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5화
84화. 서천맹(西天盟)
가주전에는 진가신 이외에 또 한 사람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은장소.’
은소혜와 은승혜의 아버지이자 중원 십 대 상단의 하나인 은가 상단의 주인이었다.
은장소는 무척이나 특이한 느낌이었다.
본디 상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은 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관찰이라는 것을 한다.
자신이 우위에 서기 위해 상대의 모든 것들을 빠르게 눈에 담고 머릿속에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 세워지면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대화 또한 날카롭게 이어진다.
특히나 중원 십 대 상단을 이끄는 은장소라면 그런 기질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어야 했다.
한데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고고한 학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상인들과는 다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느낌이군.’
좋은 느낌이었다.
소강의 장인이 될 사람이니 더없이 좋았다.
“혼사에 대한 문제는 끝났으나 내 정천의 영웅을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머무르고 있었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가요?”
“응? 제갈 군사께서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셨는가?”
“…….”
소청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허, 난 또 나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
“제갈 군사와 원래부터 아는 사이셨습니까?”
“오래되었네. 하긴 이제는 비밀이랄 것도 없겠군. 묵영단을 만드는 자금을 지원한 것이 바로 나일세.”
소청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묵영단을 만드는 데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갔으리라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중원 십 대 상단 중 하나가 끼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연분만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은소혜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면 떼를 쓴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헛헛, 어디 혼사가 연분만으로 된다던가? 나는 상인일세. 결혼마저도 장사의 일환이지.”
“소강과의 혼사가 이해관계에 부합되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맞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지. 표국과 상단은 불가분의 관계일세. 더욱이 중원에서 가장 ‘안전한’ 표국을 가진 가문이자 운남과의 거래를 독점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관계까지 좋으니 금상첨화로군요.”
“헛헛. 내 마음을 잘 알고 있구먼. 이리 찾아와 진가를 내 눈에 담았으니 마음이 놓이던 참이네.”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가문과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진가가 더욱 탄탄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은장소의 목적이 그 하나뿐은 아닌 듯했다.
그 때문이라면 굳이 자신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찾아오신 것이 혼첩 때문만은 아닌듯 합니다만?”
소청이 빙긋이 웃자 은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제갈 군사의 부탁이 있었네.”
“어떤 부탁입니까?”
“서천맹일세.”
은장소는 제갈휘문의 말을 전했다.
회룡협 전투 당시, 방유현이 정천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이기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산된 힘.
만약 그들이 포섭했던 세력이 결집된 힘을 보여 주었다면 아무리 오존과 소림, 무당, 화산이 나섰다고 해도 그리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이는 역으로 만약 마천이 정천을 공격해 왔을 때도 문제가 된다.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하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해서 그는 이미 소청과 관련된 운남, 사천의 청성과 아미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서천맹이라…….”
“제갈 군사께서는 나에게 서천맹을 건립하는 자금을 지원해 주기를 바랐네. 이미 십 대 상가의 두 곳과도 뜻을 모았지.”
“설마 진가를 거점으로 삼을 생각입니까?”
“음, 그랬으면 좋겠지만 자네가 바라지 않을 것 같군.”
“뜻을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해서 당가타를 매입해 볼까 생각 중이네.”
진가와의 혈전으로 무너진 당가타.
이제는 나이 어린 혈족과 방계의 가족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 규모로 보았을 때 서천맹을 건립하는 데 그만한 장소는 없었다.
“반발이 심할 터인데요?”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는 일이네.”
“하면 그리하시면 될 일인데 어찌 저를 찾으셨습니까?”
“응? 자네가 서천맹주로 결정된 사항을 모르는 것인가? 이미 청성과 아미에 배첩이 전해졌으니 장문인들께서 곧 오실 터인데?”
‘제갈휘문 이자가…….’
소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갈휘문은 소청에게 곤륜의 일을 처리해 달라며 혼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진가로 돌아오게 했다.
그때 이미 ‘서천맹’에 대해 결론이 내려진 뒤였을 것이다.
소청에게 서천맹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 자리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아마도 은장소를 통해 뒤늦게 뜻을 전한 것은 거절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기 위함인 듯했다.
소청이 진가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바라는 눈빛.
열망이 가득했다.
서천맹주가 되고 사천의 모든 힘이 하나로 결집된다면 진가의 이름은 중원 전체에 퍼지게 된다.
가히 천하제일가라 할 만했다.
원래 욕심이 없는 진가신이지만 어찌 ‘천하제일가’의 이름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사천 간양 땅의 작은 가문이 천하제일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천맹주가 되면 조직을 탄탄히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소청은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마천의 대공이라던 구자겸.
그는 강했다.
그와 다시 만난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었으니 서둘러 단련을 해 놓아야 했다.
마지막의 한 수 천뢰충파에 하나의 기운을 더했던.
‘삼태극…….’
삼태극을 이루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구자겸뿐 아니었다.
그의 위에 있는 마종이라는 자는 얼마나 더 대단할지 몰랐다.
“잘못 찾아오셨군요. 저는 그런 자리를 승낙한 적이 없습니다.”
“뭣!”
“뭐?”
진가신과 은장소가 동시에 의아함을 토해 내었다.
누구는 그런 자리에 앉고 싶어 정천까지 팔아넘기는 마당에…….
“서천맹을 만드는 것에는 찬성입니다. 옳은 결정입니다. 곤륜을 다시 포섭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수장을 제가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되네. 이미 정천맹의 수뇌들이 결정을 내린 사항이네.”
