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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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05화
104화. 단중혈의 화기(火氣)
미리 은신하고 있다가 적을 죽이는 것과 적이 점령한 지역에 숨어들어 죽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후자가 더 위험하고 어려웠다.
특히나 내부가 트여 있고 훤히 밝혀진 곳이라면 더욱 심했다.
하지만 초사와 비마대는 당대에서 제일가는 은신자라 불려도 좋을 소청에 의해 수련되었다.
그들은 빠르고 은밀했으며 검은 살수보다 날카로웠고 암기보다 정확했다.
“초사!”
소청의 외침과 함께 비마대원들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검이 짧게 그어지자 곳곳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털썩.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무 명의 무인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기도 전에 움직였다.
갑작스러웠지만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독혈보의 무인들은 흉수의 정체도 확인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적이다!”
외침과 동시에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사방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본진 깊숙한 곳에서 습격을 받은 독혈보의 무인들은 대처가 신속하지 못했고, 그것은 적은 수로 기습을 감행한 소청 일행에게는 무척이나 큰 장점이었다.
“타종을 울려 내부에 경계령을…….”
차아악!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소청의 창극이 그의 입안으로 박혔다가 얼굴을 잘라 내며 빠져나왔다.
푸학!
피가 튀어 소청의 얼굴을 적셔 놓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단번에 목을 베라! 머뭇거리지 마라!”
혈신이 되어 버린 소청의 외침이 공동을 가득히 울렸다.
창대에선 진득한 피가 뚝뚝 흘렀고 입술 사이로 새하얀 송곳니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소청의 모습은 지옥을 탈출한 야차처럼 잔혹했다.
스물 남짓의 비마대원들에 의해 일백이 넘는 독혈보의 무인 반수 이상이 쓰러졌다.
하지만 남은 이들이 많았다.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습격으로 놈들이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늦출 수는 있었다.
소청은 빛살처럼 움직이며 한 호흡에 서넛이나 되는 무인들의 목을 잘라 내며 종횡무진 했다.
한곳에 몰려 있다면 단번에 쓸어버리면 될 일이었지만 사방에 산개되어 있으니 숨을 길게 내쉴 여유조차 없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베고 또 베었다.
“이익!”
독혈보의 무인 하나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포로들을 향해 던졌다.
파삭!
깨어지는 약병에서 시큼한 향기가 피어오르자 초사가 경계성을 내며 재빨리 물러났다.
“화혈독이다!”
고작 엄지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약병이었으나 열기를 머금은 독 기운이 여름날 태풍처럼 십여 장을 퍼져 나왔다.
“끄아아악!”
삽시간이었다.
순식간에 중독된 포로들이 피를 태우는 고통에 몸을 긁어 대며 몸부림쳤다.
화혈독은 치명적이기는 했으나 무거운 독이었다.
비록 순식간에 퍼졌으나 일정 범위 이상은 퍼지지 못했다.
독 기운을 피해 중독되지 않은 포로들을 구해 낸 초사가 죽어 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죽어 가는 이들이 붉은 증기를 뿜어내며 초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중독된 이들의 몸이 진물처럼 녹아내렸다.
“…….”
초사의 안타까운 눈이 사방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바닥에 깔려 오는 독 기운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화혈독이 곳곳에서 확산되자 독 기운을 피해 물러난 틈을 타서 독혈보의 생존자가 타종을 때렸다.
땅. 땅. 땅. 땅!
피 묻은 타종 소리가 공동을 찢어지도록 울려 놓았다.
“조장! 적의 경계령입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타종 소리에 은수가 죽어 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던 초사의 정신을 일깨웠다.
내부는 정리되었다.
공동 안에 있던 독혈보의 무인들을 모조리 죽었고 살아남은 포로들은 이백여 명은 넘어 보였다.
하지만 죽은 자들이, 그리고 지금도 죽어 가는 자들이…….
“제길!”
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이 보유한 것은 한 사람당 두어 개 정도의 해약뿐이었다.
