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79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79화
78화. 부탁
얼굴을 찡그리고 귀를 파던 소청이 짜증스럽게 일어나자 수련을 멈춘 혁련휘도, 서책을 보던 우진혜도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신경 쓰지 마. 집중이 안 돼서 그런 거니까.”
그 말에 둘 다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무슨 소 닭 보듯 했다.
사도련의 소련주 혁련휘, 하오문의 후계자 우진혜.
그리고 정천의 영웅 패월 진소청.
일개 표국의 분점에 함께 있기 힘든 조합이 기묘한 동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쳇!’
소청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다가 기감을 스치는 느낌에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순간.
아무것도 없던 나무 기둥의 한편이 움찔거렸다.
“늦었어!”
핏!
순식간에 소청의 몸이 움직였고 움찔거림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뻐억!
빠바바바박!
“끄아아아악!”
세 사람이 동거하고 있는 와중에도 초사와 비마대의 수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도망가야겠죠?
-음……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저 여자, 우릴 보는데요?
장독과 그 옆의 소나무에 숨었던 초사와 은수가 구타(?)를 가장한 교육을 받고 있는 재선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우진혜가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젠장, 저 여인에게까지 걸린 걸 알면 우린…….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 오른 초사와 은수는 황급히 기척을 지우고 도망쳤다.
‘대단하군.’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우진혜는 장독대 근처에서 사라지는 초사와 은수의 모습에 속으로 꽤나 놀라고 있었다.
‘은신자들의 수준이 이리 높을 줄이야. 가히 본 문의 최상위 고수들에 비할 정도가 아닌가? 순간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들이 숨어 있는지도 몰랐을 터다.’
진가 표국의 분점.
그들과 함께 생활한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혁련휘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수련으로 보냈다.
혁련위는 앞으로 모셔야 할 주군이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그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소청이었다.
하오문에서 전해진 서책을 살피면서 소청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시작하는 내공 수련. 운기 중에 뿜어지는 기운이 소련주에 근접한다.’
놀라웠다.
기의 흐름이 가장 맑은 새벽에 내공 수련을 하는 것은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수련 후였다.
마치 내공이 없는 일반인처럼 보였다.
그만큼 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자라는 뜻이었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우리 같은 은신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딱히 초식을 수련하지는 않았다.
내공 수련은 하루 종일 이어졌고 간간히 그의 주변으로 다가서는 은신하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 심각한 구타를 자행했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하루의 반복.
‘은신술을 저렇게 훈련시킬 수도 있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자다.’
그녀의 시선이 집중된 사이 구타를 마친 소청이 거친 숨을 몰아내 쉬며 피 떡이 된 재선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근래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숨이 차네.”
그가 비마대원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은 ‘타혈사통(打血四通)’이라는 고매한 방법이었다.
물론 자신도 해 본 적은 없지만 필요한 혈도를 때려 기의 흐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했고 벌써 스무 명이 세 번째를 맞고 있었다.
소청의 사랑스러운 지도(?) 덕분에 초사와 비마대의 은신술은 엄청난 발전을 보였다.
‘이제 대충 기틀은 만들었네. 다음부터는 무공을 좀 가르쳐야겠는데. 제대로 된 건 어렵겠고 발달시킨 혈도의 흐름대로라면 살수의 무공을 가르치는 수밖에 없나?’
애초에 소청은 비마대를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 아니었다.
그들이 쉽게 죽지 않는 능력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다.
타혈사통의 효과도 한 몫을 했지만 소청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극도로 감각을 끌어 올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신을 따라다니자면 은신술만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강해져야 했다.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가장 빠르게…….
“내일부터는 하나씩 죽여야겠군. 안 죽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성과를 보이겠지.”
어차피 마천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면 정천맹과 사도련이 나서야 했다.
정천에는 오존이 있었고, 격체전이를 이룬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사도련에는…….
‘뭐 그쪽에는 원체 많으니까.’
피식 웃는 소청의 모습은 한 줄기 정신이 남아 있던 재선에게는 악귀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혁련휘와 가벼운 술자리를 끝낸 소청에게 초사가 찾아왔다.
“패월.”
“무슨 일이지?”
