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10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10화
109화. 제갈상아의 지연책
“따로 싸우겠다니요?”
서천맹의 군사 제갈상아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황보인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수가 이만에 달한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래서?”
탁자에 두 발을 교차해 올리고 귀를 파는 황보인의 반말 짓거리에 제갈상아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들의 숫자가 이만이든 삼만이든 간에 저런 간양의 떨거지와는 연합할 생각이 없으니까 다른 수를 꺼내.”
황보인의 말에 제갈상아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찡그려졌다.
눈앞의 멍청한 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적이 오고 있는데 오직 서천맹주에 오를 생각에 경쟁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수라……. 황보 공자의 고견을 듣고 싶네요.”
“이러니 계집 따위가 군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
“공성을 하면 된다. 병서에도 적의 삼 할의 병력만 있어도 수성이 가능하다 나오는데 군사라는 계집이 그것도 모르는 거냐?”
그건 성벽이 견고할 때나 하는 이야기였고 다양한 수성 병기로 무장한 군문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상대는 마천이었다.
얼마나 강한 자들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산야를 뛰어넘는 무인들에게 성벽 따위는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뭐 이런 등신 같은 놈이…….”
“뭐?”
황보인이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제갈상아가 과장된 몸짓으로 제 입을 막았다.
“어머, 들었어요? 미안해라.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 버렸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
미안한 감정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투에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네년이 감히!”
황보인이 눈을 씰룩거리며 일어나 위협 어린 표정을 짓는데도 제갈상아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이봐요. 황보 공자. 내가 지금 부탁하는 것 같아요?”
“뭐?”
“저는 정천맹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된 서천맹의 군사입니다. 그리고 지금 명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마천에 변절했던 과거를 씻으라고 기회를 주는 거다 이 말이죠. 이해됐나요?”
그녀는 웃으며 제 할 말을 또박또박 전달했다.
“이…… 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쪽팔림을 당한 황보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일어나 제갈상아를 쳐 죽이고 싶었지만 주위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또한 악이군을 쓰러뜨린 소강이 청성, 아미, 곤륜, 화산의 지지를 받으며 버티고 있었다.
“형님, 일단 물러나시지요.”
팽천기가 가까이 다가와 소곤거렸다.
“이, 이…….”
쿵!
탁자를 때리며 일어난 황보인이 제갈상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지금은 참아 주지. 하나 앞으론 말을 주의하도록 해. 고 고운 입이 찢어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당신이 서천맹주가 되면 생각해 보죠.”
“…….”
그가 제갈상아를 쏘아보다 밖으로 나가자 서문중걸을 비롯한 오대 무가의 자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쾅!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제갈상아가 탁자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씨발. 저따위 놈이 서천맹주 후보라니……. 한심하다. 한심해.”
“…….”
“어머, 또 본심이 나와 버렸네. 죄송해요. 맹주님.”
“아, 아닐세. 헛헛.”
제갈상아가 생긋이 웃자 명진도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들은 돕지 않을 모양이군요. 혹 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
소강의 진지한 어조에 제갈상아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웃었다.
“다른 방도요? 왜요?”
“네?”
“호호호, 이미 전략은 반이나 전달했는데요?”
“그게 무슨…….”
“황보인과 무가들이 알아서 수성해 주겠다는 말 못 들으셨어요?”
“설마? 그가 그리 나올 줄…….”
“당연한 소리를요. 그가 진소강 공자를 싫어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싫어하는 사람과 연합하라고 하면 저라도 싫겠네요.”
“예? 한데 어째서 도발을…….”
“그야 당연히 좀 긁어 놔야 더 열심히 할 테니까요. 그리고 뭐라도 된 양 싸가지 없이 행동하는 꼬라지가 영 보기 싫어서…….”
“…….”
소강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뜻이 다르면 응당 ‘설득’해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녀는 오히려 화를 부추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거침없는 그녀의 말투에서 형인 소청의 모습이 투영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때 옥명자의 전음이 소강의 귓가에 들려왔다.
-운검 사숙의 말에 따르면 저 여인은 어릴 때부터 꽤 유명한…… 미친 도우였다고 합니다. 저 성격 때문에 제갈가에서도 꽤 난감한 상황을 겪어서 어디 내놓지도 못했다 하는군요.
소강이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은 마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 물어도 되나요?”
“말씀하십시오.”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죠?”
“그건 어찌?”
제갈상아의 거침없는 물음에 옥명자와 전음을 나누던 소강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진 공자의 무위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세워야 하니까요. 듣기로는 오존 어른들과 비슷하다고 하던데…….”
“글쎄요. 오존 어른들과는 겨뤄 본 적이…….”
“하아, 그럼 곤란하네요.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하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소강이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저어, 오존 어른은 몰라도 혁련 형님이나 모자겸 대족장과는 겨뤄 본 적이 있습니다.”
“응? 사도련의 소련주? 운남의 생사독과…….”
“예.”
“그들과 비슷하단 말인가요? 당신이?”
“예. 조금 모자란…….”
믿을 수가 없었다.
소강이 거론한 두 사람은 어쩌면 오존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알려진 고수였다.
하지만 소강의 표정에 진심이 담겨 있는 듯하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럼 황보가의 멍청이도 이길 수 있단 말이에요?”
“싸워 보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가능할 듯하군요.”
“…….”
제갈상아가 소강의 얼굴을 뜯어보듯이 응시했다.
그런 무공을 가졌으면 진즉에 서천맹주가 됐어야지, 이런 멍청아! 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 내었다.
“미, 믿어 보죠.”
“확신해도 될 것이오.”
