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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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1화
70화. 역천의 주인
어째서 그가 나타난단 말인가?
방유현, 아니 환마는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싱긋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환마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와 자신의 앞에 앉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이 온몸을 짓눌러 왔다.
“화, 환마 송천백이 대공을 뵙습니다.”
환마가 당황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많이 상했군.”
“…….”
무미건조한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질책이 환마를 옥죄어 왔다.
눈앞에 있는 서른 남짓의 사내.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얼굴에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대기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천(魔天).
그리고 천주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오랫동안 나누어 가졌던 마천의 열두 개 가문.
그리고 정천맹의 오존과 자웅을 겨룰 만한 힘을 가졌던 열두 명의 수장들.
그때까지만 해도 마천 십이세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심어 줄 사람은 없었다.
마천의 수장인 천주가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세력이 없었다.
하지만 마천의 분위기가 변화된 것은 세 명의 제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종(魔宗).
마천주를 죽인 그는 순식간에 두 명의 사형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그저 비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마천의 모든 가문을 꿇리고 십이세의 주인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
대공 구자겸.
마종의 첫째 사형이자 역천의 주인.
비록 그 근원을 인간의 가장 잔인한 본성에서 찾긴 했지만 마천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마기(魔氣) 역시 무의 한 갈래였다.
역천의 진언은 그 마기를 비정상적으로 증폭시켜 내공을 부풀려 주는 역할을 했다.
체내에 쌓이는 원한과 독기를 일시적으로 마기로 바꾸어 몸 안의 기운을 증폭시키고 흡정을 통해 상대의 힘을 빼앗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힘이기에 몸이 버틸 수가 없었다.
역천의 진언을 사용한 자는 그 힘에 취해 마기에 먹혀 버리게 되었다.
방유현은 남궁천세의 마기를 흡수했기에 원래의 배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몸 안에 남겨진 힘을 버리고 원래의 내공을 회복해야 했다.
버리지 않으면 그 힘에 먹혀 괴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가 나타났다. 마천에 있어야 할 그가…….
“대, 대공께서 어쩐 일로…….”
“마종께서 아직 출관하지 않으시어 유람이나 할까 해서 나왔네.”
유람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마천의 나머지 주인들도 현재의 상황을 알고 있을 터인데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대, 대공, 제가 모든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사실은…….”
“…….”
급히 변명을 해 보려던 환마는 구자겸이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을 닫아야 했다.
무덤덤한 눈빛 속에 감추어진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미 역천의 힘을 체내로 배출하지 못한 방유현은 그의 힘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온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환마, 송천백.”
“대, 대공.”
천천히 일어난 구자겸은 환마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변명을 할 필요는 없다.”
“…….”
“마종께서 너희에게 맡긴 명이다.”
구자겸의 손이 마종의 머리에 올려졌다.
“하나, 너는 두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
“첫째, 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갈휘문을 죽여야 했다.”
“그, 그건…….”
“둘째, 네게 복종의 의미는 이미 퇴색되었다.”
“아닙니다. 대공! 제가 어찌…….”
“십 년이나 되는 세월이 너를 이리 만든 것이겠지. 왜? 안락함이 좋았더냐? 모두가 너를 떠받들어 주니 뭐라도 된 듯싶더냐?”
“…….”
긴장감이 극도로 치달았다.
“정천의 세력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마종께서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 무황 위도혁뿐이다. 무림에 나오고 나서 겪은 첫 패배가 그분을 담금질하고 있다. 보다 완벽하게 중원을 짓누르기 위해서…….”
“대, 대공, 구파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의 무림을 만든…….”
“환마.”
“…….”
“뭉치지 않은 그들이었다. 구심점이 없으면 뭉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구심점이 될 제갈휘문을 죽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잔마와 네놈이 모든 것을 뒤틀어 놓았다.”
“…….”
“흉수를 가장해 제갈휘문 하나만을 죽였으면 끝났을 일을 이리도 어렵게 만들어 놓았구나.”
