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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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5화
74화. 전쟁 그 후……
회룡협의 전투가 끝난 이후.
정천맹은 전례 없이 바쁜 변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태존의 물음에 제갈휘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기로 인해 불안 증세를 보이던 검존은 태극동으로 돌아갔고, 신승은 백팔나한과 함께 종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났다.
제갈휘문과 구파의 수장들은 태존을 임시 맹주로 추대하는 것에 적극 동의했다.
“변절한 가문에 관련한 문제 말일세.”
“…….”
쉽게 말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내전으로 인한 피해 복구의 문제, 정천의 세력 개편, 마천의 잔당 숙청과 같은 수많은 난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다행히 제갈세가의 지재들이 정천맹에 대거 몰려와 청초각을 채워 하나씩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결론을 내려놓지 못했다.
개방, 오대 무가. 그리고 강남 칠패, 곤륜, 해남, 종남의 변절.
구파에 대한 문제는 신승이 해결하겠다며 떠났지만 회룡협의 전투에 참가했던 무가와 개방의 수뇌는 뇌옥에 갇혀 있었다.
숙청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천맹의 절반이나 되는 세력이다.
그들을 내치기에는 정천이 너무 약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게 처결권을 주시겠습니까?”
“처결권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네만. 민감한 문제일세.”
“압니다. 버리기 힘든 전력이지요.”
“어찌하려고?”
태존은 제갈휘문에게 무언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결권 운운했으니 심중에 결론을 내려놓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고자 함입니다.”
“…….”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은 제갈휘문은 경악하는 태존의 표정을 뒤로하고 맹주령을 받아 뇌옥으로 향했다.
똑, 똑, 똑.
습기가 천장에 모여 떨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정천맹 무간동(無間洞).
지옥의 가장 아래층이라는 이름처럼 정천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를 지은 이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일백이나 되는 독방은 처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옥 안의 죄인들은 모두가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인지 눈에는 정기가 넘치고 허리가 꼿꼿했다.
드르르르르.
옥장들이 드나드는 도르래 기관이 거친 쇠사슬 소리를 내자 뇌옥에 갇힌 이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털컹.
저벅, 저벅, 저벅.
한둘이 아니었다.
홰의 일렁거림에 커진 그림자들이 뇌옥을 가득히 채웠다.
철컹.
손바닥만 한 창 하나가 뚫린 한 뼘 두께의 철문이 열렸다.
송문고검에 청의도포를 입은 무당파의 검수가 데리고 나온 것은 팽 가주 팽사독이었다.
끌려 나온 그는 무릎을 꿇고 제 앞에 돌아 서 있는 학창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제갈휘문…….”
그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깔렸다.
함께하면 구파를 밀어내고 정천의 주인이 되게 해 주겠다던 방유현의 말을 믿었다.
가장 먼저 동조했던 남궁천세가 오존에 오르고 차기 맹주에 내정되었을 때 서슴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옳지 않은 길임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가문이 원하듯 자신의 대에, 아니면 후대에 중원 제일가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후에 방유현이 마도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깊숙이 발을 들이밀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빠져나오기가 싫었다.
탐욕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철컹.
뇌옥의 문들이 차례로 열리며 무가의 주인들이 하나씩 끌려 나와 제갈휘문의 앞에 무릎이 꿇렸다.
차갑게 돌아선 제갈휘문은 맨 먼저 개방의 대장로 오두개에게 다가갔다.
“개방을 믿었습니다. 한데 어찌 그들에게 협조하셨습니까?”
나지막한 물음에 오두개가 담담히 올려다보았다.
“왜일 것 같더냐?”
“…….”
“너는 지금도 나를 내려다보는구나.”
“…….”
“개방은 언제나 그러했다. 구파의 이름에 들지 못하고 항상 일방이라 불렸지.”
자조 섞인 웃음으로 말을 이어 간 오두개의 눈에 핏발이 돋아 올랐다.
“왜? 거지라서? 비루하게 살아와서? 너희보다 모자라서?”
“…….”
“그래. 바꾸고 싶었다. 개방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받아 온 모멸감을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인정해 주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방 맹주가 손을 내밀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잡았던 것이지.”
“그렇군요.”
제갈휘문은 담담히 오두개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스걱.
송문고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그의 목을 잘랐다.
툭. 데구르르…….
오두개의 머리가 뇌옥 바닥을 굴렀다.
뜨거운 핏물이 분수처럼 쏘아졌다가 울컥거리며 흘러 바닥을 적셨다.
“대장로!”
“이런 잔인한 놈아!”
뇌옥에 갇힌 개방의 무인들이 철문을 두들기고 긁어 대며 울부짖었다.
제갈휘문이 고개를 끄덕여 눈짓을 주자 무당의 검수들이 개방의 장로들이 갇혀 있는 뇌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분노와 울분이 사라지는 데는 특별하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했다.
무가의 무인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제갈휘문을 바라보았다.
“용서할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유를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개방은 정천의 정보를 저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정천은 십 년 동안 저들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낮고 느린 그의 음성은 짙은 살기보다 더욱 소름이 돋아 오르게 했다.
“나머지는 그저 협조만 했을 뿐이지요. 물론 폭멸마동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유괴하고, 동도를 향해 칼을 들이댄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정천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
“하지만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제갈휘문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도를 걸었으니 무림의 공적이다.
가문이 멸문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중원의 한 축과 같은 오대 무가를 쉽게 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대의 역사 동안 정천을 지탱해 온 개방이 버려졌다.
희망이 짓밟혔다.
그런 그가 자신들에게 ‘기회’라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앞으로 정천의 무가들은 마도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가 없을 겁니다.”
“…….”
