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37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37화
36화. 폭멸마동(爆滅魔童)
“그게, 곽……추…….”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전형적인 사내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소청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저 또 한 명의 제자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인이라니.
더욱이 찰랑거리는 흑발에 사슴 뺨 때릴 정도로 촉촉한 눈망울, 윤기 나는 피부까지 이제껏 본 여인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그녀에게 곽추라는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름이 이상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그런 표정은 이제 그만 짓는 게…….”
그저 이름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흑비가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아니라…….”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소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이곳은?”
흑비는 토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옥.”
소청은 존대를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짧게 끊어 말했다.
그녀가 일보월하의 주인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불편했다.
“남궁가 아래 토굴 감옥이라니…….”
흑비는 토굴의 이곳저곳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러다.
“이건? 머리카락?”
토굴의 안에 살점이 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피가 말라붙은 몽둥이가 여럿 있었고 벽이며 바닥에 그 흔적이 잔뜩 남겨져 있었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잡아 가두었던 곳……이다.”
소청은 어색하게 반말을 했다.
존대를 할까 생각했지만 이제까지 해 온 것도 있고 어차피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성이 없다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허락한 적은 없지만 수장이 아닌가.
“어린…….”
흑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바닥에 길게 끌린 듯한 자국, 이곳저곳에 떨어진 머리카락들, 벽면과 몽둥이에 남은 핏자국.
“…….”
말이 이어져 나오지 않았다.
명문.
정파.
대 남궁세가.
그들이 가진 이름이었다.
정협의 대명사였고 앞으로 의와 협을 위해 모인 정천맹을 이끌어 가야 할 곳이었다.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흑비는 오히려 더욱 냉정한 표정이 되었다.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
“그렇게 훈련받았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소청은 피식 웃었다.
‘뒈질 뻔한 주제에.’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애써 냉정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한 척하지만 외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문득 묵영단이라는 곳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이들일까?
무엇을 위해 그림자가 되었을까?
소청이 생각에 빠진 동안 흔적들을 살피던 흑비가 말했다.
“뒤를 쫓아야겠군요.”
“글쎄. 흔적이 남아 있을까?”
“그래도 무언가 남았을 겁니다.”
“아니, 없을 거야. 남궁천세가 맹주위에 오르게 될 텐데 오점을 남기는 그런 어리숙함을 범하지는 않았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개자식들. 정? 협? 의? 웃기는 소리. 그저 가식이고 포장일 뿐이지. 제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아녀자건 가리지 않고 도구로 쓰는군.”
“일단 노예 시장 쪽부터 뒤져 보겠습니다.”
“노예 시장?”
“예.”
소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잖아. 노예로 팔려면 굳이 이런 토굴까지 만들 필요가 없지.”
“그럼?”
“무언가 이용하려 했을 거야. 분명 아이들을 이용해서.”
‘어린아이, 마천, 남궁세가……. 분명 어떤 연관성이.’
순간 소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었고, 자신이 보았던 처참하기 짝이 없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이런 개자식들이! 또!”
“…….”
갑자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흑비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봐. 넌 돌아가라. 토굴의 끝이 몽환경구(夢幻景區)와 연결되어 있더군.”
“아니 어째서?”
갑작스러운 그의 결정에 흑비가 되물었지만 소청은 답해 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시했다.
“돌아가서 제갈휘문에게 전해라.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가 납치된 곳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인근 무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놈들이 누구인지.”
“…….”
“그들이 마천의 주구다.”
“뭐?”
흑비는 소청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와 마천.
상관관계를 맺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청의 얼굴에는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확신과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조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어떤 놈인지 면상을 좀 봐야겠다. 그리고 마천에 관련된 놈들이 몇몇인지 아니면 남궁세가 전체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부딪칠 생각 같았다.
지금의 남궁세가와 마찰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미 막야라는 이름으로 인해 잔뜩 독이 올라 있었고 아무리 최고수들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무인의 수가 물경 천을 헤아렸다.
“안 됩니다. 잘못하면…….”
“시끄러. 네 걱정이나 해. 난 네 생각보다 무모하지 않아. 대의명분 따위에 목숨을 걸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거든.”
“…….”
“가. 또 다른 아이들이 잡혀가지 않게 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흑비가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부디…… 조심하시길.”
뒷말을 흐린 흑비는 쏜살같이 토굴 밖으로 달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청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흑비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토굴 감옥을 보는 순간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생의 기억 속 어린 시절, 동년배의 아이들과 흑웅패에게 유괴되어 착취당하고 괴롭힘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토굴에 있던 아이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으리라.
‘망할, 또다시 폭멸마동(爆滅魔童)를 만들 생각이겠지. 그 저주받은…….’
마천의 잔인함에 치가 떨려 왔다.
소청은 기존에 흑비와 자신이 남긴 흔적을 지웠다.
토굴을 아는 누군가 쉽게 눈치챌 수 있게 발자국을 만들고, 흑비의 몸에서 빼낸 비침을 잘 보이는 곳에 던져 놓았다.
‘어떤 개자식이 그따위 짓에 동조했는지 그 낯짝 한번 보자.’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온 그는 남궁세가의 가주전으로 돌아와 모습을 감추었다.
* * *
“이, 이게?”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이 되도록 막야를 뒤쫓았지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 남궁천린은 난리가 난 세가의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선각주.”
“가모님.”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다가온 세가의 안주인 금성희의 모습에 남궁천린이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안휘 도지휘사사의 여식으로 큰 부인이 죽은 후 가모가 되었고 남궁가의 소가주인 진수와 그 동생들인 진하, 진린의 어머니였다.
장군부의 여식답게 성격이 호탕한 무골이었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평소 부르는 호칭인 ‘작은서방님’이 아닌 그의 직책인 평선각주라고 불렀다는 것은 질책의 뜻이 담겨 있음이었다.