그마저도 정천에서 만들어진 것을 모조리 쓸어 온 참이었다.
구해야 한다 생각했다.
소청의 말처럼 내부를 빠져나간 뒤에 몇이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야만 했다.
나중에 죽더라도 지금은…….
“비마대! 중독이 심하지 않은 자에게 내독단을 먹여라!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한다!”
초사의 명령이 그들의 뒤를 보장해 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비마대원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해약을 아낌없이 내놓아 포로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물러나!”
독 기운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대원들 앞으로 소청이 파고들었다.
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창대가 바람을 만들어 다가서는 독 기운을 모조리 밀어 버렸다.
“패월…….”
“멍청한 짓을……. 죽은 자는 포기해야 한다. 너희가 살아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소청은 얼굴을 찡그리며 초사를 나무랐다.
“피해는?”
“셋이 죽었습니다.”
은수와 재선이 대답했다.
바닥에 귀를 대자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동굴을 울리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포로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진득하게 어렸다.
“백, 혹은 그 이상. 고수들이 섞여 있다. 초사, 포로들을 구해 신속하게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잊지 마라!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도망치는 것 하나만 생각해. 포로들의 피해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소청의 명령에 초사가 짧게 대답했다.
“저기다! 놈들이다!”
공동과 연결된 다섯 갈래의 굴에서 독혈보의 무인들을 비롯해 대막혈궁의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취리릿!
휘돌아 잡힌 창대에 새하얀 기운이 겹겹이 둘러지고 소청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초사! 뛰어!”
가가각!
외침과 함께 창극이 바닥을 긁으며 휘어졌다.
활처럼 굽었던 창대가 제 모습을 찾으며 휘둘러지는 순간 반월형의 강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날아갔다.
슈아악!
공기를 찢어발긴 반월형의 강기는 공동 안으로 뛰어들었던 무인들을 깨끗하게 양분하고 지나갔다.
콰아앙!
벽면에 닿아 폭발한 강기가 산을 뒤흔들었다.
“쫓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전과 다른 복장을 하고 나타난 무인들이 수하들을 향해 목에 핏대를 세워 올렸다.
그들의 외침과 함께 무인들이 개미 떼처럼 줄을 지어 포로들을 뒤쫓는다.
“아악! 도망쳐!”
“살려 줘!”
포로들이 겁에 질린 채 동굴을 향해 무질서하게 몰려들었다.
“몰리지 마라! 순서를 기다려!”
칼을 빼 든 은수가 그들을 통제해보려 하지만 이미 두 눈이 공포로 물들어 이성을 잃은 그들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부딪친 사람을 밀치고 쓰러진 사람을 밟으며 도망치느라 시간이 더욱 지체되었다.
“제길!”
적들이 다가오는 모습에 촉박해진 은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죽어…….”
빠르게 뒤쫓아 왔던 대막혈궁의 무인들이 은수를 향해 칼을 빼 들고 몸을 날렸다.
취리리릿!
새하얀 실선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후두둑.
은수를 공격했던 이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잘게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육편의 조각들이 바닥에 쌓여 턱을 만들고 핏물이 도랑처럼 흘렀다.
“은수…… 저들에게 평판이라도 쌓을 생각이냐? 흐름에 방해되는 자는 죽여라.”
“…….”
스산하게 가라앉은 소청의 눈동자에 은수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좁은 동굴을 빠져나가야 했다. 통제되지 않으면 오히려 시간이 지체되고 위험에 빠지게 만들 뿐이었다.
“비마대! 먼저 나가려 행로를 방해하는 자들의 목을 베라!”
은수의 외침에 몇몇의 목이 베이고 비마대가 내뿜는 살기에 겁을 집어먹은 포로들이 그들의 통제에 따르기 시작했다.
“나가지 못하게 막아!”
잠시 소청의 잔인함에 멈칫했던 대막혈궁의 무인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소청이 뒤를 막고 선 곳은 공동을 빠져나가는 동굴 입구의 앞이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좁아지는 공간이 오 장여에 달했지만.
