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9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96화
95화. 변혁의 시작점
중원 무림.
황제의 영역 안에 들어 있는 거대한 중심을 사람들은 중원이라 불렀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정파와 사파를 일컬어 중원 무림이라 했다.
하지만 무림이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중원에 속하지 않은 곳을 관외무림(關外武林), 혹은 새외무림(塞外武林)이라 불렀다.
북쪽의 마적 떼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거대한 사막을 차지하고 있는 대막혈궁(大漠血宮).
그보다 더 오랫동안 북쪽 만년빙설의 대지에 터를 잡은 북해빙궁(北海氷宮).
그리고 스물두 개의 부족이 역사를 이루고 모자겸에 의해 통일된 운남의 천독곡이 있었다.
그 세 곳은 중원 무림의 역사상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마찰을 빚으며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뤄 왔었다.
하지만 새외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토번.
남동쪽은 운남성과 맞닿고 동쪽으로 사천, 청해, 북쪽으로는 신강에 접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왕처럼 군림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토번의 사람들은 그들을 ‘마궁’ 혹은 ‘백마궁’이라 불렀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어진 백색의 성.
십삼 층에 달하는 거대한 높이에 금빛을 내는 다섯 개의 지붕의 웅장함은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장엄했다.
그곳이 바로 천룡사, 살막과 같은 열두 개 거파를 거느린 토번 무림의 총본산이었다.
마궁의 뒤편 용왕담(龍王潭).
배를 띄워도 될 만큼 거대한 연못의 중앙에 한 사내가 머리만을 드러내고 앉아 있었다.
마천의 주인.
마종.
눈을 감고 앉은 그를 향해 적색 가사를 입은 노승이 다가왔다.
그는 혈마궁의 주인인 혈승 탑리격이었다.
“홀홀, 마종. 진전은 있으십니까?”
탑리극의 말에 마종의 감았던 눈이 뜨이자 신광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고, 용왕담의 물결이 거센 파랑을 일으켰다.
“후우…….”
가볍게 내쉬어지는 숨에 잔잔해진 파랑을 뚫고 마종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탑리격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적색 가사를 벗겨 내어 그의 나신을 가려 주고 물러났다.
“음…… 마궁의 정수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얻기 어렵군.”
“그리 말씀하시니 기분이 좋군요.”
시비로부터 찻잔을 받아 건넨 탑리격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마종의 세 번째 여정.
북해의 정수와 혈궁의 정수를 얻은 뒤였다.
이미 그의 힘은 천하를 오시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이 몸담은 마궁의 정수가 가장 어렵다 하니 흐뭇했던 것이다.
“어쩐 일인가?”
“중원에서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
“진혼창, 진소청이 죽었다 합니다.”
탑리격의 보고가 있었지만 마종은 담담하기만 했다.
“검마가 일 처리를 잘했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역천대공께서 부상을 당하셨다 하여 꽤나 강한 자인 줄 알았는데…….”
“그저 그 정도였던 게지.”
마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을 내리라 전할까요?”
“알아서 하라.”
“알겠습니다. 그가 부상을 입고 대막으로 돌아왔다 하니 잘 보살피라 전하겠습니다.”
“…….”
“한데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탑리격의 말에 마종이 의문을 드러내었다.
“사천에서 서천맹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서천맹?”
무덤덤했던 마종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 사천을 중심으로 청성, 아미, 곤륜이 힘을 모으고 인근 문파들이 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천맹이라…….”
곰곰이 되씹던 마종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좋지 않군.”
힘의 결집.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환마에게 명하고 잔마가 돕게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천의 결집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렇기에 제갈휘문을 죽이고자 한 것이다.
또한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 마천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분열되어 있어야만 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자존심과 자만심에 빠져 있어야 했다.
하나 만약 공동의 목표가 생긴다면 그들은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사도련까지 끌어들여 거대한 연합체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마종은 그 결집의 중심에 무황이 있을 것이나 그 이면에는 제갈휘문이 숨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언제나 그러했듯 강한 무공은 두려움을 주지만 세 치 혀는 사람을 뭉치게 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서천맹이라니…….
정천의 힘이 그곳으로 집중되는 것은 막아야만 했다.
만약 서천맹이 온전히 구성되면 그 분위기가 정천의 곳곳으로 확산될 것이 틀림없었다.
“역천대공에게 전하라.”
“홀홀, 대막에 명을 내리실 생각입니까?”
“…….”
마종이 탑리격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혈승(血僧) 탑리격.
마종과 만날 때까지 토번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던 자였다.
일만 마승들을 이끄는 그는 정천 오존과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어도 모자람이 없는 자였다.
또한 두 대공에 비해 뒤지지 않는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십만대산을 떠나 새로운 마천을 만들면서 가장 어렵게 얻은 곳이기도 했다.
당시 북해의 정수를 얻은 이후 이틀 밤낮을 두고 싸웠고 결국 이기기는 했으나 그는 끝까지 무릎만은 꿇지 않았다.
물론 대막혈궁의 정수를 얻은 이후로는 당장에라도 다리를 잘라 버릴 수 있었지만 서장의 모든 무인들을 영도하는 탑리격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북해는 북천대공에게, 대막은 역천대공에게 주었으면서도 마궁만은 그가 주인으로 남아 있게 했다.
“나서고 싶은 모양이군.”
탑리격의 낮게 뜬 눈 아래 흉포한 살기가 넘실거리자 마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홀홀, 피 맛을 본 지 오래되어서…….”
“탑리격. 마궁은 새로운 마천이 가진 최강의 전력이다. 벌써부터 저들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지.”
“…….”