“지금까지 마천에 동조했던 당신 수뇌들의 모든 악행이 중원 무림에 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후대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고통받을 것입니다. 하나 당신들의 후인들은 그 오명에 살지 않도록 해 드리지요.”
“그 방법이, 무엇인가?”
팽 가주가 끈이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으로 물었다.
“격체전이.”
“…….”
제갈휘문의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격체전이.
자신의 내공을 타인에게 전해 주는 것.
한 세대가 가진 힘을 오롯이 전해 주는 방법이다.
뛰어난 무인을 기를 수 있었다.
그렇게 최강의 이름에 오른 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을 수 있다.
시전자도 받아들이는 자도.
가능성이라고는 일 할도 되지 않는다.
또한 성공한다 해도 시전자는 내공을 잃게 된다.
무인이 무공을 잃는다는 것은 스스로 폐인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또한 다른 의미의 죽음이었다.
“거부하면 어찌 되는가?”
“의견을 나누러 온 것 같습니까?”
제갈휘문의 시선을 따라 모두가 오두개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죽음과 격체전이.
두 가지 선택권뿐이었다.
“열흘 드리겠습니다. 열흘 후 결정을 내리지 않은 문파의 미래는 상상에 맡기지요.”
죽음을 들고 왔음에도 너무도 차분했다.
“어느 선택이든 목숨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무가가 최강의 무인을 배출해 마천과의 결전에서 선봉에 선다면 후대는 오명을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제갈휘문은 차갑게 돌아섰다.
“오대 무가의 힘이 필요하지 않은 겐가? 저들의 힘을 구파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어!”
황보숭의 외침에 제갈휘문이 조소를 지었다.
“압니다. 명가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제가 그에 대한 대비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뭐?”
“무가는 키워 내면 그만입니다. 이미 신승, 검존, 태존께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중원 상계의 거두들을 맹으로 소환했습니다.”
“…….”
“하면 어찌 될까요? 진가와 같은 가문이 또 생기지 않겠습니까? 굳이 제가 오대 무가를 지켜야 할까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가가 돈을 대고 구파에서 무공을 가르친다.
이미 시대의 흐름은 변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시대의 흐름에 문파를 변화시키고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목숨을 버려야 했다.
“하면…….”
제갈휘문은 싸늘하게 웃으며 뇌옥을 나갔다.
덜컥. 드르르르.
쇠사슬이 말리는 소리가 들리고 뇌옥은 침묵에 휩싸였다.
* * *
“팽가가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
“나머지 세가들도 곧 돌아갈 모양인 듯했습니다.”
초사의 보고에 의원에게 진맥을 받고 있던 소청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사에 의해 진가 표국의 무한 분점으로 돌아온 소청은 연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정천맹이 보유한 약단의 의원들이 수시로 표국을 드나든 덕분에 소청은 완전한 회복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쾌차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모조리 쏟아부은 내공의 회복이었다.
치료를 마친 의원이 밖으로 나가자 초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대 무가의 힘을 무시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갈휘문이? 그럴 리야 없겠지. 아마도 거절치 못할 제안을 했겠지.”
“예?”
초사가 되물었지만 소청은 피식 웃기만 했다.
‘격체전이를 한 무인들.’
선택지는 없었다.
마천 정벌 당시 사도련의 무인만이 싸웠던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지략이 뛰어났다고 해도 정천은 사도련에 먹혀 버렸으리라.
마천에 의해 안휘, 절강, 강소의 저항선까지 밀려났던 제갈휘문과 정천맹의 수장들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양보다는 질을 선택했다.
각 파의 장로들이 희생되었고 열두 명의 기재들이 선택되었다.
당시 상황이 풍전등화와 같아 지금과는 입장이 달랐다.
각 파는 의문조차 품지 않고 그 마지막 방법에 희망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천 오존과 함께 끈질기게 항전했다.
정천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정사 연합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개방을 버렸다는 것인데…….’
그것만은 소청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방을 버린다는 것은 정보력의 상실을 의미했다.
묵영단이 십만에 달하는 개방 방도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아무 생각 없이 그리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소청이 고심하는 사이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소청! 소청 게 있는가!”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소청은 방문을 벌컥 열고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오랜만이군. 수고했네.”
소청이 반갑게 그를 끌어안았다.
진가를 지키기 위해 사천으로 떠났던 혁련휘가 돌아온 것이었다.
“헉, 이 친구 왜 이래?”
보자마자 부둥켜안는 소청의 모습에 혁련휘가 질색을 하듯이 밀어내었다.
“처음에 말했지만 사내 취향은 아니라니까.”
“…….”
분명 자신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받았을 터인데 오히려 장난스럽게 말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뒤늦게 보고를 받았지만 소강 역시 무사히 돌아갔다고 했다.
“좋은 분이더구먼. 어머님이나 아버님이나.”
혁련휘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었다.
“고맙네.”
진심이었다.
혁련휘와 같은 친구를 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소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련휘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사례를 하게.”
“뭐?”
“생각보다 자네 집 부자더구먼.”
“…….”
“난 또 간양이라길래 그냥 시골 무관 정도라고 생각했더니. 이건 뭐, 무관에 표국에 어마 무시한 부자더군.”
사도련에 비하자면 어느 곳이든 시골 무관 같지 않을까.
그저 그의 넉살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이 싫지 않았다.
“알겠네. 사례하지. 뭐가 필요한가? 내 뭐든 구해 주겠네.”
“응? 뭔 소리야?”
“뭐?”
“내가 말했잖아. 헤어질 때.”
“아!”
기억났다.
“먼 길 오느라 목도 칼칼하고 진가에서는 체면이 있어서 여인도 못 만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안 그래?”
소청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핫핫!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