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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104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104화

103화. 혈독을 마주하다

 

 

 

 

하오문의 비밀 분타를 떠나는 초사와 비마대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좋았던 모양이지?”

흘러가는 듯한 말에 초사의 목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하오문의 배려로 지난 며칠간을 격정(?)적으로 보낸 덕분이었다.

“기껏 휴식을 주었는데 쓸데없는 데 기력이 상하지는 않았겠지?”

“아, 아닙니다! 어느 때보다!”

초사가 제 팔뚝을 힘주어 들어 올리자 소청이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는 마천의 본거지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갈 수 있다.”

“…….”

“혹, 누군가 죽더라도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발각되면 적을 척살하고 도주하거나 스스로 자결한다.”

“알겠습니다.”

“인적이 없다 해도 사방에 저들의 눈과 귀가 있음을 잊지 말라.”

“예!”

소청은 초사에게 명해 비마대를 열 명씩 두 개 조로 나누었다.

“좋아. 일 조는 은수, 이 조는 재선이 맡는다. 초사는 중앙에서 직접 통제한다. 조간 거리는 오십 장, 개인 거리는 십 장. 산개해서 적진에 잠입한다.”

“알겠습니다.”

“출발하지.”

말을 마친 소청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초사와 비마대가 넓게 퍼져 그 뒤를 따랐다.

 

이틀을 달려 도착한 검은 대지.

끓어오르는 대지는 하염없이 하얀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소청과 비마대는 검은 대지가 시작되는 경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검은 대지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었다.

대막혈궁.

그들의 심처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산 아래로 지어진 성벽은 그 끝이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았고 산 전체를 아우르며 세워져 있었다.

“다들 나가 버려서 그런가 조용하군.”

소청과 초사가 은신한 곳을 향해 혈궁의 무인 하나가 다가와 바지춤을 내렸다.

치이이익.

화산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지표면에 열기가 남았는지 사내의 몸에서 빠져나온 물줄기에 허연 김이 솟구쳤다.

“이봐! 볼일은 끝났나?”

동료의 외침에 사내가 짜증스럽게 바지춤을 집어 올렸다.

“거참 재촉하기는…….”

그가 돌아보는 순간 자신을 불렀던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목에 구멍이 뚫려 피를 울컥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아니…….”

텁!

그 순간 누군가 그의 입을 막았고 날카로운 예기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사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소청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전음을 날렸다.

-초사, 전방 경계조. 척살. 흔적을 남기지 마라.

소청의 전음에 초사가 수신호를 보냈다.

슥! 스걱.

미세한 칼 소리와 함께 외부를 경계하던 무인들이 비마대의 습격을 받고 동시에 쓰러졌다.

하지만 시신이 쓰러지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좌우를 경계하며 은밀하게 적의 전초를 넘는다.

시신은 갈라진 대지의 틈으로 밀어 넣어졌고 비마대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대지를 지키는 무인들의 경계선은 모두 다섯이었다.

소리 없이 그들을 처리한 소청과 비마대는 대막 혈궁의 성벽 인근에 도착했다.

-밤이 되길 기다려 성벽을 오른다.

-알겠습니다.

-잠입에 성공하면 혈궁에 대한 정보를 모은 후 퇴각해라. 절대 적과 싸워서는 안 된다.

-예.

초사는 소청의 명령을 은수와 재선에게 전달했다.

 

소청이 잠입하던 그 시각.

본궁에 도착해 닷새를 보낸 독마는 독혈보의 각 단주들을 불러 모았다.

“준비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좋아. 혈독지괴의 제작은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스무 구가 만들어졌습니다. 열 구는 대공께서 데려가셨습니다. 혈독의 재료만 충분하다면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합니다.”

“대공께서 열 구나?”

“예.”

“과한 전력이군.”

“마종께서 직접 내리신 명(命)인지라 가능한 최대의 전력을 출정시킨 것 같습니다.”

“좋다. 대공께서 이미 서천맹을 향해 출발하셨으니 혈독지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고는 내일 아침 묘시를 기해 광풍단으로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독마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곡의 잔당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서천맹을 치는 선봉에 반드시 독혈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갈 길이 머니 충분히 준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돌아간 뒤에 독마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후후, 서천맹이라……. 중원 놈들이 묘한 수를 생각해 내었군. 과연 제갈휘문이라 해야 하나?”

독마는 비릿하게 웃음을 지으며 탁자에 놓인 독이 담긴 잔을 들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차 대신 독을 마셨다.

독성을 유지하기 위한 오랜 습관이었다.

툭. 쨍-!

그런데 손에 들린 찻잔에 금이 생기더니 깨어져 버렸다.

치이익.

찻잔에 담겼던 독이 바닥에 떨어져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

독마의 눈이 찌푸려졌다.

출정을 앞둔 시점에서 좋지 못한 징조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불안함이 생겼다.

“훔,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한 번 더 점검해 보아도 나쁠 것은 없지.”

독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독혈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혈독으로 향했다.

독혈보의 정수가 담긴 혈독지괴를 보고 나면 뿌듯함에 잠시 생긴 불안감을 지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막혈궁의 본궁에는 예상보다 무인들의 수가 적었다.

마천의 본거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이상하군요. 마치 다들 어디론가 빠져나간 것 같지 않습니까?”

초사의 말에 소청은 유란의 말이 떠올랐다.

본궁이 대막 서쪽에 위치한 광풍단으로 움직였다고 했다.

어째서?

중원 정벌이 시작되었나?