제갈상아가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자 옥명자가 나섰다.
“황보인 정도라면 나도 이길 수 있소. 진 공자께서 원하지 않아 참고 있는 것이지.”
“…….”
단체로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인은 격체전공을 받아 그 무위가 오존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무가의 후계들을 꺾고 그 수좌에 오른 자였다.
그런 자를 너무도 쉽게 이길 수 있다 말하고 있었다.
‘하아, 정말 개나 소나 나대는구나.’
소강과 옥명자의 무위를 알지 못하는 제갈상아는 속으로 뻗쳐오르는 열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런데.
“옥명 형님께선 검존 어른의 모든 것을 물려받으신 분입니다.”
“…….”
소강의 말에 제갈상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화산의 검수들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봐, 어린 계집. 놀라는 건 그만하고 전략이나 말해라. 기다리기 지루하다.”
순간 소강의 뒤에서 덩치가 곰 같은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복장이 다른…….
“족장님, 그런 언사는…….”
“뭐가 말인가? 저 계집도 욕을 잘만 하더구먼. 내 아까 그 누런 옷 입은 꼬맹이 하는 꼬라지를 참느라 얼마나 노력했는데. 자네는 그게 문제야. 너무 예의를 다하려고 한단 말이야. 자네 형님이었으면…….”
사내의 거침없는 언사에 제갈상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설마 족장이라는 게 모자겸 대족장?”
“아, 처음 뵙지요? 맞습니다. 이분은 운남의 모자겸 대족장이십니다.”
“맙소사, 생사독이라니?”
소강의 소개에 제갈상아는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뭐지?
이 기묘한 조합은?
운남의 대족장이 진가에 기거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진소청으로 인해 정천맹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진가와 관련된 일 이외는 전혀 활동을 하지 않는다 들었다.
그런데.
스스로 사도련의 소련주와 비슷한 실력이라는 진소강.
검선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는 화산의 옥명자.
일만의 무인을 영도하는 운남의 지배자 대족장 모자겸까지…….
오존급에 들어가는 무인이 셋이었다.
그 정도라면 서천맹을 물론 무림도 뒤집어 놓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도대체…… 진가는 뭐 하는 곳이야?’
집안에서도 대가 세고 제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제갈상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한데 아까 실력이 모자라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전략인지…….”
소강의 물음에 제갈상아가 재빨리 지도를 펼쳤다.
차라락.
탁자 위에 사천이 드넓게 펼쳐졌다.
“자, 그럼 다음 계획을 세워 볼까요?”
그녀는 태세 전환이 무척이나 빨랐다.
‘오존급 무인이 셋이라니……. 오홋홋!’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소강의 무위에 따라 좌지우지될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침이 달린 작운 모형 깃발을 신속하게 지도에 꽂아 넣기 시작했다.
지도 위에 마천의 무인들과 사천의 방어선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대군사님께서 보낸 전서구에 따르면 적은 벌써 난주를 지났어요. 대막에서 이곳까지 이동해 온 저들의 속도를 봤을 때 사천까지 당도하는 시간은 대략 사흘.”
제갈상아의 손이 지도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가욕관을 지난 대막혈궁의 병력이 방향을 꺾었다.
본대가 기련산을 지났고 선봉이 북 난주를 지났다고 했다.
저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서천맹 정벌.
장장 이만의 무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현재 서천맹의 무인은 대략 오천입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까지 포함해서. 사도련 측에서 보낸 철혈기 오백, 정천맹의 신승께서 백인회를 비롯한 일천 무인들이 선발대로 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겠군요.”
“…….”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강의 말에 제갈상아가 빙긋이 웃었다.
“맞아요. 시간이죠. 우리에겐 병력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지원군이 오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사흘, 하루라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시간을 막지 못하면 사천은 무너질 겁니다.”
“방도가 있겠지요?”
은근한 어조에 제갈상아의 눈에 묘한 광기가 피어올랐다.
“그럼요. 당연한 소리를.”
그녀의 손이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사천의 북쪽 면양(綿陽).
거대한 강이 막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집중해 이곳을 방어합니다.”
“예?”
“하지만 그리되면 다른 곳이…….”
소강의 의문에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오문의 정보대로라면 저들은 최단의 경로를 선정해 오고 있습니다. 이만이나 되는 대규모의 무인들이 움직였으니 저들도 우리가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을 알 겁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천맹을 치려 할 겁니다.”
그녀의 손이 다시 지도를 향했다.
면양의 강둑으로 펼쳐진 거대한 절벽산지였다.
“만약 면양의 강을 넘지 않으면 절벽 지대를 돌아와야 하죠. 대규모 병력이니 족히 반나절 이상은 걸립니다. 적 선발대의 수장이 황보인처럼 멍청하지 않다면 굳이 돌아올 리 없죠. 분명 강을 넘으려 할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저희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면양에서 저들의 선발대를 막아 주세요.”
적의 선발대는 삼천에 달했다.
하지만 제갈상아는 소강 일행이 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선발대를 막고 적의 진로를 절벽 외곽으로 돌립니다.”
“시간을 벌자는 말이군요.”
“네. 적들의 전력을 정확히 모르니 일단 선발대를 막고 저들의 진로를 돌려서 본성을 치게 합니다.”
“본성에서도 반드시 수성할 병력이 있어야겠군요.”
“예. 다행히 황보인과 오대 무가가 합심해서! 열심히! 막아 줄 것 같아요. 반나절만 버티면 됩니다.”
제갈상아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데, 저들이 진로를 바꿀까요?”
“바꾸게 해야죠.”
“어찌…….”
“적을…… 최대한 잔인하게 학살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