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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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3화
82화. 우진혜의 심문
그렇게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어찌할 생각입니까?”
우진혜가 물었다.
“고된 훈련을 받은 자일 테니 쉽게 말하지 않을 텐데요.”
“그렇겠지. 독단을 깨물어 스스로 자결할 정도였으니까.”
“제가 해 볼까요?”
“그대가?”
“예.”
소청이 못 미더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우진혜는 말없이 일어나 녹의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품속의 작은 보자기에서 대침을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녹의인의 몸에 박아 넣었다.
“끄으으…….”
열 개나 되는 대침이 모습을 감추었을 때 녹의인이 깨어났다.
“방금 기혈을 막기 위해 열 개의 대침을 그대의 몸에 꽂았습니다.”
“…….”
“사람의 몸에는 총 서른여섯 개의 사혈(死血)이 있습니다.”
“뭐 하는 짓이지?”
녹의인이 핏발이 선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우진혜는 담담히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생각입니다.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사혈에 하나씩 침을 꽂을 참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푸욱!
“끄아아악!”
우진혜는 차분하게 침을 꽂아 넣었고 녹의인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하나의 침이 꽂힐 때마다 두 배씩 고통이 더해질 겁니다. 기의 흐름을 막았으니 죽으려 해도 죽을 수도 없지요.”
“이런 개 같은 년!”
푸욱!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끄아아악!”
다섯 개의 대침이 몸속을 파고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녹의인은 게거품을 물었고 핏줄이 돋아 오른 모습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그대는 누구죠?”
“도, 독혈보. 제일 대 소속 경천우다.”
“…….”
푸욱!
“끄아악!”
“대답할 준비가 안 되었군요. 전 예의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만.”
잔잔하게 울리듯 말하는 우진혜의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상대가 온몸을 비틀어 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거기!”
우진혜가 바라보자 초사와 비마대가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 잡아 주실래요? 심하게 움직여서 침을 꽂기가 힘드네요.”
“…….”
초사와 비마대가 서둘러 뛰어 녹의인 경천우의 사지를 잡아 눌렀다.
“자, 다시 시작해 보죠. 현재 중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그대들의 짓인가요?”
“그……렇습니다.”
“어째서?”
“저, 정천에 숨어든 환영곡…… 환영곡을 말살하기 위해서 입니다.”
“환영곡의 세작들?”
녹의인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요?”
“부끄럽게도…… 환마님이 죽은 이후 숨었습니다. 수치스럽게도 복수 따위는 잊고…….”
“잘했어요.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
“아까의 괴인들, 몇이나 더 있죠?”
“모릅니다. 극비 사항이라…….”
푸욱!
“끄아악!”
질문의 답이 막히면 어김없이 침이 놓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좋아요, 질문을 바꾸죠. 마천의 거처는 어디인가요?”
“거처 따윈 없습니다.”
“새외 무림이 마천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새외는 그저 우리에게 복속된 세력일 뿐. 굳이 거처라고 한다면 마종이 있는 곳이 곧 마천입니다.”
순간 소청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럼 마종은 어디에 있나요?”
“모릅니다. 그분의 거처는 오직 세주들과 두 대공만이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넘어가죠. 그럼 마천이 중원 정벌을 계획하고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요?”
“그건…….”
푸욱.
단호했다.
대답이 멈추는 순간 우진혜는 사정없이 대침을 박아 넣었다.
“끄아…….”
그 순간 녹의인이 발작하듯이 떨어 대다가 눈을 까뒤집고 늘어져 버렸다.
“주, 죽었습니다.”
초사가 다급히 말했다.
심장이 뛰질 않았다.
“아깝네요. 훈련이 잘된 자들인 듯해 오래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진혜가 아무렇지도 않게 녹의인의 몸에서 대침을 빼 천에 닦고는 품에 갈무리했다.
“…….”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소청을 바라보았다.
“한 명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태연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눈만 끔벅거렸다.
“고문에 익숙하군.”
소청의 말에 우진혜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예. 하지만 아직 스승님만큼은 되지 못했습니다. 주로 적의 세작이나…….”
그녀가 초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인의 처소를 침범하는 자를 잡았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
초사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하게 느껴졌다.
“초사.”
“예. 패월.”
“품을 뒤져라.”
명을 받은 초사가 녹의인의 품을 뒤져 색이 다른 약병 두 개를 꺼냈다.
“화혈독과 해독약일 것이다. 제갈휘문에게 보내라. 후에 요긴하게 사용될 테니까.”
“예.”
또한 우철과 무흔조를 불러 시체를 처리하도록 명한 소청이 우진혜를 바라보았다.
“내용을 들었으니 해야 할 일은 알겠지?”
우진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여인이니 알아서 잘할 것이다.
살해된 자들과 비슷한 환경에 놓여 있거나, 그들과 관계된 자들을 조사하다 보면 환영곡의 세작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어디로 갈 건가?”
“어디라니?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지.”
“저들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죽어야 할 자들이니 죽어도 상관없고.”
소청의 대답에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청.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응?”
“후에 둘이 있을 때.”
“…….”
