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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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44화
43화. 숨어 있는 자들
보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당가의 괴멸.
소문은 순식간에 중원의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거인의 퇴장은 무림을 들끓게 만들었다.
당가를 옹호하는 오대 무가에서는 강력하게 반발을 했고 정천맹은 죽은 서남 지부장을 대신할 무인과 함께 긴급히 조사단을 꾸려 사천으로 파견했다.
“조사라니!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멸절사태는 조사단으로 파견된 사내를 향해 노성을 지르며 꾸짖었다.
아미와 청성이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운남의 대족장인 모자겸이 진가의 입구를 지키고 서서 흉흉한 기세를 뿌렸다.
결국 사천의 싸움은 두 집안 간의 원한 관계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멸절사태는 당가에 깃들었던 마기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정천맹이 있는 무한으로 출발했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마기의 정체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며 무림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진혼창 진소청이 있었고, 사천의 진가장이 있었다.
서서히 진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림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진각을 거처로 사용하게 된 소강에게 소청이 찾아왔다.
뜻을 정하고 온 길이었던지 검은 피풍의에 방립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후원의 정자에 마주 앉은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형의 얼굴에 무언가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음을 눈치챈 소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떠날 생각이십니까?”
“…….”
마치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이 하는 말에 소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가에서 느낀 이상한 기운 때문입니까?”
“그래. 부인하지 않을게.”
“꼭 형님이 짊어져야 합니까?”
“지금은 나밖에 알지 못하거든.”
소강이 한참이 말이 없었다.
“휴우,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느껴 왔습니다. 아십니까? 어느 순간부터 형님은 제가 아는 형님이 아니었습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죠. 당가에서 천강 형님을 두들겨 팰 때는 정말.”
소강이 미소를 지었다.
“비무 때는 또 어땠고요. 정말 천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습니다.”
“…….”
“형님의 노력으로 우리 진가가 어엿이 무가로서 이름을 내밀게 되었지요. 이제는 사람들이 간양 진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다들 사천 진가라고 부르고 있지요.”
“들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덕에 저도 이젠 백대 고수를 바라보는 무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
“아버님께서는 예전부터 형님이 갑자기 강해진 이유를 궁금해하셨습니다.”
“…….”
“너무 급작스러웠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형님 편입니다. 형님이 어떻게 변하든 어느 곳에 있든.”
“소강…….”
“가십시오. 형님. 진가에는 제가 남겠습니다. 가서 마음껏 무림을 활개 치며 다니세요.”
소강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점점 짙어져 갔다.
“하지만 이곳이 집이라는 것만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형님의 동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
여느 때처럼 떼를 쓰고 매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강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녀석.’
소청이 소강의 머리를 흩어 놓았다.
‘아이 정말! 머리 좀!’이라며 짜증을 내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눈에 습막이 차오르고 있었다.
웃고 있는 소강의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자라고 자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소청은 알지 못했지만 그 마음이 걱정이라는 것은 느껴졌다.
장난을 쳐서 이별을 즐겁게 만들어 보고자 했던 소청은 손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너에게 힘든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로 인해 진가가 피해를 볼지도 몰라.”
“상관없습니다. 헤쳐 나가겠습니다.”
“그래, 잘해 나가리라 믿는다.”
소청이 방립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강은 돌아 걸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지 않겠노라 다짐했고 돌아온 자리에 더욱 강성해진 진가를 만들겠노라고 다짐했다.
진가를 벗어난 소청은 멀리 산자락에 앉아 간양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치우는 이들이 보였다.
당가로 인해 자주 보았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이제 세상에 남지 않게 되었다.
‘폭마…….’
소청은 폭마 척세경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남궁무한으로 위장했던 세작은 자신을 환영 십삼위라 불렀고 폭마는 그를 환마의 종자라고 불렀다.
‘환마, 그리고 환영 십삼위. 그래 마천에는 분명 그런 이들이 있었지. 마천 삼 공자를 따르는 열두 명의 무인들.’
폭마는 그들 중에 없었다.
하지만 열두 명의 절대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정사 연합과 마천의 대결을 멀리서 바라봐 온 자신이었다.
마천의 세 후계자들은 각기 네 명의 절대자들과 함께 무림을 정벌했다.
마치 서로 더 높은 공적을 쌓으려는 듯이.
내분이 아니었다면 정사 연합군은 그들을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오 년 동안 무림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계략을 꾸미지 않았다. 계략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힘을 가졌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무림 곳곳에 암약하고 있다. 당가 역시 결국은 그들에게 이용당한 게 틀림없다.’
소청은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종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환마, 그의 흔적부터 쫓는다.’
찾기로 마음먹은 이상 찾는다.
“흑비.”
소청의 나지막한 부름에 아직 돌아가지 않은 흑비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돌아가서 제갈휘문에게 전해라. 그림자들의 수장 자리를 수락하겠다고.”
“…….”
“이제부터 나는 묵영단의 단주인 패월(覇月)이다.”
* * *
호북성 무한(武漢) 인근.
