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80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80화
79화. 살인 사건
형문산(荊門山) 자락.
남향의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이십여 채의 초가들이 자리를 잡은 작은 마을이 있었다.
주로 사냥으로 피혁을 모아 팔거나 형문산에 자리 잡은 문파에 물건을 대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었다.
그 마을 중앙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 촌장 고본서의 집이었다.
그곳에 들어온 지는 십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늦은 밤.
고본서는 초조한 표정으로 문밖에서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놈아! 네 어미를 죽일 참이냐!’
고본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는 사이 방에서는 여인의 용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조금만 더! 머리가 보여요!”
“으으으……!”
“좀 더요!”
산고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여인과 산파의 목소리가 벽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고본서는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울 일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본디 생명이 태어남에 여인의 살과 근육을 찢어 놓는다 했으니 그 고통이야 당해 본 자만 알 터였다.
“아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두어 개의 화로를 숯으로 가득 채운 방은 훈훈하다 못해 땀이 줄줄 흘렀지만 산파는 끈질기게 여인의 다리를 벌렸다.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천장에 묶인 천을 잡아당기며 무릎을 모아 힘써도 모자랄 판에 부끄럽게 다리를 벌리고 있으니 제대로 힘이 들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해내야만 했다.
모성애라는 것은 그런 고통 속에서 탄생했기에 질기고 아름다운 법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가 흐르고 온몸의 뼈마디가 잘게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여인은 해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옵니다! 나와요!”
짜악!
어느 순간 산파가 기쁨에 물든 표정으로 피투성이로 쑥 빠진 아기의 볼기짝을 있는 힘껏 때렸다.
“으아아앙!”
볼기짝을 얻어맞고 자지러지게 울어 대는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찌 되었느냐!”
고본서가 참지 못하고 달뜬 표정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촌장 어른! 아들입니다.”
“…….”
자식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하지만 고본서의 기쁜 얼굴에 한 줄기 어둠이 서려 있었다.
‘아들……. 내 아들…….’
산파는 아이를 고본서의 품에 안겨 주고 더운물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고본서가 힘겹게 눈을 뜬 여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는 여인의 곁에 아이를 안겨 주던 고본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밖이 너무도 조용했다.
벌컥.
방문이 활짝 열리고 찬 바람이 확 하고 몰아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쓸려 들어오는 죽음의 냄새…….
죽었다.
더운물을 담아 오던 산파가 시커먼 피를 토해 내며 쓰러져 있었고 일하던 시비들이 곳곳에 죽어 있었다.
“서, 설마…….”
멀리 담벼락 인근에서 녹의의 사내가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너, 너는…….”
“아이를 낳았군.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틈에서 살기로 결정했는가?”
“…….”
고본서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벽 한편에 세워진 몽둥이를 잡아 갔다.
“상공,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안은 여인이 반쯤 몸을 세우고 힘 빠진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보지 마라! 절대…….”
다급히 외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인물의 손이 여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상공…….”
여인은 부릅뜬 눈으로 피를 토해 내며 고개를 꺾었다.
“이, 이놈!”
고본서의 몸에서 매서운 살기가 폭발하듯이 쏘아졌고 손에 든 몽둥이에서 강맹한 검기가 뿌려졌다.
까가가강!
하지만 그의 검기는 제 여인의 가슴을 뚫어 버린 괴인을 조금도 상하지 못하게 했다.
“쯧, 나를 보았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지.”
밖에 있던 녹의인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마종께서 명을 내리셨다. 주인의 죽음에 꼬리를 말고 숨은 놈들을 죽여 본을 보이라고.”
녹의인은 죽어 버린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를 빼냈다.
“으아아앙!”
경기를 일으키듯이 아이가 울었다.
털썩.
그리고 고본서의 앞에 아이를 던져 놓았다.
“직접 죽여라. 마천의 명예를 더럽힌 네놈이지만 고통 없이 죽여 주마.”
“…….”
아비에게 자식을 죽이라 했다.
고본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독마 북궁려강의 수하.
그리고 여인을 죽인 것은 저주받은 실혼독인…….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사신이었다.
고본서는 환영곡의 세작이었다.
신분을 위장해 호북성 서측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이 그를 변하게 했다.
가족이 생겼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생겼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환마가 죽고 회룡협에서 패했을 때 그는 결정을 내렸다.
마천은 실패를 용서하지 않는다.
돌아가면 죽을 뿐이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사람들 틈에 숨으면 과거를 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남은 환영곡의 인물들이 모두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던 모양이다.
“쯧, 버러지 같은 놈.”
머뭇거리는 고본서의 모습에 녹의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핏!
한 줄기 지풍이 날아들었고 바닥에 있던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막 눈을 뜬 자식은 세상에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개 같은 피의 율법.
“으아아아!”
피눈물을 흘리는 고본서의 몸에 역천의 힘이 어리고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츠츠츠.
뿜어진 마기가 아이의 몸을 집어삼키고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죽여.”
녹의인의 한마디.
퍼억!
실혼독인의 한 수에 고본서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허연 뇌수가 바닥에 뿌려졌다.
녹의인은 싸늘한 눈으로 참상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인근에서 기다린다. 분명 놈과 연결된 또 다른 환영곡의 무인이 있을 것이다.”
* * *
“끄아아악!”
초사는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서릿발을 풀풀 날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진혜의 모습은 마치 흉신악살 같았다.
