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58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58화
57화. 이빨을 드러내다
소란은 끝이 났다.
소청의 활약과 혁련휘의 도움으로 마천은 결국 사도련에 손을 뻗지 못했다.
“어이, 몸은 좀 어때?”
약선원에 누운 혁련휘를 찾아온 소청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나야 끄떡없지.”
“허세는……. 듣자 하니 최후의 절초 어쩌고를 써서 내상을 심하게 입었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누가 그러긴. 약 달여 주는 시비가 그러던데? 다 죽어 간다고. 그 약 그거 장부 내상에 쓰는 활혈거어(活血祛瘀) 탕약이라며?”
소청이 탁자 위에 놓인 탕약을 보며 히죽거리자 혁련휘가 당치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 이거 보양용이야 보양용.”
“이상하네.”
소청이 탕약을 들고 코를 킁킁거렸다.
“강황, 건칠, 계혈등(鷄血藤), 권백(卷柏), 금낭화, 단삼, 도인, 삼릉, 소목, 봉출, 왕불유행(王不留行), 우슬, 현호색까지. 이야, 역시 소련주가 좋구먼. 좋다는 건 다 들어갔네. 다 들어갔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보양용이라니까!”
얼굴이 살짝 붉어진 혁련휘가 탕약을 빼앗듯이 받아 들고는 단숨에 마셔 버렸다.
약이 썼던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소청의 어깨에 매어진 붕대를 보며 비웃었다.
“그나저나 원숭이 한 마리 때려잡다가 팔이 날아갈 뻔했다면서?”
“스친 거야. 스친 거.”
“쯧쯧, 사람이 그리 약해서야. 실망스럽구먼, 실망스러워.”
“그래? 그럼 어디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한번 볼 텐가?”
소청이 피풍의를 매만지며 억지웃음을 짓자, 혁련휘가 마주 웃으며 탁자에 세워진 참작의 손잡이를 슬며시 잡아 갔다.
“어떻게? 창잡이가 팔 하나 가지고 되겠어?”
“창잡이라니? 파천도 쓰는 거 못 봤냐? 너야말로 이번에 내상 입으면 주화입마 아니야?”
둘의 시답잖은 신경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밖에서 무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충!”
사도련의 무인들이 소리 높여 ‘충’을 부르짖는 대상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저 걸어 들어온 것뿐인데 그의 존재감이 약선원을 가득히 채웠다.
“여전히 혈기가 넘치는군.”
소청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혈랑대주 만중은 더 이상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
“앉지.”
만중이 의자를 대령하자 위도혁이 앉았고, 그 앞에 소청과 혁련휘가 자리했다.
“네 말대로 되었군.”
위도혁이 소청을 향해 무덤덤하게 칭찬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가 주는 위압감과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옅어져 있었다.
위도혁의 묵직한 시선이 소청에게서 혁련휘에게 옮겨졌다.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예.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혁련휘의 말에 위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몇 마디의 말로 상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청은 인정을 받았고 혁련휘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이것으로 저들의 음모가 와해되었다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아직 놈들의 본체는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잔가지들이 여전히 사도련에 암약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입니다.”
“흠, 신경 쓰도록 하지. 낭인 시장도 마찬가지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멈춰 쉬고 있던 거인이 발걸음을 움직이기로 했으니 사도련의 분위기가 바뀔 것이다.
손짓 한 번에 산을 옮긴다는 무황이다.
그가 움직이면 사도련이 움직일 것이고 한순간에 철옹성처럼 견고해질 것이다.
이전의 생과는 달리 와해되지 않고 뭉친 사도련이다.
더욱이 위도혁이 살아 있으니 앞으로 다가올 마천을 상대하기 위한 무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터였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일단은 포로를 심문해 볼 생각입니다.”
“흠, 그 곤륜파의 종현자라는 놈 말인가?”
“예. 잘만 하면 정천에 숨어든 이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라. 너는 그만한 일을 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 종현자에 대한 일은 함구를 명해 주십시오.”
“저들에게 알리지 않겠단 말이군.”
“맞습니다.”
“네놈, 제법 심계도 깊구나.”
위도혁이 피식 웃었고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참, 휘의 말로는 저들이 군문의 무기인 투창기를 사용하였다고 하더군요.”
“들었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 그들과 협조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음…… 좋다. 그것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거듭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살짝 숙였던 소청은 가만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너의 수하인 듯하여 그냥 두었다.”
“예. 앞으로 쓰일 데가 많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멍청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들켰는데 도망칠 생각도 안 하네요. 뭐 도망쳐 봐야 결과는 똑같겠지만.”
“흐흠.”
가볍게 고개를 숙인 소청이 혁련휘를 향해 피식 웃었다.
“휘. 몸조리 잘해. 그래 봐야 나보다 약하겠지만…….”
“…….”
혁련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소청이 사라졌다.
픽!
그리고.
빠악! 뻑! 퍼억! 빠바박!
“꾸에엑!”
“끄아악!”
약선원의 지붕에서 정체를 알 만한(?) 구타음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게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정천맹 맹주전.
사도련에서 날아온 문서를 손에 쥔 남궁천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마천, 편살원, 청룡단의 세작과 포로들의 죽음.
그리고.
죽은 자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하나의 이름.
남궁진린.
자신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감히…….’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깨문 그는 문서를 구겨 쥐고 일어났다.
“어디로 모실까요?”
호법부의 수장 남궁천위가 물었다.
“그를 만나야겠다.”