자욱하게 새벽 운무가 깔린 동혈 안, 의자에 앉은 붉은 장포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 사내의 뒤로 다섯 명의 인물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진행은?”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진득하게 뿜어지는 위압감만큼이나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오대 무가와 제갈가를 제외한 강남 칠패들에 대한 작업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추적자들이 붙는 바람에 둘을 잃었습니다.”
강남 칠패는 오대 무가에 오르지 못한 서문, 주가, 언가, 유가, 하후, 모용, 제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제갈휘문인가?”
“예. 세주(勢主).”
“제법이군. 결국 우리의 기척을 눈치채었음이라는 것이겠지.”
“예. 하지만 추적자들은 모조리 죽였습니다.”
“문을 닫는다 한들 찬 바람이 이미 방 안을 채웠음이다. 좀 더 주의를 기울여라.”
“새기겠습니다.”
세주라 불린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구파는?”
“모산, 천산, 종남. 세 곳은 확보 하였습니다. 점창, 곤륜, 공동은 작업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진마에서 깨어난 검존으로 인해 화산을 포함하여 소림, 무당, 아미, 청성은 접근이 어렵습니다. 우리와는 원체 상극인 도가와 불가가 주류인지라…….”
“상관없다. 이로써 정천맹 예하의 세력을 제갈휘문과 양분하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현재 중립을 지키고 있는 해남만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면 구파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해남이라…….”
중년 사내가 턱을 쓸었다.
“환영 십위.”
“예. 세주!”
“해남은 네가 맡도록.”
“존명!”
이름이 불린 수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구파와 무가들에 대한 일은 그것으로 족하다. 환영들에게 전하라. 새로운 명이 내려질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이제부터는 사도련에 집중한다.”
“존명!”
수하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주!”
“말하라.”
허락이 떨어지자 수하들 중 말없이 듣고 있던 청포의 중년인이 입을 떼었다.
“사도련에 항의하기 위해 보낸 아이들이 위도혁에게 잡혔습니다.”
“좋군. 위도혁이 긴 잠을 깨고 나서 준다면 좋겠군.”
“이미 지시하신 대로 사도련의 간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천맹에서 교섭인단을 보내는 즉시 분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좋아. 정사대전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어.”
적포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포인은 기회를 얻은 것처럼 한마디를 더 얹었다.
“저, 당가가 괴멸 이후 봉문을 했으니 오대 무가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
“진가를 추대한 뒤 포섭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
“물론 아직 그 세가 다른 곳에 비해 미미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진소청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진소청이라는 아이가 제법 쓸 만하다 하니 이 기회에…….”
적포의 중년인이 말을 꺼낸 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찌?”
스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움켜쥐는 듯 오므리자 청포의 중년인이 갑자기 숨이 막힌 듯 고통스럽게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커어억.”
“내가 너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던가?”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이 동굴 안을 짓눌렀다.
산중의 범처럼, 존귀한 자들만이 타고나는 기운은 흉내 내길 좋아하는 원숭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요, 용서를…….”
털썩.
나동그라진 청포인이 숨을 헐떡이는데 적포 중년인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고작 너 따위가 나와 대등하게 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것에 대답하고 시키는 일에만 움직여라.”
“조, 존명…….”
고통스럽게 기침을 내뱉으며 대답하는 그를 바라보던 적포 중년인의 머릿속에 진소청이 그려졌다.
진마에 빠진 검존을 깨어나게 했다는 진소청.
역천의 진언으로 힘을 얻었다 해도 당태위의 힘은 오존에 근접할 정도였다.
그런 당태위를 진소청이 죽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소청. 제법이군. 독마가 꽤나 언짢겠어. 하지만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지.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 방해를 하다니…….’
적포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건은 잠시 보류한다. 그에 대한 파악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접근하지 않도록. 지금의 상황이라면 굳이 내가 나서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신경 쓰지 않아도 오대 세가에 추대될 테니까. 그보다…….”
적포 중년인의 머릿속에는 진소청이라는 존재보다 남궁가의 영역에 나타나 폭마를 죽인 막야가 더 신경 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막야의 존재는 일종의 ‘어그러짐’이었다.
전혀 생뚱맞은 존재가 나타났다.
아무리 자신들보다 한참 못 미치는 힘을 가졌다고 해도 한 세력의 주인이었다.
정천 오존, 사도 삼위 정도의 무인이 아니라면 그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욱이 폭멸마동 한기의 폭발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지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치 몸이 여러 개나 되는 듯이 중원 곳곳에서 그 행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분명 누군가 그의 행적을 조작하고 있음이었다.
제갈휘문인가?
아니다.
제갈휘문이 운용하는 흑선이 움직였다면 자신의 눈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면 사도련?
느낌상으로는 제갈휘문인 듯한데 그가 사용했다는 파천도의 무공 때문인지 사도련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환영 일위.”
“예. 세주!”
“막야라는 인물을 뒤쫓아라. 사파를 뒤지건 정천을 뒤지건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그를 찾아내라.”
“존명!”
“가거라. 하나, 잊지 말라. 우리의 목적은 혼란이다.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이름과 모습을 감추고 저들의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짧은 대답과 함께 부복했던 인물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