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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99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2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99화

98화. 과거의 악연

 

 

 

 

“형님…….”

향을 올리고 잔을 채우는 소강의 애잔한 목소리에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손님이라고는 사돈의 연을 맺은 은가장의 인물들과 모자겸뿐이었다.

그리고 간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옥명자와 매화검수는 어렵사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상복을 입은 진가의 인물들은 시신 없는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진가신, 진소강, 그리고 섭약란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되레 숙부인 진가성과 진무월창, 운남의 대족장이라는 모자겸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원통함이 뼈에 사무쳐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생각했다.

‘진가, 꽤 강한 사람들이군. 자식의 죽음 앞에 어찌 저리 담담할 수 있단 말인가.’

옥명자는 묵묵히 장례 절차를 이어 가는 그들을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께 화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만난 소강은 명문의 자제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말투와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오?”

“위패를 태웠으니 유지를 이어야지요.”

“유지가 있었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평소 새로 구성되는 서천맹에 들어가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서천맹에서는 무엇을 할 작정이오?”

“무엇을 하다니요?”

옥명자의 물음에 소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천맹의 일원으로서 응당 마천과 싸우기 위해 힘을 보태야지요.”

“…….”

옥명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천맹주가 되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대와 같은 자가 서천맹주가 되었으면 좋겠소. 만약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

옥명자의 말에 소강의 눈이 찌푸려졌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

“검존 어른의 후인이라 하시니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찌 그러시오?”

“어찌 그러냐니,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지금 서천맹에는 무림의 선대께서 계시는데 제가 서천맹주가 된단 말입니까?”

그의 눈에는 다른 이들처럼 탐욕과 같은 불쾌한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눈빛은 정명했고 기세는 차분했다.

변방의 약소한 자제라 평가받았던 그였지만 중원 어떤 무가의 자제보다 의기로워 보였다.

“그렇구려. 내 실언이 과했소. 하나 지금의 서천맹에는 이리 떼가 가득하오. 서천맹주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무공을 내세우며 물어뜯고 있소.”

“…….”

잠시 고민하던 소강이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바른 뜻을 세웠다면 그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 지금은 마천에 맞설 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시기에 탐욕에 눈이 멀어 의기를 해친다면 그저 부숴 놓으면 될 일입니다.”

역시 다르다.

옥명자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음을 흐뭇하게 여겼다.

 

* * *

 

서천맹주의 자리를 놓고 계획된 비무 대회는 초반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비무의 날짜가 다가오지도 않은 시점임에도 서천맹의 세력은 이미 네 개의 세력으로 쪼개졌다.

서천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황보인, 서문중걸, 악이군 등과 중립을 유지하는 청성, 아미, 곤륜이었다.

서천맹 내에 각파의 거처가 정해졌지만 세 곳 세력의 수장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도의 객점을 잡고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자리.

서천맹주의 거처인 춘추전 이외의 자리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을 보이고 있음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는 시간, 한 떼의 인마가 성도의 외곽지역의 한 곳에 도착했다.

소강과 그의 호위인 진무월창, 그리고 화산파의 무인들이었다.

“감회가 새롭군요.”

구(舊) 당가타의 거대한 성벽은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높았다.

“들었습니다. 당가와의 싸움. 치열했다지요?”

옥명자의 말에 소강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치열……했었지요.”

소강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소청이 당태위를 죽이고 당가를 무너뜨렸다.

홀로 한 일이었다.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지만 옥명자는 괜한 말로 죽은 형을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닌가 미안해했다.

“미안합니다. 괜히…….”

“아닙니다.”

소강이 고개를 내젓고 근처에 환하게 불이 켜진 객점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어서 오십……시……. 어? 혹시?”

객점 주인이 바삐 달려 나왔다가 소강이 입은 월문복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표정이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지, 진소강 소가주 아니십니까? 성도엔 어쩐 일이신지? 설마 서천맹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사천의 가장 큰 도시인 성도였다.

오랫동안 장사 밥을 먹어 온 객점주의 눈치가 모자랄 리 없었다.

작금의 진가는 사천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가문이었다.

성도에서 객점을 운영하는 자가 월문복을 모를 리 없었고 진가의 소가주인 진소강의 얼굴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예. 서천맹으로 가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할까 하여 들렀습니다만……. 자리가 있겠습니까?”

진무월창의 수좌인 남광의 물음에 주인이 난색을 띠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리가 꽉 차서 없습니다.”

“예? 자리가…….”

남광이 눈을 찡그리며 객점 안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많기는 했으나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았고 이 층에는 칼을 찬 무인들이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지키고 있었다.

“아니 저리 빈자리가 많은데……. 우리 일행이 전부 쉴 생각은 아니니 탁자 두 개면 됩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하지만 객점 주인은 그마저도 안 된다 하며 거절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희가 괜히 난처하게 해 드린 모양입니다.”

대충의 분위기를 눈치챈 소강이 남광의 말을 가로막고 몸을 돌렸다.

“소, 소가주. 어찌?”

남광의 말에 소강이 고개를 저었다.

옥명자 역시 소강의 생각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이 층을 채우고 있는 무인들은 한결같이 청의를 입고 투수(套袖: 팔 보호대)와 각반을 차고 있었다.

또한 저마다 뱀 혀처럼 끝이 갈라진 사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악가의 무인이었다.

사천에서 그들이 악이군을 앞세워 서천맹주에 도전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괜한 소란이 일면 객점은 단숨에 싸움터가 될 것이었고 손해는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특히나 악표와 소강 사이의 일은 화산의 운검자가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럼 이만…….”