피 떡이 되어 버린 초사의 멱살을 끌고 뱃전으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뱃전의 사람들이 모조리 고개를 돌렸다.
“변태 같은 자식! 감히!”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팠다.
실수였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녀의 객실까지 숨어든 것은 좋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부신 쇄골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달뜬 숨을 내쉬었고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휙, 털썩.
우진혜는 혁련휘와 뱃전에 앉아 술을 마시던 소청에게 초사를 집어 던졌다.
“…….”
땅바닥을 기고 있는 초사를 바라보던 소청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도와 달라는 눈빛.
하지만 소청은 피식 웃었고, 초사는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 절망했다.
멍청한 놈.
그리고 소청이 초사를 걷어차 버렸다.
풍덩!
물에 빠져 힘없이 가라앉는 모습에 눈치를 보던 비마대의 무인들이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설명 좀 해 주실까요?”
한기를 풀풀 날리며 노려보는 우진혜를 향해 소청이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는 일이야.”
“이자가 진짜!”
뻔뻔스러운 소청의 발뺌이 그녀를 더욱 열받게 했다.
진가로 돌아가기 위해 무한에서 배에 오른 그들은 장강을 따라 사천을 향해 출발했다.
홍호(洪湖)를 지나 형주(荊州)까지 오면서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줄곧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청의 수하들이었다.
“당신이 모른다는 게! 말이……!”
우진혜가 도끼눈을 뜨고 허리께의 연검에 손을 가져갔다.
시킨 게 분명하다.
“열 내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뭐요?”
“누가 찾아온 거 아냐?”
“…….”
우진혜의 매서웠던 눈이 찌푸려졌다.
객실로 가는 문 앞에 익숙한 모습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하오문의 전령이었다.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소청을 노려보던 우진혜가 싸늘하게 말했다.
“꼭 다시 설명을 해 줘야 할 거예요.”
그녀가 몸을 돌려 객실로 돌아가 버리자 혁련휘가 은근슬쩍 물었다.
“왜 그랬나?”
“모른다니까!”
“자네가 심했네. 굳이 그렇게까지 은신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내 쪽이…….”
“시끄러! 단계가 있는 거야!”
“역시 자네가 지시한 게 맞군.”
혁련휘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씨…….’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우진혜의 이목을 속이고 나면 다음은 혁련휘였다.
그 정도로 은신술이 성장하면 살수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멍청하게 들켜 버렸다.
어깨선이 살짝 드러난 흐트러진 옷차림.
우진혜가 저 정도로 화내는 걸 보면 필시 속살을 보고 놀라서 기척을 드러낸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멀었군.’
소청이 막 초사를 건져 뱃전으로 올라오는 비마대를 향해 걸어갔다.
“들켰네?”
사악하게 웃는 소청의 모습에 초사와 비마대는 하늘이 노래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뭐죠?”
우진혜는 전령이 들고 온 서류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근자에 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 사건입니다.”
“살인?”
하루에도 서너 번의 살인이 일어나는 것이 무림이다.
그럼에도 직접 보고를 하러 왔다는 것은 필시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왔다는 것은 ‘마천’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살인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문주께선 무어라 하시던가요?”
“진 공자와 의논해 보라 하셨습니다.”
“…….”
서류를 살피던 우진혜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오늘은 딱히 그와 대화는커녕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독이군요.”
“예. 열두 건의 살인이 있었고 현장에서 미약하게 독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모두가 십 년, 혹은 삼 년 이내에 그 마을에 정착한 자들이었다.
또한 모두가 정천맹 예하의 중소 방파, 혹은 대문파의 인근에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죽은 자들이 인근 문파들과 제법 왕래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흉수는 알 수 없었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꽤나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아직은 무어라 단정할 수준이 아니군요.”
“예.”
“알겠어요. 계속 조사해 주세요.”
“예.”
전령을 돌려보낸 우진혜는 서류를 갈무리해 소청을 찾았다.
초사와 비마대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객실을 나가기도 전에 들려왔다.
그에게 묻고도 듣고도 싶지 않았지만 일단은 물어보아야 했다.
마천에 대한 정보는 그가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
우진혜가 다가서는 사이 배가 의창나루로 정박하기 위해 다가서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지?”
혁련휘가 나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인들이 나루의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고 언뜻언뜻 무인들이 보였다.
배가 정박하자 검문을 마친 사람들이 뱃전으로 올라오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거참 다 죽었다지?”
“그래. 애고 어른이고……. 갓 태어난 애도 죽었다는구먼.”
“말세야 말세.”
순간 우진혜의 미간이 좁아졌다.
‘살인?’
막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질 않았다.
“여기서 잠시 내려야겠습니다.”
“내려?”
“예.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어서…….”
“…….”
우진혜는 소청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혁련휘에게 고했다.
“같이 가 보지.”
소청의 말에 우진혜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시든가요.”
매몰차게 고개를 돌린 우진혜가 배에서 뛰어내리자 소청과 혁련휘가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뱃전의 소문을 종합해 본 우진혜의 표정은 싸늘했다.
‘살인. 똑같다. 형문파를 드나드는 인물이 죽었다.’
전령이 보고한 이들과 비슷한 점이 많은 살인이었다.
‘흉수의 정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을 조사해 봐야 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형문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형문산 자락.
사건이 있었던 곳은 관인이 지키고 있었고 형문파의 무인들이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모여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십여 가구에 살고 있던 이들은 모조리 죽었다 했으니까.
다행히 소청이 청초각의 표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형문파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