“…….”
남궁천세가 지칭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남궁천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맹주, 보는 눈이 많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
남궁천세가 남궁천위의 멱살을 잡아채 당겼다.
“뭐라 했느냐? 흥분을 가라앉혀?”
“맹주님!”
“자식이 죽었는데 어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단 말이냐? 사사로이는 너의 조카다.”
“…….”
“놈들이 구금하지 않았다면, 제 놈들이 일을 똑바로 처리했다면! 그 아이, 진린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스산한 분노가 느껴졌다.
“맹……. 형님.”
“닥치거라! 나는 지금 그를 만나야겠다. 만나서 따져 보아야겠다. 어째서 그 아이를 죽게 만들었는지.”
“…….”
남궁천세의 거센 분노 앞에 남궁천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님의 분노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
남궁천세는 계속해서 치밀어 오르는 화에 거칠어진 숨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무한이도 죽었습니다.”
“…….”
환영곡 십삼위였던 남궁무한은 남궁천위의 아들이었다.
막야라는 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 들은 그는 사방팔방을 뒤져 그 정체를 캐고 있었다.
“그래서 참잔 말이냐.”
남궁무한의 이야기에 남궁천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에 핏발이 돋아 있었고 몸에서는 옅은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갈휘문이 우리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섣불리 움직인다면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네 말대로 무한이가 죽었다. 이제는 진린이가 죽었어. 언제까지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 이상 남궁천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남궁천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연통을 보내 약속을 잡겠습니다. 이대로 찾아가는 건 남들의 눈에 띄기 쉽습니다.”
“알겠다.”
남궁천세와 남궁천위는 호법부의 무인들을 물리고 은밀하게 무한의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주막에 도착했다.
방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포를 둘렀으니 그들을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끼이이익.
부서질 듯이 위태로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저 앉아 있기만 한데도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내 분명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을 터인데…….”
낮게 깔리는 담담한 목소리에 남궁천세가 침음을 삼켰다.
“진린이가 죽었소.”
“…….”
“내게는 금쪽같은 아들이오.”
“그래서?”
상대의 무료한 말투에 남궁천세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라니? 진린이가, 내 아들이 죽었단 말이오!”
탁.
술잔이 탁자 위에 놓이며 기분 나쁜 소음을 만들었다.
남궁천세와 천위는 그것만으로 내력이 진탕되는 듯한 느낌에 얼굴을 찡그렸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나를 보자 한 것인가? 내 분명 자중하라 했거늘…….”
그가 몸을 돌리자 막대한 기운이 남궁천세를 짓눌러 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틴 그가 상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참을 수 없소. 반드시 혈채를 받아야겠소.”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는 남궁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포 중년인이 가볍게 손을 뻗어 기운을 쏘아 내었다.
“크으윽!”
그리 강한 기운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남궁천세가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주저앉았다.
“혈채? 누구에게 말이냐? 무황에게 칼이라도 들이밀어 볼 참인가?”
적포 중년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궁천세를 비웃었다.
“잔마가 죽었다. 편살원이 몰살당했어.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웃기는군.”
“…….”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었소. 제 할 일도 못하고 죽은 잔마 덕에 내 아들이 죽었소.”
“…….”
고통에 찬 얼굴로 남궁천세는 자신이 할 말을 이어 갔다.
“좋아, 혈육의 정을 나무랄 순 없지.”
적포 중년인이 힘을 거두자 남궁천세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복수를 할 기회를 주겠다. 하나 그 대상이 사도련은 아니다.”
“…….”
“사도련에 심었던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소청이 폭마가 가졌던 지옥혈잠의 보포를 가지고 있다더군.”
“진소청이 폭마의? 하면!”
“놈이 폭마를 죽인 막야다.”
순간 뒤에서 듣고 있던 남궁천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징그럽게 돋아 올랐다.
폭마의 죽음에는 막야가 관련되어 있다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남궁무한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에서야 알겠더군. 진소청이 막야인 것이야. 그리고 제갈휘문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막야의 정보를 조작한 게지.”
“제갈휘문…….”
남궁천세가 이빨을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아 대었다.
“잔마의 죽음은 물론 남궁진린의 죽음에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 전투를 살펴본 아이들의 보고로는 정천맹에서 보낸 협상단과 남궁가의 무인들을 미끼로 삼고 함정을 팠다고 하더군.”
“…….”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겠나? 진소청? 훗, 글쎄. 그가 그만한 지략을 가지고 있을까?”
“하면?”
“진소청은 제갈휘문이 파견한 자다. 사도련으로 파견될 때 지시를 내렸겠지. 녀석은 전 중원이 인정하는 천하제일의 지략가니까.”
“…….”
남궁천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사도련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본 천에 대한 이야기가 공론화될 것이다. 너는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이용한다고?”
“그래. 충분히 이용할 수 있지. 제갈휘문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게 뭐요?”
남궁천세의 말에 적포 중년인이 웃었다.
“감찰단을 만들어라. 마천을 공론화하고 세작을 찾아낸다는 이유를 든다면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면 감찰단으로 제갈휘문을?”
“이미 그가 너의 뒤를 살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그에 더해 제갈휘문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밝혀내어 그를 마천으로 몰아간다.”
“마천으로?”
“그래. 어차피 들켰으니 감출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죄를 모조리 뒤집어씌우는 것이지. 제갈휘문과 진가에게…….”
“그들을 마천으로 몰아 잡는다?”
“후후, 그런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