“그건 그들의 뜻이지 제 뜻이 아닙니다.”
“…….”
소청은 서천맹주 따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맹주 위는 무공이 강하다 해서 앉을 수는 없습니다.”
“무공뿐이 아니네. 이미 자네를 사천의 무인들이 따르고 있고 운남의 대족장마저 자네를 따르지 않는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그만한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소청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라. 무림을 위한 일이 아니더냐?”
진가신마저 설득하려 했지만 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 문제는 모든 문파의 주인들이 모여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곤륜으로 떠나야 합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릅니다.”
소청이 완강하게 거절을 뜻을 표하자 은장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자네의 뜻이 그러하니 내 일단은 제갈 군사와 서천맹에 속하게 된 장문인들게 전하도록 하지.”
“예. 부탁드립니다.”
진가신은 멍하니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좋은 자리를…….
하지만 소청의 고집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이미 소가주의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차차 설득해야 했다.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 운남의 대족장과 자신까지 뜻을 모아 설득한다면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천맹주라는 자리는 아무리 욕심이 없는 진가신이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휴우……. 하면 곤륜으로는 언제 떠날 생각이냐.”
“소강이의 수련이 마무리되면 떠날 생각입니다. 제 예상으로는 이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수련을 하고 있더냐?”
“예. 며칠 되었습니다. 앞으로 진가의 이름을 드높여야 할 녀석이니 더 강해져야지요.”
진가신은 ‘서천 맹주직을 수락하면 이름 알리는 것은 금방이다.’라며 소청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래, 소강이는 어떠하더냐? 백대 고수의 경지는 되겠더냐?”
진가신이 생각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현재 소청을 제외하면 사천 땅에는 백대 고수라고 해 봐야 멸절사태뿐이었다.
또한 소청을 빼면 중원에 이름 내기도 부끄러운 전력을 가진 진가였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데 소청이 제 아비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긴, 아버님이 보시기에는…….’
백대 고수는커녕 사천에서 이름도 얻지 못했던 진가신이었다.
소강의 무공의 경지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는 무인으로서의 자질보다는 가문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인이 아니었다면 명망 높은 학사가 되셨을 테지.’
소청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 소강이 백대 고수의 경지를 넘은 지는 꽤 되었습니다.”
“…….”
진가신이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소청의 말에 눈만 끔벅거렸다.
“아마 이번 수련이 끝나면 오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턱밑은 될 듯합니다.”
“…….”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마 소청이 아닌 자가 말했다면 미친 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허, 그런? 대단하군요.”
감탄은 은장소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가문에서, 그것도 형제가 그리 대단한 경지를 이룩하다니. 형은 오존을 넘었다 평해지고 동생이 바로 뒤를 쫓고 있으니 가문의 경사가 아닙니까?”
“…….”
여전히 진가신은 말을 하지 못했다.
“진 가주님, 진 가주님?”
“예? 예?”
“못 들으신 겝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감축드립니다. 어찌 아들 둘을 그리 대단하게 키워 내셨단 말입니까? 이거 중원에 소문이 나면 곳곳에서 배우러들 오겠습니다그려. 헛헛헛.”
“아 뭐…….”
반쯤 농이 담긴 은장소의 말에도 진가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콰아아앙!
진가의 건물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고 서가의 책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렸다.
이만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현재 진가에 셋뿐이었다.
혁련휘, 모자겸.
그리고 태극을 이룬 소강.
‘벌써? 휘가 뛰어난 건가? 아니면 소강이가?’
소청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이냐?”
“소강이 단계를 뛰어넘은 모양입니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 * *
“허억, 허억.”
소강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기운이 움직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소청이 말했던 태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전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고 손바닥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허한 기분이 들었고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무장을 깔았던 청석이 모조리 터져 나갔고 충격파에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놈 자식…….”
만경창파를 갈라 버린 태극의 기운을 막아 내느라 붕산진곤의 초식까지 써야 했던 혁련휘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진무월창의 무인들과 진가성은 다가서지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닷새.
밥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수련에 할애했다.
소청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혁련휘 역시 수련이 필요했기에 더없이 몰아붙였다.
매일 죽음으로 몰고 갔고 매일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익숙해질 만하면 기운을 더해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났다.
소청이 사용했던 천뢰충파의 기운, 위력을 비교할 순 없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한 수였다.
“이건 뭐, 둘 다 천재였던 거야?”
혁련휘가 짜증을 내었다.
소강은 더 이상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이루었으니 더 이상 비무를 할 필요도 없었다.
“우웩!”
소강이 갑자기 엎드리더니 검붉은 핏덩이를 게워 내기 시작했다.
“소강아!”
막 대연무장에 도착했던 진가신이 달려와 소강을 안아 들었고 입만 벌리고 있던 진가성과 진무월창의 무인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아, 가, 가주님. 이건 제가 한 것이…….”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린 혁련휘가 당황하며 말을 하려는데 소청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수고했네. 모두가 자네 덕분이야.”
“…….”
소청은 혁련휘를 향해 웃어 주고 소강을 향해 다가갔다.
“혀, 형님…….”
“그 느낌을 기억해라. 쉽게 되진 않을 것이나 한번 해 보았으니 다시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
“축하한다. 소강.”
소청의 웃음에 소강이 따라 웃었다.
진가의 사람들은 그저 영문을 몰라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