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8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8화
87화. 상천(上天)에 오르다
소청은 일부러 움직이지 않고 영신현에서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상하군. 분명 소식을 전했을 텐데?’
턱을 괴고 창밖을 보던 소청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소식이 있어야 했다.
싸우고자 했다면 무인들을 보내야 했고, 항복하고자 하면 누군가는 찾아왔어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뜻이지? 결국 올라오라는 건가?’
소청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우진혜가 다가왔다.
“공자.”
“뭐?”
“좀 다정하게 대답할 순 없어요?”
“내가 왜?”
“왜라니요! 도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고문 잘하는 여자?”
“이런 씨…….”
자칫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칠 뻔했다.
푸대접도 이런 푸대접이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혈독이라는 잔인한 곳에서 만들어졌던 가공할 괴인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 버린 자였다.
그때의 살인적인 기운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돌아가 버리고 싶었지만 스승이 내린 명은 그에 대한 감시였다.
싫은 좋든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 말을 말아야지.”
심드렁한 소청의 표정에 우진혜가 한숨을 쉬며 앞에 앉았다.
“연락이 왔어요. 다섯을 잡았다는군요.”
“다섯?”
“예. 모두 마흔세 건의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마흔세 건이라. 환영곡의 잔당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 있었나? 독혈보 녀석들이 꽤나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나 보군.”
“더 있을지 모르죠. 아직 그들의 살행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흠. 뭐 상관없어. 다섯을 확보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
“그들은 어디에 있지?”
“황학루의 비동에 있어요.”
“위험하겠군.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거야.”
소청의 말에 우진혜가 찡그린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죠?”
“열받은 괴물 한 마리가 올 것 같거든. 당장은 아니더라도 오점이 남았으니 직접 오겠지.”
“괴물이라면?”
“독혈보의 주인. 독마 북궁려강.”
“아!”
“하오문주에게 미리 경고를 해 두도록 하지. 그의 독은 무척이나 치명적이니까. 어쩌면 전에 본 혈독의 괴물과 함께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우진혜의 대답을 듣고 난 소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기다림의 의미가 없었다.
“이러다 해가 지겠군. 초사.”
“예. 패월.”
은신해 있던 초사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휘를 깨워. 기다릴 만큼 기다려 주었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뜻을 정했단 것이겠지.”
소청은 곤륜을 부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초사는 그 결정을 따를 뿐이었다.
소청의 일행은 천천히 곤륜산을 올랐다.
곤륜으로 향하는 길은 한산하다 못해 짐승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너무 조용하군.”
“뭔 소리야.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숙취에 시달리는 혁련휘가 투덜거렸다.
“과연 그럴까? 초사!”
“예.”
“비마대를 깔아 좌우를 살펴라.”
“알겠습니다.”
소청의 명령에 초사와 비마대가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산의 중턱에 도달했을 때.
“저기 보이는군. 그들의 대답이.”
소청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산 위쪽을 향했다.
오르막이 끝나는 산 중턱의 공터를 점거하고 있는 수많은 무인들이 보였다.
모두가 용문검을 들고 있는 곤륜산의 무인들이었다.
“대략 이백 명쯤인가? 양풍산(凉風山)에 오르면 불사하고 현포에서는 영(靈)이 된다더니.”
소청이 곤륜파에 관련된 말을 내뱉으며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곤륜파의 신성함을 칭할 때 하는 말이었다.
곤륜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양풍산에 오르면 죽지 않고 현포에 다다라 영이 된다.
오르고 올라 상천에 이르면 신선이 되니 신영력이 오르면 천상제와 통하리라.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이 우릴 귀신으로 만들 모양이다.”
“귀신? 죽이겠단 말이지?”
혁련휘가 싸늘하게 웃으며 참작을 잡았다.
“휘, 지난밤처럼 죽여선 안 되네.”
“적이 아니었나?”
“적이지. 하지만 필요하면 끌어안아야 할 적이다.”
“쳇! 알았다.”
혁련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소청은 유람이라도 하듯이 천천히 곤륜파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정천맹에서 나온 진소청이다.”
“…….”
신분을 밝혔음에도 말이 없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돌아가라. 더 이상 오르면 죽음뿐이다.”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곤륜파의 무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왠지 그의 표정이 무거워 보였다.
“누구지?”
“곤륜의 대제자인 명공이다.”
“대제자라……. 변절자치곤 당당하군.”
“…….”
“어쨌든 이게 곤륜의 대답인가?”
소청의 말에도 그들은 따로 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겠다. 돌아가라. 그곳에서 한 발자국을 더 떼면 곤륜을 침입한 흉적으로 간주하겠다.”
“휴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야?”
“뭐?”
“고작 그 정도의 인원으로 내 앞을 가로막아 보겠다는 건가? 아니면…….”
소청이 주위를 슬쩍 돌아보자 명공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아까부터 좌우에 쥐새끼처럼 숨어 지켜보고 있는 것들을 믿는 건가?”
“뭐, 뭣이!”
명공의 눈이 부릅뜨였다.
