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6화
85화. 곤륜에 들다
곤륜(崑崙).
일찍이 곤륜이라는 산은 그 영험함으로 중원에 손꼽히는 명산이었다.
그곳에 도가의 문파가 자리 잡았고 속세와 떨어져 살아가니 사람들은 그들을 곤륜파라 불렀고, 그 안에 사는 이들을 운룡(雲龍)이라 칭했다.
누대에 걸쳐 오랫동안 중원의 외벽 역할을 해 온 그들이 변절하였다는 사실은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회룡협의 전투를 돕기 위해 출발했던 그들은 청성과 아미에 막혀 본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적의 습격에 대비해 곤륜은 문을 걸어 잠갔다.
“장문인!”
백의 도포에 선명히 용문이 새겨진 도사 하나가 날듯이 상청관을 찾았다.
길고 긴 장로 회의가 이어지는 중이었기에 문을 열어젖힌 제자의 방문에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무슨 일이냐!”
“정천에서 진혼창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진혼창이?”
“예!”
곤륜의 현 장문인 연화자 양중선과 장로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된다더냐?”
“예?”
“병력을 얼마나 이끌고 오고 있다더냐고?”
“그것이…….”
“서둘러 고하라!”
“혼자입니다. 청성이나 아미, 그 외 다른 구파의 움직임은 없다 합니다.”
“뭣이!”
온다는 소식에 놀랐던 장로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감히…….”
양중선의 수염이 분노로 떨려 왔다.
무시나 다름없었다.
비록 회룡협의 영웅이 된 진소청이었지만 홀로 곤륜을 찾아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변절했다지만 구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곤륜이었다.
“협상이 아닐까요?”
대장로 연상자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듣자 하니 뇌옥에 잡혔던 오대 무가가 돌아간 지 오래라 합니다. 종남은 신승에 의해 정리되었다 하나 그 세를 보존했다 합니다.”
“맞습니다. 혹 저들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연공자가 거들었다.
“음…….”
연화자 양중선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곤륜의 상황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결과였다.
‘고작 욕심 때문에…….’
양중선의 얼굴에 수심이 깊게 어렸다.
실수였다.
아니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중원의 외곽에 홀로 떨어져 살아온 곤륜파.
그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곤륜은 점차 잊히고 쇠퇴하고 있었다.
구파의 일원이었지만 중심에 끼지 못했다.
새외의 위협으로부터 오랫동안 중원을 지켜 온 그들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손속이 잔인하다 말했다.
중원의 서 측방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점차 옅어져 갔고 견디지 못한 제자들도 하나둘 떠나가고 있었다.
중원의 중심부로 갈 수 있다면.
그 하나의 생각이 그들을 탐욕으로 이끌었다.
정파의 이름을 걸고 찾아온 손님은 그들의 탐욕을 자극했다.
중심에 서게 해 주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중원을 지켜 온 그들의 노고를 보상해 주겠다고 했다.
썩어 버린 정천을 뒤집고 진정한 의기를 세우자 말했다.
그렇게 방유현과 손을 잡게 되었다.
‘마천…….’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곤륜은 탐욕의 깊숙한 곳에 있었고 돌아오기 힘들었다.
화룡협에서 방유현은 패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발했던 곤륜의 제자들은 감숙의 경계에서 아미와 청성을 만났다.
자존심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두 개의 거파를 맞아 승리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돌아온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변절자라는 오명.
그리고 마천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허, 죽어서 선대를 뵈올 낯이 없구나.’
양중선이 장고를 끝내고 눈을 떴을 때, 장로들은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곤륜오검을 부르라.”
“…….”
“아직 저들의 저의를 알 수 없으니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곤륜오검은 자선당의 아이들을 이끌고 진혼창을 맞이하라. 만약 그의 의도가 협상이라면 맞이하되 싸움이라면 반드시 죽이라고 하라.”
“알겠습니다.”
* * *
“뭐가 이리 가팔라?”
사천을 떠난 소청 일행은 며칠이 지나서야 곤륜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곤륜이 세속과 왕래가 없다 하더니 진짜였군. 백 리나 걸어왔는데 제대로 된 마을 하나 없다니…….”
혁련휘의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산맥이 시작되는 곳까지는 좋았다.
마치 유람하는 것처럼 청해성의 곳곳에 들러 이름난 명주를 맛보고 경치까지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초사와 비마대의 모습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입은 옷은 막 소굴에서 나온 거지처럼 해어져 있었고 눈에서는 독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들에게는 쉬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밥을 먹고 나면 곧바로 수련이 시작되었고 연일 소청에게 쥐어 터졌다.
거기다가 소청이 그들에게 내린 명을 알게 된 우진혜가 수련에 동참했다.
일부 성공한 자들도 있었으나 발각된 자들에게는 ‘대침법’을 시전해 극악의 고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이곳이군.”
“뭐가?”
길을 아는 사람은 소청뿐이었다.
소청은 곤륜산의 절벽 면 잔도(棧道:절벽 면에 만들어진 좁은 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부스러질 듯 오래된 잔도가 끊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청이 고개를 들어 만장단애와 같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에 꽤 큰 마을이 있어. 여관을 잡고 쉴 수 있을 거야.”
“예?”
함께 쳐다보던 우진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알죠?”
“어찌 알긴. 소청이니까 알지.”
혁련휘가 중얼거리며 말했고 우진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히 말했어…….’
소청은 여전히 후회 중이었다.