휘리리리…….
슈아악!
소청의 창대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져 그 모든 곳을 가득 채웠다.
“나를 넘어가도 좋다 허락한 적은 없는데?”
창대를 늘어뜨리고 꼿꼿이 선 소청의 거대한 존재감이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뭣들 하느냐! 적은 혼자다! 공격하란 말이다!”
채근하는 수장의 외침에 무인들이 무기를 세워 들지만 감히 앞으로 다가서는 자들이 없었다.
휘리릭! 가가각!
소청의 창대가 낮게 휘둘러져 바위 바닥에 깊이 파인 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살기가 대막혈궁의 무인들을 향해 훅 하고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소청의 음산한 목소리가 공동 안을 나지막하게 울렸다.
“넘어온 만큼 잘라 주지.”
“…….”
살기를 진득하게 머금은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짙게 뻗어져 오는 살기의 파도에 대막의 무인들은 경계선 안으로 밀려들어 가지 않도록 뒷걸음질 쳤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이!”
소청의 너머로 포로들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대막혈궁의 무인들이 경계선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차아악!
“끄아악!”
소청의 말대로 딱 경계선을 넘어선 만큼의 부분이 몸에서 분리되었다.
손이 잘리고, 코끝이 잘리고, 발의 절반이 잘려 나갔다.
소청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대막혈궁의 무인들은 경계선 앞에서 멈춘 채 도망치는 포로들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월! 먼저 가겠습니다.”
“…….”
포로들의 맨 뒤편에서 은수가 짧게 인사하고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크크크.”
휘리릭! 쩌엉!
짧게 휘저은 창대를 따라 쏟아진 기운이 동굴의 입구를 때렸다.
우르르…….
동굴의 입구가 무너졌다.
내부의 동굴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으니 한곳의 입구가 무너진다 해도 쫓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걸로 족했다.
놈들은 그 시간만큼 돌아가야 했으니 도망칠 만큼의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준 셈이었다.
“입구가 무너졌다. 뭣들 하느냐! 돌아가 놈을 쫓아라!”
가득히 쌓였던 무인들이 모조리 방향을 돌려 다른 방향의 동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소청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지어졌다.
“기다려 주는 건 여기까지…….”
소청의 기세가 바뀌었다.
이제까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느낌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면, 뒤바뀐 기운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창대를 양손으로 길게 잡고 발을 넓게 벌린 소청의 몸에서 기운이 피어오르자 기괴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이다. 새로 얻게 된 힘을 사용하는 건…….”
발을 앞으로 내밀자 단중혈(膻中穴: 가슴 중앙)의 기운이 단전으로 밀려 내려왔다.
후우욱!
잔잔하기만 하던 소청의 몸에 엄청난 열기가 피어 나왔다.
붉은 기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화염의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오르자 머리카락마저 붉게 변해 흩날렸다.
치이이이…….
창대에 기운이 스미자 모루에 담긴 쇠붙이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뿜어 나온 기세가 폭염의 기운으로 변해 사방으로 휘몰아쳐 나갔다.
화광이 어린 소청의 눈동자가 대막혈궁의 무인들을 향하는 순간.
“모조리 죽여 주마!”
파앙!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한일(一)자로 펴진 소청의 몸이 쏘아졌다.
마치 거대한 화염이 바람을 만난 것처럼 사방에 화기를 뿌려 놓았다.
“끄아악!”
염화를 머금은 창대가 스치고 간 모든 곳을 불태웠다.
꿰뚫린 적은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불어닥친 바람은 공동의 모든 곳을 헤집고 다녔다.
콰아아앙!
바닥에 떨어진 불길이 원형으로 퍼져 나가며 공동 안을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었다.
혈독의 피가 화탕처럼 끓어오르고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시신들이 불타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었다.
소청은 굴 안에 모인 개미 떼를 압살하고 태우듯이 부딪치는 모든 것을 갈라내며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