“걱정 말라. 탑리격. 마궁의 정수를 얻고 나면 정벌을 시작한다. 그때는 반드시 마궁이 서쪽의 선봉에 선다. 하나 아직은 드러내어서는 안 될 일.”
“명심하지요. 홀홀.”
탑리격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표는 중원 정벌 따위가 아니었다.
피와 살육.
매우 간단하다.
일관적이고 직선적인 그들의 목표는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은밀하게 준비하되 폭풍처럼 몰아붙이라 하라. 저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이전과는 대처가 다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역천의 대공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돌아가라.”
축객령과 함께 마종이 다시 연못으로 걸어 들어가 눈을 감았다.
‘진소청, 아니 막야가 죽었단 말이지. 후후. 전생이 도적이었으니 결국은 돌아왔다 해도 그 정도까지가 한계였던가.’
마종의 입가에 비웃음이 퍼져 나갔다.
* * *
“사실이냐?”
무황 위도혁은 자신 앞에 엎드린 전령이 내민 전서를 읽으며 낮게 뜬 눈으로 물었다.
“예! 진가에서 직접 보내온 것입니다. 소련주께 전하라 적혀 있었습니다.”
“…….”
위도혁은 잠시 고민했다.
“누가 아느냐?”
“예?”
“이 사실을 련 내에 또 누가 알고 있는 것이냐?”
“지금은 련주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알겠다. 하면 비밀에 부치도록.”
“…….”
분명 소련주가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련주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따르면 될 뿐이었다.
“함구하겠습니다.”
전령이 납작 엎드려 복명하고 돌아갔다.
“진소청, 그 아이가 생환을 했다……라.”
이미 소식은 전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정천맹이 알 것이고 하오문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 혁련휘만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서천맹이라 했던가?”
정천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천맹이 만들어지고 정천의 오대 무가에서 새로운 후계들이 탄생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들.”
위도혁은 서천맹을 만들어 낸 제갈휘문과 태존을 생각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서천맹이 만들어진 목적은 고작 힘의 결집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한 세대를 지나 또 다른 세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태존이 있고 신승과 검후가 버티고 있는 정천맹이었다.
제갈휘문이 정천의 백대 고수들을 모아 ‘백인회(百人會)’라는 이름의 새로운 무력 단체를 만들고 신승과 검후를 그들의 수장으로 모셨다.
전대의 고수들이 모조리 몰려들었으니 젊은 고수들이 그곳에 모여 자신의 뜻을 펼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선대의 뜻에 따라 자신을 감추거나 반발이 일어나 분열될 뿐이었다.
두 마리의 새를 묶으면 날개는 네 개가 될 수는 있지만 날 수는 없다.
새는 따로 날아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비응(飛鷹)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비응은 홀로 존재해야만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가 있는 법이었다.
“비상할 발판이 되어 줄 생각이겠지.”
무황은 대충 제갈휘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제갈휘문이 백대 고수들을 모은 이유를 말했을지도 모르고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대 고수들과 오존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었다.
오존과 백대 고수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마천과의 전쟁에서 산화하고자 함이었다.
장렬하게 산화하고 다음 대에게 정천을 넘겨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기에 서천맹을 만든 것이다.
다음 대를 이끌어 갈 무인들이 하나로 뭉치는 곳, 그것이 서천맹을 만든 목적이었다.
“정천은 서천맹을 중심으로 재구성되겠군.”
위도혁의 시선이 장쾌하게 떨어지는 폭포 아래 좌정한 혁련휘를 향했다.
진소청이 생환했다면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이루어진 일일 터였다.
스스로 산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 분명했다.
‘이미 더 높은 경지를 이루어 냈다는 것이겠지.’
무황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다.
쉽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깨쳤으니 그의 무공은 혁련휘보다 한참이나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혁련휘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의 혁련휘는 분노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함께 성장할 친구를 얻어 계기를 얻었고 그 친구를 잃고 복수를 다짐함으로써 원동력이 생겼다.
혁련휘는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넘을 것이다.
지금의 경지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 오르리라.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자신의 생이 막바지로 치달아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등선을 위해 수련을 해 볼까도 고민했었다.
“평생을 피 냄새를 맡고 살아왔는데 신선이 되어 무엇 할까.”
위도혁은 굳은 결의를 품으며 혁련휘를 바라보았다.
“만중!”
“하명하십시오!”
사도련주의 호위이자 혈랑대의 수장인 만중이 달려와 그의 앞에 엎드렸다.
“정천의 태존에게 조만간 보자고 전해라.”
“…….”
“그리고 사도련에 명을 내려라.”
“…….”
“모든 문파의 수장들은 지금 즉시 본성으로 모이라 하라.”
“모두 말입니까?”
“예외는 없다. 제일 늦게 오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
위엄 어린 목소리였지만 만중은 왠지 자신의 주군이 즐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힘 있게 대답하고 날 듯이 빠져나가는 만중에게서 시선을 돌린 위도혁이 혁련휘를 향해 다가갔다.
“나 위도혁의 제자가 친구 놈에게 뒤져서야 되겠는가? 내 너의 거름이 되어 주마. 마종? 정천? 큭큭큭. 최강은 바로 우리 사도련이지!”
정천에 이어 사도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황의 이름으로 사도련 예하에 문파라는 이름을 올린 모든 곳의 수장들이 불려 들어왔다.
그리고 명령이 내려졌다.
“각 문파의 후계 중 가장 뛰어난 자를 골라 본성으로 들이라! 변혁이다!”
변혁.
그 말처럼 정사의 무림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쳤던 말이 다시금 힘찬 발굽질을 하는 첫걸음이었고,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