소강이 몸을 돌리고 무인들이 그 뒤를 따르려는데.

“아니, 이게 누구야?”

이 층 난간에서 얼굴을 빼꼼히 드러낸 약관의 청년이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그 이름도 자자한 간양 촌놈 진소강 아닌가?”

비웃음이 가득한 말에 남광과 진무월창의 무인들이 매서운 기세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래전 소강에게 치욕스럽게 패배하고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던 악표였다.

“이거 서천맹이 무슨 어중이떠중이들의 모임도 아니고…….”

악표가 조소를 머금고 이 층을 훌쩍 뛰어내렸고 악이군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네 형이 뒈졌다던데? 진가 따위가 서천맹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성도에 들었지?”

“…….”

“얼레? 그 이름도 쟁쟁한 옥명자께서도 끼어 있으시네.”

악표가 옥명자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악가의 이 공자께선 말씀을 삼가시오! 일가의 소가주입니다. 더욱이 화산의 옥명도장뿐 아니라 운검도장께서도 계시거늘!”

남광이 나서며 말을 하자 악표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내었다.

“감히 진가의 떨거지가…….”

순간 그의 손이 남광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았다.

텁!

뺨에 닿으려는 순간 소강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

원래의 목적을 다하지 못한 악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놔.”

“…….”

매섭게 뜬 눈에 소강이 슬쩍 손을 놓고 포권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악 공자.”

“하아! 악 공자? 인사는 똑바로 해야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린 소강의 모습에 악표의 발이 허공을 날아갔다.

슈욱!

쾌속하게 주먹이 날아갔지만 그들의 틈을 끼어든 운검자가 절묘한 화경으로 주먹을 흘리고 그를 밀어내었다.

비록 기운이 실리지 않은 손놀림이라 간단히 막았으나 서너 걸음이나 밀려나자 악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모두의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생각한 악표가 곁에 다가온 악가의 무인에게서 창을 빼앗아 들고 살기를 피워 올렸다.

“화산에서 돈이라도 받아 처먹은 모양이지? 진가의 뒤를 봐주다니 말이야.”

“…….”

악표의 말에 운검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악이군이 이 층에서 몸을 날렸다.

허공답보까지는 아니었으나 이 층에서 구름처럼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부운보(浮雲步)는 경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내공을 품고 있었다.

“동생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운검자 대협.”

악이군이 자못 공손하게 포권을 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객점 안을 답답하게 짓눌러 놓았다.

“악가의 대공자께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셨구려.”

“과찬이십니다.”

강렬한 기운에 얼굴을 찡그린 운검자의 칭찬에 묘한 미소를 띤 악이군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표, 사과하거라.”

“형님!”

“…….”

반발하듯이 창을 움켜쥐는 모습에 악이군의 눈이 매서워졌다.

“칫, 악표가 화산 매화검수의 수장이신 운검자 대협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한때 이룡으로 불리었다고는 하지만 명가의 자제답게 예의에 어긋남 없는 사과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객점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니 진심이 담기지 않았음은 누구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악가의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곁에 옥명자가 가만히 있으니 사태를 키우고 싶지 않았던 운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면 우리는 그만 나가 보겠네.”

운검자가 몸을 돌리자 소강과 옥명자가 그 뒤를 따랐다.

“잠깐.”

방금 전까지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악이군이 갑자기 그들을 멈춰 세웠다.

“뭔가?”

운검자가 돌아보자 악이군이 비릿하게 웃었다.

“사과를 드린 것은 화산입니다만…….”

“뭣이?”

“진가와는 풀어야 할 원한이 있습니다. 놓고 가시지요.”

“감히!”

자신을 희롱하는 듯한 언사에 격분한 운검자가 눈을 세모로 뜨고 나서려는데 소강이 웃으며 그를 막았다.

“비켜 주시지요.”

“…….”

소강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자 옥명자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검자가 물러나자 소강이 몸을 돌렸다.

“제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무표정하게 내뱉는 말투에 악이군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내가 아니고 이 녀석이 있지.”

악이군이 손가락으로 제 동생을 가리키자 악표의 얼굴에 사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공정한 비무였다 생각했는데 패한 쪽에서는 은원이라 여긴 모양입니다.”

소강의 말투에 악이군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희한하군. 느껴지는 기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저 자신감은 뭐지?’

묘했다.

팔짱을 낀 악이군은 소강의 몸을 살피다 악표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정호에서의 패배 이후로 동생은 달라졌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련을 했고 꽤 큰 성취를 보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는 악표는 매화검수의 수장으로 알려진 운검자에 뒤지지 않았다.

“표.”

“예. 형님.”

“자신 있겠지?”

다짐을 두는 듯한 형의 말에 악표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악이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강을 향해 말했다.

“어때? 내 동생은 준비가 된 모양인데. 객점주에게 피해가 있을지도 모르니 밖으로 나갈까?”

서천맹주에 도전하고 있으니 주변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리라.

하나 악이군의 말에 소강이 슬쩍 주위를 돌아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만한 자신감이군.”

악이군이 피식 웃으며 발을 물리자 악표가 창대를 힘 있게 움켜쥐고 소강을 향해 겨누었다.

“창을 들어라!”

“…….”

악표의 말에 소강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손에 든 창을 남광에게 쥐여 주고 말했다.

“기회는 한 번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뭐? 이런 개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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