하지만 아직 대막을 넘지 못했다고 하니 쉬이 단언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일단 좀 더 살펴본다. 대원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종합해 보면 무언가 알 수 있겠지.”

“예.”

소청과 초사는 경계하는 무인들의 눈을 피해 검은 산의 중심부로 조금 더 다가섰다.

안으로 갈수록 무인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곳을 발견했다.

“꽤 많은 자들이 있다.”

소청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찌푸렸다.

인기척뿐 아니라 무언가 신경을 거슬려 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청이 어둠이 서린 천장을 타고 이동해 불이 환한 곳으로 진입했다.

“크흡…….”

소청을 뒤따라온 초사가 급히 코와 입을 막았다.

썩어 가는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와 짙은 혈향이 공동 안을 가득 채워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초사는 물론 소청의 얼굴까지 와락 일그러졌다.

그들의 눈앞에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공동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은 소청의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들의 너머로 붉은 액체로 채워진 수십 개의 웅덩이가 보였다.

“혈독…….”

소청의 낮은 읊조림에는 옅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전생에 보았던 광경의 잔상이 눈앞에서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전생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아 비어 있어 어렴풋이 추측하기만 했던 참상이 지금은 있는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이미 소청에게 들은 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있노라니 초사의 찡그려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잔인했다.

핏기 한 점 없는 시체가 짐승의 사체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그 뒤로 수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지쳐 생을 포기해 버린 표정으로 무릎이 꿇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웅덩이의 위에는 천장에서부터 이어진 쇠사슬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소나 돼지의 몸에서 피를 빼는 것처럼 사람의 목을 그어 놓았고, 목에서 흐른 피가 웅덩이를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급기야 초사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어 내었다.

아무리 하늘 아래 가장 잔인한 것이 사람이라고 하지만 혈독의 모습은 너무나 심했다.

마치 이야기 속에서 전해지는 지옥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으아악! 살려 줘! 살려 줘!”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중 여인 하나가 독혈보의 무인에게 끌려 나오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큭큭큭, 발악하기는. 귀찮게…….”

독혈보의 무인이 머리채를 움켜쥐고 손에 쥔 몽둥이로 비명을 지르는 여인을 마구 두들겨 패었다.

퍽! 퍽퍽!

피가 튀고 살이 찢겨 나갔다.

그 잔인한 소리가 비명 소리와 섞여 공동 안을 가득히 울렸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렸고 독혈보의 무인들에게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혈독을 바라보는 사이에도 피가 완전히 빠진 시신이 내려지고 또 다른 이가 끌려와 목이 잘렸다.

“패월…….”

그저 불렀을 뿐이지만 초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소청은 알고 있었다.

묻고 있었다.

자신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른 체하고 지나쳐 혈궁의 정보를 파악해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너무도 참혹했다.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리 짐승처럼 죽어 나가야 한단 말인가?

소청이 아랫입술을 깊이 깨물었다.

“초사, 비마대를 불러들여라.”

“알겠습니다.”

그의 결정에 초사가 반색하며 만리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며들듯이 사라지는 향기가 시기와 혈향을 뚫고 적서를 불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여든 비마대의 얼굴은 초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나 확인했나?”

소청의 물음에 은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저들의 전서구를 확보했습니다. 암어인지라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좋다. 암어를 분석하는 것은 하오문 쪽이 나을 테니 그곳으로 보낸다.”

“예.”

“재선.”

“적의 병력은 대충 산 외부에 칠백여 명, 내부에 삼백여 명이 있습니다.”

“역시 주 전력은 모조리 빠져나갔다고 봐야 하는군.”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독마도 이미 빠져나간 뒤란 말인가?’

독마의 뒤를 쫓았던 소청은 그가 혈궁으로 진입하는 모습만을 확인하고 하오문의 비밀 분타로 돌아왔었다.

‘아깝군. 이런 상황이라면 독마를 죽였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금부터 혈독의 재료로 사용되는 사람들을 구한다.”

“…….”

소청의 명령에 비마대원들의 눈이 열의로 물들었다.

“신속하게 놈들을 죽이고 도주한다. 동굴이 일자로 늘어서 있으니 은수가 맡은 일 조를 초사가 인계받아 선두에 서고 재선이 맡은 이 조가 후방을 지킨다.”

“알겠습니다.”

“적들이 빠져나가 내부에 삼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적진이다. 모든 위협에 경계해라.”

“예.”

“외부로 나가면 구출된 인원을 산개하여 달리게 해라. 대원들은 그들의 틈에서 적들이 다가서는 순간 죽인다. 그사이 후위는 내가 맡겠다.”

“하면 혈궁을 빠져나간 뒤에는 어찌합니까?”

“…….”

은수의 물음에 소청이 얼굴을 찡그렸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소청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최악의 조건이었다.

적진의 최심처였다.

구해야 할 사람은 많고 지켜 주는 자는 적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초사와 비마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은수, 소란이 일면 놈들이 예하에 전서구를 보낼 것이다. 지금 즉시 전서구들을 모조리 죽이고 합류해라. 혈궁의 적을 제외하고 열화사, 축융단, 광풍단에서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예.”

“그리고 하오문의 비밀 분타에 연락을 보내라.”

“…….”

“광풍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은수가 명을 받은 즉시 자신이 발견했던 전서구실로 달려갔다.

소청은 초사와 비마대에게 내부에 있는 독혈보의 무인들 중 죽여야 할 순서를 각인시켰다.

“잊지 마라. 신속함이 생명이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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