“그들에게는 신승, 태존, 검존, 검후가 있습니다. 그들이 힘을 합치기라도 하면…….”
“닥쳐라!”
구자겸의 짜증에 진법이 만든 환영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마종께서 절대 관여하지 말라 하셨기에 십 년 동안 지켜만 보았다.”
“대, 대공…….”
“그런데 네놈들이 쓸모없는 음모 따위를 꾸미면서 저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구나. 이제는 제갈휘문을 죽이기도 힘들게…….”
“…….”
구자겸의 힘이 환마를 점점 더 옥죄고 있었다.
자신이 십 년간 해 온 모든 일이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그저 정천을 분열시켜 그들의 힘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어그러짐의 원인인 진소청을 죽이고자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천이 끈끈하게 뭉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대공의 생각이 그렇다면 마천의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것이다.
대공은 어차피 한발 물러선 존재.
하지만 마종이 가장 신뢰하는 존재.
죽여야 했다.
대공이 마천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무조건 버려진다.
다른 세주들이 자신을 옹호해 줄 리 없었다.
오히려 던져진 먹잇감을 서로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었다.
이렇게 버려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지난 십 년간 자신이 얼마나 마천을 위해 충성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대공을 죽이고 숨어야 했다.
환영곡과 함께 도망쳐 마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런데.
무저갱과 같은 검은 눈빛이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큭큭큭, 가상하구나. 그리고 가소롭구나.”
“…….”
“나를 상대로 살인멸구라도 해 볼 참이냐?”
구자겸은 이미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마저 알고 있었다.
“좋다. 기회를 주마. 버려지기 전에 마지막까지 마천에 충성할 기회를…….”
츠츠츠츠.
구자겸의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품고 있는 어둠의 괴물이 환마를 집어삼켰다.
“끄으으으…… 아, 안…… 돼.”
구자겸의 손을 통해 전해진 기운이 그의 뇌를 헤집었다.
지렁이처럼 굵은 힘줄이 그의 온몸에 툭툭 불거져 올랐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트드득.
뼈마디가 탈골되고 기괴하게 몸이 꺾였다.
구자겸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몸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일어나라.”
“…….”
손을 뗀 구자겸의 목소리에 환마가 몸을 세웠다.
“네가 할 일은 제갈휘문을 죽이는 것이다.”
“제갈휘문을…… 죽인다.”
언령에 지배당한 것처럼 환마는 구자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가거라.”
“…….”
환마의 고개가 화산이 있는 방향을 향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크아아악!”
그리고 마기의 꼬리를 만들며 폭발하듯이 쏘아져 나갔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자겸이 싸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진소청이라는 녀석을 한번 보아 둘까?”
* * *
구자겸이 떠난 뒤.
환마의 흔적을 따라 뒤쫓아 온 태존과 비마대가 도착했다.
“여기서 끊어졌습니다.”
“음…….”
핏자국, 그가 움직이며 만들어 놓은 흔적이 사라졌다.
마치 증발해 버린 것처럼 주위를 뒤져 보아도 더 이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흔적을 찾기 위해 앞쪽으로 나아갔던 비마대의 무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환영진이군요.”
“흐흠.”
“한데 너무 복잡합니다. 뚫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음…….”
은수의 말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흔적을 뒤쫓다 만난 환영진.
“놈이 이 안에 있다는 말이겠군.”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범위는 삼백 장. 이런 경우 안쪽에 무엇을 숨길 목적이지요. 그것이 물건이든 본인 자신이든.”
“그래. 하면.”
청명은 송문고검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어찌?”
“허허, 진법이라면 응당 축이 존재할 게야. 뚫을 수 없다면 부숴 버리면 될 일이지.”
“하나 내력을 아끼셔야 합니다. 혹 저자가 내력을 회복했다면……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태존 어르신뿐입니다.”
“헛헛, 자네는 신승의 금강장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예?”