“세가에 이 난리가 나도록 뭐 하고 계셨습니까?”
“그게…….”
“도적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남궁가에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가주께서 자리를 비우고 안 계신 지금 가문을 책임져야 할 분이 고작 사파의 잡졸을 쫓으러 다니느라 세가를 비우시다니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 도둑이 규방까지 모조리 털어 갔습니다. 아버님께서 하사받은 벽옥취까지 없어진 것은 둘째 치고, 여인들의 잠자리에 생면부지의 사내가 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녀의 아비는 반정 공신이자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정이품 군후 금마강 대장군이었다.
그녀는 규방을 턴 것에 화를 내었지만 실제로 금마강이 직접 내린 벽옥취가 더 문제였다.
재물의 값어치가 아니라 남궁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추후 장군부의 질책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리 무림에서 쟁쟁한 위명을 가진 세가라 해도 오만 정병을 거느린 장군부의 위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반정 공신이라면야…….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지금 제가 죄송이라는 말을 듣자고 각주를 찾아온 것 같습니까?”
위엄이 서린 그녀의 목소리에 한기가 풀풀 날렸고 남궁천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잡아들이세요. 내 인근 정천호들에게 연통을 보내 두었습니다. 그들과 최대한 협조해서 그 도둑놈을 산 채로 잡아오세요. 내 직접 사지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 놓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금성희가 거친 콧바람을 내뿜으며 처소로 몸을 돌렸다.
“쯧, 쓸모없는 자 같으니…….”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그녀의 비아냥에 남궁천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궁천린은 야차 같은 얼굴로 일어났다.
“소가주!”
“예, 숙부님!”
“지금 즉시 세가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안정책을 강구하시오!”
“예!”
“무한은 관병들과 함께 도적의 행적을 살펴라. 진린은 즉시 가주께 세가의 상황을 보고하고 창궁검수 이백과 함께 사도련에 정식 항의하라!”
“예. 숙부님.”
명이 떨어지고 소가주 남궁진수와 진린이 바삐 움직였다.
“숙부, 가주님께 꼭 이 상황을 보고해야겠습니까? 자칫하다가는 전 무림에 소문이 나서 가문의 위신이 깎일까 두렵습니다.”
“그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가모님께서 저리 화가 나셨는데 가만히 있겠느냐? 차라리 먼저 매를 맞는 것이 낫다.”
“흠…… 알겠습니다.”
남궁무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남궁세가는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은 막야를 뒤쫓았고 한쪽은 도적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황산 인근을 모조리 들쑤시고 다녔다.
일꾼들뿐 아니라 가문의 식솔들까지 죄다 불려 나와 조사를 받았고 수백여 명의 관병들이 세가를 돌아다녀 전례 없이 시끄러워졌다.
* * *
그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각.
낮 동안의 조사로 지친 남궁세가가 고요하게 잠들었을 때, 한 인물이 가주전으로 찾아왔다.
“충!”
“고생한다. 조사해 볼 것이 있으니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
“알겠습니다.”
무인들의 짧은 인사에 사내는 가주전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잠시 밖의 동정을 살피던 그는 곧장 벽면의 조각상으로 향했다.
‘독이…….’
그는 조각상에 설치된 기관이 해제되었고 내부에 뿜어지게 만들어졌던 독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젠장, 이곳저곳을 어지르고 물건을 훔친 것은 결국 도적으로 보이기 위함이었군. 결국 무언가 안다는 말이겠지. 어떤 놈일까? 막야라는 놈? 아니면 우리의 뒤를 쫓고 있다는 제갈휘문의 수족?’
그는 익숙한 손길로 조각상을 눌렀다.
그그긍.
바닥에 입구가 드러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달려 내려가자 활짝 열린 문이 나왔고 사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닥에는 비침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젠장, 보통 놈이 아니었군. 백대 고수조차 고슴도치가 될 것이라던 충폭(衝爆) 장치를 뚫다니.”
그는 홰를 든 채 문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침?”
몇 발 가지 않아 그의 눈에 다른 것들과 달리 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비침을 발견했다.
“이놈, 당했구나! 다 피하지 못했어. 만독불침이 아닌 이상 살아날 수 없었을 터.”
그는 바닥에 난 발자국을 살피며 토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시체가 없다. 들어온 것은 둘, 나간 놈의 발자국은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동료를 업고 갔구나. 젠장, 도적이 든 것이 지난밤이니 하루가 지났다. 뒤쫓기는 늦었을 터, 알려야 한다. 서둘러 흔적을 지워야 해!”
사내는 재빨리 남궁가의 반대편 입구인 몽환경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경공을 발휘해 황산의 대협곡 몽환경구의 절벽을 날 듯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곧장 남하했다.
밤사이 백 리 길을 내리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절강성 천목산(天目山) 자락에 위치한 작은 초옥이었다.
그는 초옥에 도착하자마자 품에서 손가락만 한 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소.
특수한 훈련을 받은 자만이 들을 수 있다는 무음소의 소리에 한 떼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중 칠 척 반 가까이 되는 거한이 언짢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피처럼 붉은 피풍의로 몸을 가린 그의 얼굴은 시체의 그것처럼 잿빛을 띠고 있었고, 눈동자는 화마의 불꽃처럼 새빨갰다.
“환영곡의 십삼 위가 폭마를 뵙습니다.”
그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지? 아직 약속한 기일이 되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구금했던 토굴에 누군가 침입했습니다. 서둘러 꼬리를 잘라야 합니다.”
“침입자라. 멍청한 환마.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다니…….”
냉소 어린 질책에 십삼 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 십삼 위? 환영곡? 폭마?”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