“그런데 소청. 어느 정도의 규모야?”
“꽤 커. 곤륜산에 오르기 전의 마지막 마을이기도 하고 서역과 교역을 하는 상인들이 쉬어 가는 곳이니까.”
“호오? 좋은 술도 있겠군?”
“그래. 아마 중원에서 먹어 보지 못한 술들이 있을 거야.”
“좋아!”
혁련휘의 안색이 밝아지자 피식 웃은 소청이 말했다.
“가자.”
“응? 길이 없는데?”
“없긴. 여기 있잖아.”
소청이 만장단애 같은 절벽을 가리켰다.
“절벽을 오르자고?”
혁련휘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려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 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곤 소청이 잔도에 길게 늘어선 초사와 비마대를 바라보았다.
“아마 떨어지면 죽을 거야. 운이 좋으면 살지도 모르고…….”
소청의 말에 모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로는 만장단애.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같은 협곡이 있었다.
이만한 절벽을 거슬러 올라 본 적이 없었다.
소청의 수련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해 왔으니 위험한 도전이지만 얻을 것이 많은 도전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초사와 비마대가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그리고 소청이 웃었다.
“쉬워 보이나 보군. 내공을 안 쓰고 오르라는 뜻인데.”
“예? 그럼 어떻게?”
“손아귀 힘!”
“…….”
“그럼 위에서 보지.”
소청이 사악하게 웃고 순식간에 절벽을 밟더니 수직으로 쏘아져 나갔다.
“거참, 소청 같이 가세.”
혁련휘가 뒤를 따랐고 우진혜가 초사와 비마대를 불쌍하게 쳐다보고 절벽을 거슬러 올라갔다.
“…….”
초사와 비마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력을 쓰지 않고 어떻게 올라간다는 말인가?
“근데 조장, 상인들이 지나는 마을이라고 하지 않았어?”
은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다른 길이 있는 거 아냐?”
“그렇겠지. 마차를 타고 절벽을 오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근데 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울상이 된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동일하게 떠올랐다.
‘이런 개…….’
청해성 서쪽의 마지막 마을 영신(靈神)현.
중원에서 서역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 위치한 곳이었다.
절벽을 오른 소청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인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청!”
우진혜를 도와 절벽을 올라온 혁련휘 역시 의아함을 느꼈다.
“어? 큰 마을이긴 한데…….”
“재미있네.”
“뭐가?”
“사람들이 왜 없겠어?”
“…….”
“우리가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군. 진혜.”
“예?”
“초사와 비마대를 부탁하지.”
짧게 말한 소청이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혁련휘가 그 뒤를 따라갔다.
마을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중심으로 들어가자 곳곳에 백의에 용이 수놓인 도포를 걸친 무인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곤륜파…….’
그들은 길목이 아니라 뒤에서 나타난 이들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청이 온 방향에는 길이 없었다.
그저 만장단애의 절벽만이 있을 뿐이었다.
설마?
그 높은 절벽을 기어올라 왔단 말인가?
쉽지 않은 이들이었다.
웬만한 경공으로는 턱도 없을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 옅은 긴장감이 생겼다.
다가서는 소청을 향해 그들이 용문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저쪽에 많이 몰려 있군.”
소청이 한곳의 주루를 가리켰다.
“이러면 내 술은 날아간 건가?”
적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혁련휘가 농을 하고 있었다.
곤륜의 무인들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었다.
“술은 어디 안 가. 손님이 찾아온 듯하니 함께 마셔 보지.”
“자네도 마실 참인가?”
“글쎄. 손님의 의도에 따라 다르겠지.”
소청과 혁련휘가 마치 중원 유람이라도 나온 듯이 여유롭게 행동하는 모습에 무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짙은 기세를 뿌리며 압박하고 있었지만 무인들은 소청과 혁련휘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소청과 혁련휘가 향하고자 하는 길이 아닌 그들이 지정한 길이었다.
소청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길을 걸었다.
제법 큰 주루 안으로 들어서자 안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다섯 명의 무인이 중앙에 탁자 하나를 놓고 앉아 있었다.
장문인의 명에 의해 소청을 맞이하러 온 곤륜오검이었다.
“귀하가 진혼창인가?”
그들 중 옥허라는 도명을 가진 중년 검수가 대뜸 소청을 향해 물었다.
“소식이 늦다 들었는데? 꽤 빠르군.”
소청이 피식 웃으며 의자 하나를 들고 그들의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어이, 여기 서역에서 온 술을 좀 내와.”
소청의 곁에 앉은 혁련휘의 말에 곤륜오검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이자가 감히…….’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곤륜오검이라고 하네.”
“알아야 하는 이름인가?”
소청이 피식 웃자 곤륜오검의 얼굴이 모조리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 이름이 중원을 울린다고는 하나 약관의 젊은이에 불과했다.
이미 한 대를 살아온 그들의 이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의도를 확인하기 전에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군!”
참지 못한 옥상의 손이 소청을 향해 뻗어졌다.
탁.
우두둑!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
곤륜이 자랑하는 금나수였다.
빠름보다는 변화가 뛰어나 쉽게 피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 시전자가 곤륜오검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소청이 대번에 손목을 잡고 꺾어 버렸다.
“끄아악!”
옥상의 비명이 터져 나오자 곤륜오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쯧, 인사가 거칠군.”
소청의 몸에서 짙은 기세가 뻗어 나와 객점 안을 가득 채웠다.
“한데 변절한 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