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14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14화
113화. 죽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진소청. 그가 나타났다.
장례까지 치른 그가…….
옥명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어린 사내였다.
그런데 자신의 앞을 막은 등은 태산보다 거대해 보였다.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흑발에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심장을 짓눌러 왔다.
“물러나라.”
그 광포한 기세를 마주하고도 소청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는…….”
옥명자는 검마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경고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소청은 몸을 돌리고 검마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대기가 바뀌었어?’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소름 끼치도록 세상을 짓누르던 마기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니 이, 이게 인간의…….’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도무지 비슷한 또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크으으…….”
역천의 힘으로 마인이 되어 버린 검마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아 놔. 이 새끼 정신 말짱할 때 조져야 되는데…….”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감히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그는 싸늘하게 웃으며 허리께의 창대를 손에 잡았다.
차차차착!
흩뿌려진다.
내뻗은 손에 쇠 갈리는 소리를 만든 단창이 길게 늘어났다.
“그래도 뭐, 이렇게 만났으니 다행이지. 안 그러냐?”
소청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내가 원래 그래. 은혜는 안 갚아도 원수는 확실하게 갚거든.”
스스스스!
검마를 향해 다가서는 소청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뻗어 나와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두둑.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크으윽.”
짓누르는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강제로 꿇려진 검마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그래, 그거야. 하지만 아직 부족해. 내가 아껴 마지않는 동생이거든.”
소청의 눈에 파란 불꽃이 일렁거렸고 단중의 화기가 단전에 더해졌다.
우우우웅!
두 개의 기운이 거칠게 회전하며 응축되며 울음을 만들어 내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마저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걸음마다 푸른 불꽃이 피어나고 창대마저 새파란 기운에 휩싸이는 순간 소청의 앞발이 뻗어 나가 대지를 짓밟았다.
꾸우우…….
휘둘러졌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움직이는 순간 창대는 이미 비틀어진 소청의 반대편에 멈춰져 있었고.
거대한 기운을 날 세워 머금은 푸른 선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 나갔다.
진(眞), 천뢰충파.
그리고.
갈라졌다.
스-아악.
일순간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푸른 선이 지평선처럼 세상의 경계를 선명하게 나누어 놓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나누어짐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흩어지며 합해졌다.
후우웅! 콰콰콰!
뒤늦게 시작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강물이 바닥을 드러내며 밀려 나갔다.
우두둑, 쿵, 쿠웅!
강 너머 숲을 이루었던 나무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져 대지를 두들겼다.
차자작.
소청은 창대를 집어넣었다.
“후우…….”
그리고 깊이 숨을 몰아쉬며 들끓는 내기를 가라앉혔다.
아직 천뢰충파의 힘을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었다.
쩌어…….
세상이 갈라진 순간 움직이지 못했던 검마의 몸에 생겨난 푸른 선을 경계로 불꽃이 확 하고 피어올랐다.
화르륵!
“끄아아악!”
푸른 불꽃은 검마의 몸뿐 아니라 그의 몸을 갉아먹던 마기마저 불태워 버렸다.
휘이이…….
검마의 깜박이는 눈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린 푸른 불꽃은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몸을 돌린 소청이 소강을 향해 걸었다.
옥명자는 소청이 자신을 지나쳐 소강에게 다가갈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요해졌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치열함 따위는 잊혀 버렸다.
방금 자신이 본 게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자신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뭐였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무력감과 두려움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러 왔다.
무(武)의 경계를 넘어 버린 듯한 그의 모습에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청은 운검자에게서 건네받은 소강의 몸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컥!”
소강이 검붉은 피를 토해 내었지만 창백했던 안색에 홍조가 떠올랐다.
“쯧,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물러섰어야지. 뭐 하러 목숨까지 걸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형님.”
소청의 핀잔에 소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형의 말은 걱정이자 질책이었다.
하지만 서둘러 서천맹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들의 본대가 서천맹으로 향했습니다.”
“알아.”
“예? 하면…….”
“바보 같은 녀석. 운기나 해라. 그 몸으로 뭘 하겠다고…….”
“……네.”
소청의 핀잔에 소강이 입을 다물었다.
좌정한 소강을 놓고 고개를 돌리자 옥명자와 화산의 검수들이 급히 인사를 건넸다.
옥명은 몰라도 운검자와 매화검수들은 소청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검존을 마기에서 구해 주었던 때도, 회룡협의 전투에서도 이미 그의 강함에 대해 익히 보았고 알았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지셨군요. 산에 갇히셨다 들었을 때만 해도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리 살아 돌아오시니 실로 무림의 홍복입니다.”
“별말씀을……. 모두의 덕분에 소강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이 공자 덕에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소청은 안면이 있던 운검자와 인사를 나누다 옥명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존 어르신의 전인인가?”
“예? 예.”
“그렇군. 검존께서도 후대를 준비하신 모양이군.”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에 대뜸 말을 놓는 소청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더욱이 방금 전 소청의 신위를 본 뒤였는데 나이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데 어째서 무인들의 수가 이것뿐이지?”
“아, 그것이…….”
옥명자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하! 황보인 그 개새끼가 그랬단 말이지? 그때 동정호에서 아작을 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이죽거리며 주먹을 움켜쥐는 소청의 모습에 옥명자가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검존으로부터 그에 대한 칭찬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진소강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올곧고 협의 넘치는 동생을 둔 형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정의와 협의로 똘똘 뭉친 반듯한 정천의 영웅. 그것이 상상 속의 진소청이었다.
