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9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95화
94화. 서로 다른 생각들
소청이 사라진 뒤 삼 개월이 지난 어느 날의 화산 태극동.
화산의 장문인을 비롯해 열두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빼곡하게 태극동을 채웠다.
나이는 죄다 달랐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슬픔은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바닥을 적시고 울음소리가 태극동을 울렸다.
“장문인.”
태극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검존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장문인 운상자를 불렀다.
“예. 사숙.”
눈물로 얼룩진 운상자의 눈이 검존을 향했다.
“슬퍼 말게. 어차피 나는 더 이상 마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네. 화산의 이름만 더럽힐 뿐이야.”
“사숙,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검존의 모습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홍옥처럼 빛나던 피부에는 검버섯이 피어올라 푸석해졌고, 이전에 없었던 주름이 얼굴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검존이 앙상하게 변해 버린 팔을 들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젊은 사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너 역시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사조님.”
화산의 젊은 제자.
일찍이 칠룡의 한 사람이었으며 화산의 후계자였던 옥명자.
선도의 가르침에 따라 삼 년간의 표주(漂周: 세상을 떠돌며 수행함)에서 돌아온 그는 검존에게 선택되었다.
검존이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화산검의 최후의 심득을 알려 준 뒤 그가 행한 것은 ‘격체전공’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마지막 제자에게 모든 내공과 기억을 물려준 것이다.
“받거라.”
검존이 오랫동안 자신이 간직했던 애검 ‘자하(紫霞)’를 내주었다.
“사조님!”
옥명은 검존을 사부가 아닌 사조로 불렀다.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나 검존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하를 받는 순간 승계의 의식은 끝날 것이다.
그 끝이 검존이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겠다는 뜻임을 모르지 않으니 태극동 그 어디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강호에는 수많은 강자가 있다. 역사를 이끌어 온 태존과 신승, 검후가 그러하고 비록 유명을 달리했으나 진소청이 그러했다.”
“…….”
“오대 무가에서도 격체전공을 통해 목숨을 걸고 후대를 키워 내고 있더구나.”
“…….”
“또한 사도련에는 혁련휘라는 걸출한 기재가 있고, 마천이라는 악귀들이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음을 알 터이다.”
“알고 있습니다.”
“중원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다. 또한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이다. 다시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너의 어깨가 무거워지겠구나.”
부드러운 검존의 미소에 옥명자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검존의 손때가 묻었던 자하검은 차가웠다.
“이제는 너희들이 이끌어야 할 때이니라. 구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하나 명심하거라.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할지라도 문파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강대한 무공이나, 문파를 명문으로 만드는 것은 속한 자의 성품이다.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남겼으니 부디 화산을 옳은 길로 이끌어 주길 바란다.”
“제자 옥명! 명심하여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옥명자가 검을 바닥에 내리고 고개를 숙여 외쳤다.
“이것으로 승계는 끝났느니……. 나는 검존에서 화산의 현우자로 남을 것이다.”
검존이 말을 마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도 물러가지 않았다.
태극동에 모인 무인들은 고개를 처박고 슬픔을 토해 내었다.
화산을 대표했던, 화산의 자존심과 같았던 거인이 모든 것을 후대에 전하고 물러나는 자리이니 슬프지 아니할 수 없었다.
“후우…….”
자신의 뜻을 전했음에도 물러나지 않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검존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찌 슬퍼하는가?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눈물을 거두고 모두 물러가거라. 피곤하구나.”
“…….”
축객령이 떨어졌다.
운상자는 힘이 빠진 모습으로 일어나 제자들을 내보내었다.
“옥명은 사숙을 잘 모시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운상자는 눈을 감은 검존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검존이 옥명자를 불렀다.
“옥명아.”
“예. 사조님.”
“그만 가거라. 내 장문인에게는 따로 말해 놓을 테니 매화검수를 이끌고 사천으로 떠나거라.”
“사천입니까?”
“그래. 그곳에 서천맹이 만들어진다 들었다.”
“…….”
“중원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그곳엔 힘이 없다. 청성과 아미가 있고 곤륜이 돌아와 힘을 보태고 있다고는 하나 진혼창이 죽어 중심을 잡을 만큼 강한 무인이 없다.”
“들었습니다.”
“하니 가거라. 가서 힘을 보태거라.”
“하면 사조님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무엇 하러 돌본단 말이냐? 선도(仙道)에 몸담은 자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며 무공을 잃은 것이 무엇이 대수란 말이더냐. 때가 되면 늙고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게다. 허허, 네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구나.”
“사조님…….”
“헛헛.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하자꾸나.”
“무슨 부탁이십니까?”
“사천에 가거든 꼭 진가에 들러 진 가주에게 화산의 감사를 전하거라.”
옥명자도 화산이 진가에 입은 은혜를 알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이제 그만 가거라. 나는 좀 자야겠구나.”
옥명자는 검존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이내 눈을 감고 잠드는 검존의 얼굴이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다.
비록 검존이 바라지 않아 ‘사조’로 칭했으나 물러난 옥명자는 자하검을 내려놓고 검존을 향해 구배지례를 다했다.