“군사께서 뵙고자 하신다 연락이 왔습니다.”
“알았다.”
“뫼실까요?”
“뫼신다고? 됐어. 하오문의 후계한테도 들키는 주제에 어딜 따라 오려고.”
소청의 비웃음에 초사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낮의 일이 생각났다.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비마대에 전해. 조만간 은신과 더불어서 또 다른 수련이 있을 것이라고.”
“예? 또 다른 수련이라 하시면?”
순간 낮에 의원에서 정신을 차린 재선이 발작하듯이 외친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놈씩 죽이겠다는.
“그건 알 것 없고 요 며칠은 따로 찾지 않을 테니까. 우진혜의 감각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 봐. 나흘 주지. 그녀가 방 안에 있을 때 뭐라도 훔쳐 나와.”
“나흘…….”
“성공 못 하면 알지?”
“…….”
사라지는 소청의 사악한 미소를 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 * *
정천맹 임시 청초각.
늦은 밤.
모두가 돌아간 뒤 제갈휘문은 홀로 남아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일 처리가 끝난 상태였지만 여전히 일거리는 쌓여 있었다.
“어?”
한참을 집중하던 제갈휘문이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허억!”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오랜만이네.”
“…….”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것인지 소청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하아, 무슨 귀신도 아니고 어찌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없군.’
제갈휘문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난리를 겪고도 여전히 개판이군. 무림맹의 총군사라는 자의 호위들이 이 모양이라니. 내가 살수였으면 벌써 죽었겠네.”
“자네가 뛰어난 걸세. 내가 펼쳐 놓은 경계진마저 뚫고 들어왔으니…….”
제갈휘문은 근래 밤에 혼자 남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나 경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적이 침입할까 우려한 제갈가에서 기관과 진식을 결합한 절진을 펼쳐 놓았다.
그런데 마치 제 앞마당을 걷듯이 숨어들어 와 있는 소청을 보니 속이 쓰렸다.
“안일하군. 벌써 경험해 보고도 몰라? 나는 물론 무황이 와도 쉽게 접근할 수 없어야 한단 말이야.”
“내심 더 강한 진법을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이네.”
“진법은 젠장, 호위의 수준을 높이란 말이야.”
소청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제갈휘문 주위에 자신이 훈련시킨 비마대 두엇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을 실패했으니 놈들이 제갈휘문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몸은 어떤가?”
“빨리도 물어보는군. 어쩐 일이야? 문병이 필요했으면 찾아와야지. 쓸데없이 부르기나 하고.”
“걱정은 되었으나 초사의 괜찮다는 보고가 있었기에, 그리고 요새 할 일이 너무 많다네.”
제갈휘문이 우는소리를 하며 말하는 것이 부탁할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할 말이 뭐야?”
“차라도 한잔할까?”
“할 말이나 빨리해.”
“…….”
소청의 말에 제갈휘문이 고개를 흔들며 찻잔 두 개를 꺼내 왔다.
“거처에 하오문의 후계가 와 있다고 하더군.”
소청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초사가 입이 싸군. 감시는 여전한 건가?”
“나무라지 말게. 그도 그의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알아.”
수긍을 하면서도 소청의 머릿속에 ‘요놈을 어떻게 조져 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어떻던가?”
“뛰어나. 정보력이든 능력이든. 개방보다는 은밀해.”
“사도련에도 오랫동안 제 모습을 숨겨 온 자들이니까.”
하오문의 은밀함과 정보력은 제갈휘문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뭐야?”
딱히 돌려 말할 이유가 없었다.
“두 가지네.”
“하나 정도만 예상했는데?”
“싸게 부릴 수야 있나?”
“누가 보면 사례금이라도 주는 줄 알겠네.”
소청의 이죽거림에 제갈휘문이 히죽거리며 찻잔을 내밀었다.
“풍황의 용정차네. 맛이 좋을 게야.”
“쳇, 근래에 그 차를 찾는 사람이 많군. 하지만 내가 예상하는 부탁이 맞는다면 이 정도로는 턱도 없는데?”
“뭐?”
