리시면 살려는 주실 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