그리고 태극동을 나가 검존의 명을 따를 준비를 서둘렀다.
꾸웅!
집채만 한 바위가 내지른 주먹에 산산이 부서졌다.
“몇 할의 힘이더냐?”
“사 할입니다.”
“오오오!”
황보인의 대답에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되었다. 되었어!”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숭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함께한 일곱 장로의 초췌해진 얼굴에도 기쁨이 서려 있었다.
넉 달간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격체전공.
드디어 끝을 보았고 괴물을 탄생시켰다.
황보세가의 대공자 황보인.
무려 여덟의 내공이 더해지고 단련되었으며 가문의 재산을 반이나 쏟아부어 찾아낸 삼목섬와(三目蟾蝸)의 내단이 그의 몸에 깃들었다.
“…….”
대법이 시행되는 동안 긴 잠에서 깨어난 황보인의 눈은 심연처럼 깊어지고 안광은 모든 것을 녹여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꾸우욱.
주먹을 움켜쥐어 본 황보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강석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힘이 전신에 끓어 넘쳐흘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모의 세월을 보냈던가?
칠룡의 수좌로 평가받았지만 벽을 깨지 못하고 파락호가 되어 이룡(螭龍: 이무기)이라 불리며 조롱을 받았고, 동정호에서 빌어먹을 진소청에게 당한 뒤로 폐인처럼 술만 마시면서 허송세월했다.
“인아.”
“예. 아버님.”
“이제 네가 우리 황보세가의 미래다.”
“…….”
“마천에 협조한 아비의 판단으로 황보가의 명예는 땅에 추락했다.”
“압니다.”
“제갈휘문 그 개자식의 명을 듣고 격체전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제 그것이 우리 황보가의 날개를 다시금 펼쳐 줄 계기가 되었구나.”
“…….”
“패왕대의 최정예 오백을 선발해 두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보인의 몸이 찌르르 진동했다.
가문의 최정예를 모두 주겠다는 것은 승계 의식을 하지 않았을 뿐 황보세가의 가주로 삼겠다는 것이며 전권을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서천맹으로 가거라. 서천맹에는 주인이 없다. 이미 격체전공에 성공한 팽가와 악가를 비롯해 강남 칠패의 후계들이 그곳으로 향했다.”
황보숭의 얼굴에 또 다른 탐욕이 떠올랐다.
“무인은 스스로 강함을 증명하는 존재다. 나는 네가 능히 서천맹의 주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나머지 가문의 후계들을 모조리 꿇리고 제가 그들의 위에 서겠습니다.”
“장하다.”
황보숭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장로들이 반 이상이나 되는 내력을 쏟아부었고 황보숭도 태반의 내공을 전해 주었다.
하나 지금의 황보인이라면…….
태존과 신승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도 몰랐다.
혹여 그들보다 못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정천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젊은 무인들이 오존의 이름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미 황보숭의 머릿속에는 마천에 변절했다는 오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천맹의 주인이 되어 황보세가가 무림 제일 가문으로 거듭날 것에 대한 욕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대 정천맹의 주인이 될 밑거름과도 같았다.
‘내 반드시 치욕을 되갚아 줄 것이다. 제갈휘문, 정천을 손에 넣으면 네놈부터 갈가리 찢어 주마.’
황보숭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탐욕과 복수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거라!”
“예. 아버님. 소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길로 황보인은 패왕대 오백과 함께 사천을 향해 달렸다.
“아깝게 되었군. 하필이면 죽어 버리다니 말이야. 이 힘이라면 그 진소청 개자식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어 줄 수 있었을 텐데.”
황보인은 동정호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진소강이라고 했나? 오냐, 그놈부터 조져 주마.”
황보인은 마천과 싸운다는 마음보다는 진가의 두 아들놈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흐흐흐, 서천맹? 그까짓 것이 문제던가? 지금의 힘이라면 정천의 주인도 문제없을 터다! 서둘러라! 다른 가문의 후계들보다 먼저 서천맹에 도달해야 한다!”
짜악!
황보인은 쉼 없이 말채찍을 휘둘렀다.
* * *
쿠웅!
쿠웅!
산이 통째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석 달째 산을 파내고 있었지만 축대를 세워도 아무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는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내려놓게 되었지만 시체만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마음에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진가신도 소강도 진무월창의 무인들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리가 내부에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버님. 도대체 이게…….”
소강이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진가신 또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저, 혹시…….”
서로를 바라보는 소강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어리기 시작했고 진가신의 눈에 사라졌던 희망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 개월이나 지났는데…….
하지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진동은 더욱 거세게 산자락을 뒤흔들어 놓았다.
무려 반나절이나 지속된 소리와 진동에 소강과 진가신은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었다.
적막이 감돌았다.
“아, 아버님!”
순간 소강이 막대한 기운이 안쪽에서부터 몰려드는 느낌에 다급하게 외쳤다.
“모, 모두 피해!”
콰아아아앙!
소강이 진가신을 안고 몸을 빼는 순간 산자락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그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 아버님?”
소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