호각이 입에 물리는 순간 소청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늦었어.”
순간 사방에서 창칼이 부딪치는 소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잠잠해졌다.
명공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호각도 불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 인원이 줄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지.”
소청의 비웃음이 지어질 때 숲에서 초사가 걸어 나왔다.
“숨어 있는 적은 모두 오십. 제압한 자는 서른둘, 나머지는 죽였습니다.”
“좋아. 수고했다.”
초사가 물러가고 소청이 명공을 바라보았다.
“암습을 해서 양동 작전을 펼칠 생각이었나? 이제 어쩌지? 남은 건 그대들뿐인 것 같은데?”
“…….”
소청의 이죽거림에도 명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었다.
어째서?
소청의 신경을 거슬려 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왜 장문인이나 장로들은 하나도 안 보이지? 곤륜오검이 죽었는데? 고작 대제자를?’
소청이 명공과 곤륜의 무인들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전쟁에 나온 자가 품을 만한 걱정이 무엇일까?
소청으로 인해 곤륜이 무너질까봐?
아니다. 그렇다면 더욱 전의를 불태우고 있어야 했다.
‘뭔가 있군.’
소청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인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수밖에.”
차자작!
창대가 길게 늘어났고.
파학!
내딛은 발에 흙이 파헤쳐지는 순간 소청의 신형이 곤륜 무인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이, 이렇게 빠른!”
명공이 놀라는 사이 소청의 창대가 거대한 구체를 머금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운이 산산이 부서져 떨어지며 대지를 짓이겨 놓았다.
콰아아앙!
양 떼 사이로 범이 뛰어든 것처럼 곤륜의 무인들이 흩어져 버렸다.
소청은 창대를 거꾸로 잡고 근처에 있는 무인을 모조리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창이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명의 무인들이 튀어 올랐다.
“태허도룡진을 펼쳐라!”
명공의 외침에 무인들이 일제히 용문검을 뽑아 들고 소청을 향해 나아갔다.
수십 개의 검이 튕겨 나가고 꺾였다.
‘망할 친구 놈!’
혁련휘의 눈가에 짜증이 일어났다.
수십 개의 궤적을 만들어 내는 소청의 무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단신으로 이백의 무인을 상대함에도 전혀 위축되는 느낌이 없었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곤륜의 무인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곤륜이 자랑하는 검진이 제 위력조차 펴지 못하고 조각조각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제길,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고 있을 수가 없잖아!”
혁련휘가 참작을 뽑아 쏘아져 나갔고 그 뒤를 초사와 비마대, 우진혜가 동시에 쫓았다.
소청에 이어 그들까지 끼어들자 검진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청뿐 아니라 혁련휘의 힘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목숨을 걸고 막아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명공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너무나 필사적이었다.
팔다리가 부러졌음에도 검을 놓치 않았다.
마치 죽음을 등에 지고 싸우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
소청은 기이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목숨을 위협받지 않는 이상 절대 죽이지 마라.
쩌엉!
소청의 진각에 오 장여가 터져 오르며 무인들이 둥글게 쓸려 나갔다.
오연하게 선 소청을 향해 물러난 무인들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피잉!
그 순간 곤륜 무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모두 다섯 줄기.
달랐다.
곤륜의 검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파하학!
재빨리 물러났지만 소청의 앞섶이 길게 베이며 피가 튀어 올랐다.
“…….”
소청이 공격해 온 자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곤륜과는 다른 기운을 가진 자들이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
“마천…….”
소청의 눈이 씰룩거렸다.
곤륜 무인들의 틈에 마천의 무인들이 섞여 있었다.
“크윽!”
그 순간 비마대의 대원들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우진혜마저 둘의 공격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물러나!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소청의 명령에 초사와 비마대가 재빨리 뒤로 몸을 빼냈다.
남아 있는 것은 소청과 혁련휘.
마천으로 보이는 자들은 모두 열 명이었다.
그들은 기운을 감추고 곤륜의 틈에 숨어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숨어 있었다면…….
“곤륜에 무슨 일이 있군.”
소청의 눈이 씰룩거렸다.
어째서인지 답이 늦다 생각했었다.
“휘! 부탁한다.”
파앙!
다리를 살짝 접었던 소청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에 감히 뒤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목표를 놓쳐 버린 마천의 검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목표는 진소청 하나였다.
죽이지 못하면 상처라도 입혀야만 했다.
그런데 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그 정도로 빠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칫! 쫓아…….”
몸을 돌리는 순간 그들의 앞에 참작을 빼든 혁련휘가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파학!
일보월하로 산을 질주해 오른 소청은 산문을 밟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리깐 눈 아래로 곤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곤륜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소청은 연처럼 떠올라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용문표식이 새겨진 수많은 무인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곤륜의 최심처이자 상징과도 같은 운현궁의 연무장이 보였다.
도가의 성지와도 같은 그곳에 더러운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검은 방립에 피풍의로 몸을 가린 일백여 명의 검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은 곤륜의 수뇌들과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중년인이 있었다.
“네놈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