“그런 게 있어. 어쨌든 한가롭게 차 마시러 온 거 아니니까 빨리 말해. 하나는 오대 무가에서 기른 무인들을 맡아 달라는 것이겠지?”
“잘 아는군.”
“그들이 따를까? 그 애송이들은 격체전이가 끝나면 제가 제일 잘난 줄 알 텐데?”
“그러니 자네에게 맡기는 걸세.”
“한둘쯤 죽여 놓아도 된단 말처럼 들리는군.”
“맡긴다는 건 그들의 생사여탈권까지 포함이네. 물론 자네가 더 강하다는 전제하에서겠지만.”
“당연한 소릴. 두 번째는?”
“곤륜이네.”
“곤륜?”
“그래. 종남은 화산에서 수습을 끝냈으니, 해남과 곤륜만 남았지.”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곤륜을 어찌해 줄까?”
“변절한 이유.”
“흠, 어려운 걸 시키는군. 무너뜨리는 것이 더 쉬운데…….”
소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당, 화산, 청성, 곤륜, 지금은 그 세만 남은 전진까지. 중원 오대 도문의 하나일세. 그만큼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지.”
“…….”
“곤륜은 오랫동안 중원의 변방을 수호해 온 곳이야. 그리 쉽게 변절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제갈휘문은 변절한 이유를 찾고 해결까지 해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을 끌어안을 생각이 분명했다.
“여전히 물러 빠졌어. 개방 장로들의 목을 베었다길래 좀 달라진 줄 알았더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들의 전력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수뇌가 죽었다고 해도 개방이 가진 정보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했고, 곤륜, 해남, 종남의 무력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대 무가를 끌어안은 것처럼 그들도 끌어안아야만 했다.
“한번 변절한 자들은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기 쉬운 법이야.”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네. 나는 마천이라는 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판단을 내려야 하네. 해서 정사 연합을 생각하고 있어.”
“저들을 끌어안으려는 것과 정사 연합이 무슨 상관이지?”
“말했지 않나. 연합이라고.”
“…….”
“비등하지 않으면 연합이 아니네. 복속이지.”
그의 말에 소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눈앞의 적, 마천.
잠재적인 적, 사도련.
눈앞의 적을 위해 연합해야 하지만 언젠간 다시 정사의 반목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마천이 무너져야 하겠지만…….
제갈휘문은 먼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쳤군. 마천이 그렇게 약한 줄 알아?”
“모든 역량을 다할 생각이네. 하지만 준비는 해 둬야지.”
“변절자들에게 한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뭐 좋아. 하지만 마천으로 인해 진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당신의 목을 베고 제갈세가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도록 해 주겠어.”
소청은 미소를 띠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제갈휘문은 무척이나 짧은 순간에 퍼졌던 짙은 살기가 온몸을 짓눌러 놓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명심하지. 언제나 각오하고 있다네.”
“좋아. 곤륜은…… 해결해 주지.”
“고맙네. 아,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는 게 좋겠네.”
“뭐?”
“은가장의 혼첩이 사천으로 향했네. 은가장주가 직접 예물을 들고 찾아갈 모양이더군.”
“…….”
“사흘 전에 떠났네.”
제갈휘문의 말에 소청이 피식 웃었다.
소강과 소혜.
예상은 했었지만 현실로 다가오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 보지.”
소청은 짧게 인사하고 청초각을 빠져나왔다.
* * *
진가 표국의 분점으로 향하는 길은 새벽안개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를 뚫고 누군가 걸어왔다.
“어이! 소청!”
“응?”
혁련휘였다.
옷은 온통 찢어지고 몸에 상처가 그득했다.
“무슨……. 설마 지금까지?”
“당연한 일을! 핫핫!”
검후와 비무를 하러 갔었다.
그리고 무려 여섯 시진이나 지났다.
그가 웃고 있었다.
맑은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즐거웠나 보군.”
“암! 고수와의 비무는 언제나 즐겁지.”
“이겼나?”
혁련휘가 대답 대신 아이 같은 표정을 하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런데 자넨 잠도 안 자고 이 새벽에 어쩐 일이야?”
“준비를 서둘러야 하거든.”
“준비?”
“그래. 집으로 돌아가려고.”
소청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