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3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31화
130화. 각자가 느낀 것들
전투가 끝난 뒤,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처참하게 부서진 간양의 모습을 본 그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오며 일구어 낸 터전이 무너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가 지나자마자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 중심에는 진가가 있었다.
진가신은 가문의 무인들과 표사들을 동원해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짓고 각지에 표행을 보내 부족한 물건들을 구해 오게 했다.
외부에서 온 이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중원 각지에는 수많은 가문이 있다.
전쟁은 아니더라도 기근, 수해, 태풍의 피해가 생기는 곳은 수도 없이 널려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부는 할지언정 자신의 일처럼 모든 것을 쏟아붓지는 않았다.
진가는 가진 재산과 인원을 동원해 간양의 민초들을 돕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간양 전체가 한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어이구, 나오셨습니까요?”
“…….”
잠시 술자리를 가지려 밖으로 나왔던 황보인과 팽천기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모르는 사람이다.
결단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다들 한결같이 고마워하는 표정이란 말인가?
“누구?”
“황보 대협과 팽 대협이 아니십니까?”
“아 맞긴 한데…….”
“역시!”
그의 말에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너도 나도 뭐가 감사하단 말인가?
“대공자님과 간양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셨다지요?”
“아, 그…….”
머쓱해하는 그를 향해 다가온 이들이 둘의 몸에 생겨 있는 생채기를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저희를 위해 이리 많은 상처를 입으셨다니…….”
딱히 누구를 위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영웅 보듯이 바라보았다.
“제 아들놈입니다.”
“…….”
중년 사내의 뒤로 투실투실하게 살이 찐 아이가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황보 공자님처럼 멋진 무사가 되겠다 합니다. 열 살이 되면 꼭 황보가를 찾아가겠다고요.”
“…….”
이름도 없는 민초의 아들을 황보가에서 받아 줄 리가 없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가 없었다.
“이놈아, 어서 인사 올리거라.”
“…….”
아비의 말에 아이가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인사를 해 왔다.
“험, 험…….”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무림인들도 아니었다.
평소라면 말도 못 걸어올 하잘것없는 민초들이…….
그가 경험해 온 민초들은 언제나 꽁무니를 빼기에 바빴다.
혹여 책잡혀 시비라도 걸지 않을까 불안해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참 간양 사람들은 이상했다.
먼저 다가온다.
겁내지 않는다.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무림인들의 세력 다툼에 불과한 일에 피해를 본 것은 결국 그들이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 무너졌고, 불태워져 재산을 잃었음이다.
도리어 자신들을 소 닭 보듯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어느새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그들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팽천기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년 사내를 밀어내려는 것을 황보인이 막고 고개를 저었다.
“형님?”
“…….”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황보인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순박하기만 한 눈동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황보인은 가만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이 뭐냐?”
“조충입니다!”
“조충, 기억해 두마. 언젠가 꼭 황보가로 찾아오너라.”
황보인은 아이의 손에 은전 하나를 쥐여 주었다.
“…….”
너무 큰돈인지라 아이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아비와 황보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구 대협, 너무 과한…….”
“아닐세. 언젠가 나와 함께 황보가의 주축이 될 아이를 위한 것이야.”
“…….”
황보인의 말에 사내가 아이를 툭 하고 쳤다.
“가, 감사합니다. 대협!”
아이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손안의 은전을 움켜쥐었다.
황보인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간양의 어느 곳으로 가든지 반응은 한결같았다.
여인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부담스럽네요.”
팽천기가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황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근처의 객점으로 들어갔다.
“아이구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객점 주인의 반응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아, 술을……. 창가 자리가…….”
“저희 객점에서요?”
“안 되는……가?”
황보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객점 주인이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미리 창가에 자리를 잡은 자들을 향해 다가간다.
“어이, 비키게.”
“뭐시여?”
“아, 술값 안 줘도 좋으니까 딴 자리로 옮기게. 아니면 나가든가.”
무슨 저런 강짜가 있단 말인가? 장사하는 사람이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되레 민망해진 황보인이 사과를 하려는데 먼저 앉은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구, 황보 공자께서……. 허, 이 사람 진작 말했으면 서둘러 비켜났을 것을!”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이 황보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들이 술자리에 앉자마자 객점 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술을 마셔도 ‘캬!’
안주를 집어먹어도 ‘옳거니!’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
팽천기는 그들의 친절함이 부담스러운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겪어 보지 못한……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정말 이상한 곳입니다.”
“그래. 참, 이상한 곳이지.”
술잔을 들이켜며 황보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협이라…….”
“…….”
물론 처음이다.
파락호라는 말은 들어 보았다. 멸시에 가득한 눈초리도 겪어 보았다.
하지만 이곳 간양에서는 어딜 가나 자신을 대협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서천맹을 도망쳐 왔다.
진소청이라는 괴물이 없었다면 진작에 전장을 이탈해 가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황보인은 지나온 기억들을 회상하는 사이 객점 주인이 간양의 특산주라며 가져온 술병이 금세 비워졌다.