“신승의 금강장은 말일세. 파사현정의 힘을 담고 있다네. 마기와는 상극. 금강장을 맞은 그가 내력을 회복할 수는 없네!”
우우웅!
송문고검에 백색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청명의 손에 쥐여 지면에 틀어박혔다.
드드득!
투두두둑! 콰아앙!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간 흔적이 대지를 폭발시켰다.
일 검에 지형 자체가 바뀌고 내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먼저 들어가 환영진을 헤매고 있던 비마대의 일부가 튀어나왔다.
진이 부서지자 그들이 환영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찢어진 상처를 꿰매듯이 또 다른 환영이 드러났던 내부를 감추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
청명의 눈에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은수의 눈에도 놀람이 어렸다.
삼백 장이었던 진의 범위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안쪽을 감추고 있었다.
“정녕 대단한 놈이구나. 진이 스스로 수복을 한단 말인가? 진 속에 또 다른 진을 심다니…….”
청명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또다시 힘을 모으는 순간.
우우우우!
사방을 울려 놓는 장소성과 함께 하얀 빛 무리가 나타났다.
“태존 어른!”
“오! 왔는가!”
“패월을 뵙습니다.”
흔적을 뒤쫓던 소청은 태존이 만들어 낸 거대한 폭발음을 듣고 나타난 참이었다.
“몸은 어떤가?”
소청은 따로 대답하지 않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무언가 달라졌다.
이전의 기운에서는 위압감이 있었다면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임 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신승인가?”
“예. 도움을 받았습니다.”
“별일이군. 신승이……. 무량수불.”
청명이 도호를 외며 고개를 내저었다.
“잘 갈무리하게. 연이 닿았으니 애초에 자네의 것이었던 모양일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보다 이곳입니까?”
“그렇다네. 환영진이 특정 영역에 걸쳐 펼쳐진 것으로 보아 놈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네.”
“흠.”
소청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딘가 익숙한 진의 느낌이 들었다.
“내 진법이라고는 도가에서 내려오는 것뿐이라 아예 부숴 버릴 참이었네. 또한 진 안에 또 다른 진을 심는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는 진이라…….”
“일단은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자네가? 허, 진법에도 조예가 있었던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청명을 향해 싱긋이 웃은 소청이 진 안으로 다가갔다.
허상과 실상의 경계에 다다른 그가 한 발을 내딛자 진이 그를 삼킨 것처럼 감추어 버렸다.
“허, 저 친구는 거침이 없구먼…….”
청명이 고개를 저으며 감탄했다.
진 안으로 들어온 소청은 진의 변화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진 안에서 어떤 위협이 닥쳐와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생긴 터였다.
‘이건…… 만상귀혼진(萬象鬼魂陣)?’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마천 비고를 뚫기 위해 수도 없이 연구했던 그 진법이었다.
마천 비고의 첫 번째 관문이기도 했던 희대의 절진에 일천이 넘는 무인이 희생되었다.
결국 뚫어 내기는 했으되 진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났던 제갈휘문조차 혀를 내둘렀을 정도의 진법이었다.
‘아니, 약해. 축을 구성하는 데만도 백 년이 걸린다는 절진을 이토록 쉽게 만들 수는 없지. 흉내만 내어 놓은 것뿐이군.’
소청은 익숙한 걸음으로 진법을 헤집고 다녔다.
축이 정교하지 못했다.
세밀하지도 않았고 경험했던 것보다 변화가 단조로웠다.
비고에 남겨진 만상귀혼진의 위력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효용이었다.
“가소롭군.”
차라라락.
피풍의가 날카로운 칼처럼 변했다.
스걱.
가볍게 내지른 움직임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베여 나갔고 환영이 흩어졌다.
진법에 대해 알게 된 소청의 움직임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겹겹이 쌓인 진법은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허, 이토록 쉽게?”
환영진이 걷혀 나가자 청명은 감탄을 거듭했다.
그리고 진이 모조리 사라지고 내부가 드러났다.
“이런!”
그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던 환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