혁련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청은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물으려 하는 것인지 대충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소청은 그가 묻는다면 충분히 대답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게 뭐든…….’
소청은 한숨을 내쉬며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 * *
소청 일행은 의창을 떠나 나흘이 지나서야 사천의 간양에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인지 그들은 먼지를 가득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워!”
정문에 도착한 소청이 말고삐를 당겼다.
진가의 정문은 언제나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거대한 정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편액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소청의 눈에 아련함이 어렸다.
월무진가(月武陳家).
값싼 송판을 조각도로 파내 만든 편액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진가의 모든 것이 변했다.
규모는 이전보다 더욱 거대해졌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소청이 ‘진혼창’이라는 명호를 얻었을 때 이후로 지어졌다.
하지만 정문에 걸린 편액만은 변하지 않았다.
진가가 간양에 뿌리를 내렸을 때 남보다 못했고 남의 아래 있었던 그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는 마천에 협력해 제 가문을 키우려 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타인을 핍박했다.
하지만 진가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모두에게 존경을 받으며…….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이었군. 가문이 커지면서 참 많은 유혹이 있었을 터인데…….’
소청은 진가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깐깐하기는 했지만 꽤나 올곧은 사람이었고 전통을 지켜 가고자 했지만 자신의 변화를 지지해 주었다.
“누구요?”
한 떼의 인마가 정문 앞에 서 있으니 대비를 들고 청소를 하던 왕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소청의 눈에 반가움이 어렸다.
먼지를 막기 위해 가려 둔 천을 걷어 내자 왕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공자님!”
“왕칠 아저씨 잘 지내셨죠?”
“암요, 암요.”
왕칠이 말에서 내린 소청을 끌어안았다.
“헛헛, 헌헌대장부가 되어서 돌아오셨네요.”
“아저씨는 수척해지셨네요.”
“걱정 마십시오. 늙어 그렇지 아직 대공자님 수발들 정도는 됩니다.”
왕칠이 눈물을 닦으며 제 팔에 힘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버님은?”
“아, 내 정신 좀 보게. 들어가시지요. 제가 서둘러 기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사람들을 불러 말들을 돌봐 주세요. 아버님껜 제가 직접 찾아가죠.”
왕칠에게 말고삐를 건넨 소청이 무관을 지나 진가의 본전각으로 다가갔다.
진가의 본전각 가주전.
진가신은 모두를 물리고 소청과 독대를 하고 앉았다.
그의 탁자에는 여전히 서류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시키지 않고 여전히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랫것들을 시키지 않으시고요.”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래. 영 돌아온 참이냐?”
“아닙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냐.”
진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강의 혼첩이 들어왔다.”
“예. 잘된 일입니다. 표국과 상가의 결합만큼 좋은 일이 없지요. 더욱이 당사자들이 저리 좋아하는데…….”
소청이 소강과 소혜를 보며 웃었다.
“그래, 잘된 일이지. 너는 어쩔 생각이냐?”
“곤륜으로 갈 생각입니다.”
“…….”
소청의 대답에 진가신이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지?”
“내가 그걸 물은 것이 아님을 알지 않느냐?”
“예? 그럼 무얼?”
“…….”
진가신은 자신의 큰아들이 참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전 중원이 인정할 터였다.
한 가지만 빼면…….
“동생이 장가를 간다는데 느낀 것이 없는 게냐?”
“축하해야지요. 해서 이리 왔지 않습니까.”
“하아…….”
진가신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동생이 간다는데 한 집안의 장자가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예?”
“네가 장가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소청은 진가신을 잠시 바라보다 웃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버님, 저도 진가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들어 알고 계시겠지요? 마천에 대해……. 해서 아직은 어느 곳에 매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음…….”
소청이 무거운 주제를 꺼내자 또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았다.
“곤륜으로 가는 것도 그 때문이냐?”
“예.”
“후우…… 어찌 나는 내 아들을 정천에 빼앗겨 버린 것만 같구나.”
“바라시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쯧, 네 덕에 진가의 위상이 하늘을 찌른다만 나는 걱정이구나.”
“걱정하실 정도로 못나지 않았습니다.”
“녀석,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들었다.”
“중한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진가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 진가는 더욱 발전해야 합니다. 저로 인해 어쩌면 저들의 목표가 될지도 모릅니다.”
“안다. 이미 각오하고 있는 사실이고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진가는 더 발전해야 했다.
이전과 같은 위협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턱.
진가신이 바닥에서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꺼내 보거라.”
상자를 열자 단창이 나왔다.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창과 같은 모양의 단창이었다.
“소강에게 들었다. 창이 부서졌다 하더구나.”
“…….”
“가져가거라. 지금의 너에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창날에 월문이 새겨진 단창.
전체가 검은빛을 띠는 것을 보니 만년한철이 분명했다.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 터이고 꽤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 보였다.
아비의 마음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혈잠의 보포가 있으니 더 이상 창은 필요 없었지만 소청은 두 손으로 꺼내 갈무리했다.
“소중히 쓰겠습니다.”
“흠흠. 나가 보거라. 소진각에 술을 동이째 준비해 두었다. 모쪼록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친우들과 쉬도록 해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