“형님, 과합니다.”
“글쎄……. 왠지 기분이 좋아서…….”
“예?”
“지킨다는 것 말이야.”
“…….”
“들게. 왠지 기분이 뿌듯하지 않은가?”
황보인이 웃었다.
팽천기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익숙지 않은 반응…….
왠지 울컥하는 느낌에 눈이 뜨거워졌지만 이런 생소한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변해 가는 것일지도…….
그래도 술은 사람들 없는 곳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시각 진가의 연무장.
촤자작!
어둠이 내려앉은 진가의 연무장에 검격이 번뜩임을 만들었다.
서문중걸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지만 가슴의 답답함이 좀처럼 후련해지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릿했다.
수십 년 전 방유현이라는 괴물과 척을 지는 바람에 무너진 서문세가는 도약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오대 무가에서 떨어져 나갔고, 절치부심하여 자신이 칠룡의 자리에 올랐었지만 누구도 서문세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동생인 서문란은 가문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파락호로 취급받던 황보인과 어울려 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모두가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강해지면 모두가 다시 서문가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서천맹의 창설.
서천맹주가 된다면 모두가 다시 서문세가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중원 제일가를 다툴 것이라 생각했다.
가문의 장자인 자신이 일으켜 세우리라 생각했다.
격체전공이 성공한 뒤에도 쉬지 않고 수련했다.
얻어 낸 성취에 만족하지 않았다.
황보인에게 졌을 때만 해도 약간의 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소강을 보았을 때는 좌절감이 들었고 진소청을 보았을 때는 경외감이 들었다.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어 보였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고작 변방에서 당가의 위세에 눌려 살아가던 가문에 불과했다.
고작 천대받는 창술에 불과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서문가의 서가에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뛰어날 것이었다.
그런데 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차이인가…….’
자신이 곧 서문세가라 생각했다.
가문의 무인이야 얼마나 죽어도 자신만 살아남으면 된다 여겼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하지만 소청은 달랐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의 싸움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겁’이라는 것이,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가장 먼저 전장에 뛰어들고 마지막까지 퇴로를 지켰다.
홀로 마천의 일만 무인을 막아섰고 그들의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내상을 입고도 혈승과 일합의 승부를 겨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쳇!”
쨍그랑!
서문중걸은 짜증스럽게 검을 던져 버렸다.
내공을 쓰지 않고 육체적인 힘만으로 검술을 펼쳤기 때문인지 찢어진 손아귀에서 피가 흘렀다.
“오라버니…….”
수련을 멈춘 그를 향해 서문란이 다가왔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서문가의 연화대(蓮花隊)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소가주님…….”
“…….”
서른…….
처음 사천에 들었을 때만 해도 삼백이 넘던 인원이었다.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구는 제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 관계도 없는 무인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버렸음이다.
“미…….”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라 왔다. 남위에 서서 살아가야 하는 가문의 소가주였기에 배워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행동은 항상 옳았고,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시비가 있으면 잘잘못 이전에 상대가 먼저 사과를 해 왔다.
그런데 이 죄스러운 마음은 무어란 말인가?
“아니! 소가주님, 손이!”
연화대의 적성이 놀란 표정으로 제 옷을 찢는다.
“어서 가서 약 상자를 얻어 오게!”
그러곤 다급히 서문중걸의 손을 감싸 쥐고 찢어 낸 천을 감았다.
신주단지 다루듯이 소중하게 여미는 그의 모습에 서문중걸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자신이 뭐라고…….
버리고 도망친 자신이…….
뚝, 뚝…….
손을 감싸던 천 위로 물이 떨어져 핏물을 씻어 낸다.
적성이 고개를 들었다.
서문중걸의 눈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미안……”
“…….”
“미안하다. 모두……. 지켜 주지 못해서…….”
서문중걸이 혼잣말처럼 메인 목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적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습니다, 소가주님. 괜찮습니다.”
되레 적성이 그를 끌어안고 위로했다.
“어찌 저희들에게 눈물을 보이십니까? 소가주님 덕에 저희까지 간양 사람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
“다들 그러더군요. 혹, 별동대의 영웅이신 서문중걸 님과 같은 가문이 아니냐고요. 덕분이 살았다면서 감사해하더군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고마워했습니다.”
적성의 말에 서문중걸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뿌듯합니다. 소가주님께서 서문가의 위상을 드높이신 겁니다. 이젠 사람들이 서문세가를 압니다. 다들 알아요. 예전처럼…….”
적성이 서문중걸을 안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어찌 이리 따뜻하단 말인가? 어찌 이리 포근하단 말인가?
“아니 약 상자 가지러 간 추강이 놈은 뭐 하는 거야!”
“그러게 말일세. 내가 다시 갔다 오겠네!”
연화대의 무인들이 역정을 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날 밤, 모처럼 서문가의 무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