옥명자는 그런 소청을 상상하며 자신의 표본으로 삼아야겠다 다짐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대한 그의 말투는 마치 시정잡배?
어찌 형제가 이리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덕분에 오대 무가가 전력으로 서천맹을…….”
“못 막아.”
“예?”
“지금쯤 무너졌을 거야. 살아 있기만 해도 다행이겠지.”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소청의 말에 옥명자는 묘한 반발심을 느끼고 한마디를 더 했다.
“아닙니다. 제갈 군사가…….”
“제갈 군사? 제갈휘문이 이곳에 와 있나?”
소청의 말에 옥명자의 눈이 찡그려졌다.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하나 정천맹을 이끄는 군사의 이름을…….
“예? 아니 대군사님이 아니라 제갈상아라고 새로이 서천맹의 군사가 된…….”
“제갈, 뭐?”
그딴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별 시답잖은 이름이군. 제갈휘문이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인데…….”
“아닙니다. 그녀는 많은 준비를 해 두고 있었습니다. 이곳만 해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문을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
“심계가 뛰어난 여인입니다. 분명 저들의 본대도 함정을 만나 당황했을 겁니다. 또한 서천맹에는 황보인을 비롯해 오대 무가의 후계들과 사천에 달하는 무인이 있으니…….”
“함정?”
소청이 피식 웃었다.
“그래, 황보인이 소강이나 그대보다 강한가?”
소청은 턱도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저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구자겸이라는 마천의 대공이거나 최악의 경우 마종이야.”
“구자……겸? 마종?”
“검마 정도 되는 자가 선봉대를 이끌어야 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다. 그런 자에게 함정이라고? 심계가 뛰어나면 무슨 소용이 있지?”
“예?”
“이봐, 착각하지 마. 그따위 함정, 계략은 일반적인 수준에게나 통하는 거야. 개미가 함정을 판다고 사람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짓밟으면 끝나는 거야.”
“…….”
“그리고 마천에는 검마 정도 되는 놈들은 널리고 널렸어. 근데 뭐? 황보인? 칼이나 한 번 제대로 휘둘렀으면 다행이지.”
물론 널리고 널리지는 않았다.
소청에 의해 이제 검마까지 모두 다섯이나 되는 세주가 죽었으니 여덟밖에 남지 않았다.
“자, 대충 소강의 운기도 끝났고 이곳을 정리하고 물러나지. 지금쯤이면 지원군이 근처까지 당도했을 테니까.”
물러난다고?
소청이 일어나자 멍한 표정을 지었던 옥명자가 정신을 차리고 따지듯이 말했다.
“물러나다니요. 그런 강한 자들이 공격했다면 더더욱 아군을 구하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뭐?”
옥명자의 말에 소청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뭐요?”
“질 게 뻔한 싸움인데 어째서 가야 하지?”
“그게 무슨…….”
옥명자는 도무지 소청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질 것이 뻔해도, 설사 칼날 아래 고혼이 된다 해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정의며 협의라고 생각했다.
“어찌 압니까? 질지 이길지는 직접 대면해 보고 칼을 맞대어 봐야 알 일입니다.”
소청이 옥명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퍼런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놈의 눈빛이…….’
의기는 넘쳐 났지만 도무지 소청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이봐, 옥명이라고 했지. 잘 들어. 정이고 협이고 그따위 건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한 거야.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어찌 아냐고?”
소청의 입가에 싸늘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한 번 져 봤으니까. 똥오줌 못 가리고 구자겸에게 덤볐다가 뒈질 뻔했지. 그런 구자겸조차 수하로 부리는 자가 마종이다.”
“…….”
졌다고?
이런 괴물이?
옥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가고 싶으면 가도 좋아. 말리진 않겠다.”
소청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소강, 움직일 수 있겠지?”
“예.”
“일단은 물러나 지원군과 합류한다.”
“알겠습니다.”
뭐?
소강마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항변이라도 할 줄 알았다.
당장 가서 서천맹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 반발이라도 할 줄 알았다.
‘내가 그를 잘못 본 것인가?’
옥명자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정천에 적을 둔 무인의 숙명이 아니던가?
소청의 말은 자신이 배워 온, 품어 온 의기와는 너무도 달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찌 동도의 위험을 외면하는가?
옥명자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고옹!”
멀리서 모자겸이 달려와 소청 앞에 엎드렸다.
“어흑흑, 사, 살아 계셨습니까?”
소청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모자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대족장.”
소청은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끌어안았고, 진무월창의 무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돌아온 소청을 반겼지만 옥명자는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그렇게 면양에서 물러났다.
* * *
면양에서 물러난 소청 일행은 간양으로 물러나 지원군과 합류했다.
신승이 백인회와 일천 무인을 이끌고 도착했고 사도련의 지원대가 도착했다.
“오, 진 공자!”
신승을 비롯해 정천맹의 수뇌들이 소청을 반갑게 둘러쌌다.
비단 정천의 무인들뿐 아니었다. 사도련에서 철혈기를 이끌고 온 무인마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랫동안 척을 지고 살아온 정사 연합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어째서 저런 자인가? 어째서…….’
검존을 대신해 수뇌들과 함께한 옥명자는 그런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소청의 말대로였다.
서천맹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