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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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7화
126화. 모순(矛盾), 창의 승리
전선의 어느 곳도 치열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죽고, 죽이고, 또 죽여야만 했다.
쉴 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지 않기 위해 팔 근육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검을 휘둘러야 했다.
평온했던 간양의 전역이 시체로 가득 차고 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전선의 중심이 된 곳.
쩡! 쩌어엉!
검은 마기와 백색의 강기가 부딪칠 때마다 조각난 기운의 파편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두 개의 기운이 뒤섞여 만들어 낸 반구형의 공간은 치열한 전장에서 분리된 또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공할 위력의 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에 휩쓸린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갔다.
쾅! 우지직! 쿠르릉!
천지가 요동치고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곳은 오로지 그들만이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휩쓸리는 순간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흔적은 사람이 만든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화는 없었다.
그들은 치열한 공수를 주고받으며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뒤로 물러나는 순간 패배를 선언해야 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쑤웅!
뻗어나간 창이 섬전처럼 마라강기의 틈 속을 파고들었다.
꿰뚫린 곳이 넓게 원을 그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뭉쳐져 소청의 창을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회수되었다가 쏘아진 창이 수십 가닥의 선을 만들어 내었다.
까가가가강!
나누어진 마라강기가 창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터트려졌다.
순간 터트려진 강기가 되돌아오기도 전에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창대가 구자겸의 전신을 난자했다.
쩡! 쩌저저정!
하지만 공처럼 감싸진 마라강기를 뚫고 구자겸의 근처까지 닿지 못했다.
소청은 일보월하를 짧게 끊어 내며 더욱 빠르고 간결하게 움직였다.
틈을 만들기 위해 쉬지도 않고 몰아쳤지만 번번이 마라강기에 막혔다.
도무지 틈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구자겸 역시 쉬지 않았다.
수천 개의 바늘처럼 나누어진 마라강기가 소청의 전신을 노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늦어진다면 벌집처럼 꿰뚫릴 것 같았다.
원을 그리 듯이 구자겸의 주위로 돌던 소청이 마라강기가 멈칫하는 순간 창을 찔러 넣었다.
까앙!
날아오는 창끝을 튕겨 낸 구자겸이 찌릿하게 전해지는 충격에 다음 공격을 이어 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후우…….”
튕겨 나온 창을 움켜쥔 소청 역시 잠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주위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소청의 눈에는 구자겸 하나만 보였다.
지이-잉.
“…….”
힘주어 움켜쥐었음에도 창의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라강기가 잠시 느려진 틈을 타 최대의 속도로 찔러 넣은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걸 막다니…….
괴물 같은 새끼…….
기련산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만큼 강한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있다.
소청이 모든 것을 뚫는 창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막는 방패였다.
수백 초를 쏟아붓고 단전이 완전히 빌 때까지 몰아쳤음에도 그의 전신을 감싼 마라강기를 뚫지 못했다.
정말로 강하다. 같은 편이었다면, 친구였다면 술이라도 한잔 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자겸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청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이만큼이나 강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늘…….”
그 역시 소청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존재.
언제든지 짓밟아 놓을 수 있는 벌레 같은 놈에 불과했다.
그런 자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 너무도 치욕스러웠기에 스스로를 가다듬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하급 무인이 강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구자겸 같은 고수가 어떤 벽을 뛰어넘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한 성과였다.
일전에 포로를 구하러 왔던 그와 부딪쳤을 때 내상을 입은 것은 자신이 성급했던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소청은 달랐다.
너무 강해졌다.
사람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망할 놈의 신이 그에게 모든 것을 준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윽.
구자겸은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
“중원은 정말로 끈질겨. 밟아도, 밟아도 끊임없이 일어나지.”
“…….”
“잡초 같은 것들…….”
구자겸이 전장을 훑어보다 소청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좋아, 좋아. 인정하지. 네놈은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네놈만 죽이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아. 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 네놈들을 죽여 주마. 사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 주겠다.”
“거 더럽게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
“덤벼, 죽여 줄 테니까.”
둘은 무공뿐 아니라 말싸움에서도 지려 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쏟아 내었다.
구자겸은 지쳐 있다.
소청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려 왔다.
“후우…….”
소청이 가볍게 호흡했다.
잠시 호흡을 고르는 사이 단전에 공력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어떤 공격으로 놈의 방어막을 뚫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초식? 이미 수백 초도 더 겨루었다.
속도? 구자겸이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지만 마라강기가 살아 움직이듯 그의 몸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그때도 그랬다.
마지막 순간에 세 곳의 혈을 모아 사용한 삼태극의 천뢰충파.
그 한 방으로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천뢰충파의 기운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온 힘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단중, 백회, 명문, 회음. 그리고 단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운은 두 번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소청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만약 실패하면…….
‘쳇, 죽기밖에 더하겠어?’
소청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조건 뚫는다.
어떻게든 놈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마라강기를 뚫어서 놈의 가슴에 창을 박아 넣는다.
머릿속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꾸우욱.
소청이 창대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양발이 흙을 파헤치며 넓게 벌어졌다.
“뒤를 생각하지 않겠어. 이것이 나의 전부다.”
우우우웅!
소청의 창대가 눈에 보일 정도로 잘게 진동하며 긴 울음을 만들어 내었다.
단중의 화기가 천천히 이동했다. 단전의 기운에 느리게 섞여 들더니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화르륵!
변화.
단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푸른 불꽃이 소청의 전신을 감싸고 타올랐다.
파라라락!
푸른 빛을 뿌리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떠올랐다.
단전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태극의 회전이 점차 빨라졌다.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갈 듯이 요동치는 기운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그그그…….
전신이 떨려 왔다.
소청은 두 개의 기운이 계속해서 응축되고 태극의 농도가 짙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소청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엄청난 압력으로 몸을 짓눌렀다.
소청이 가진 모든 힘으로 공격해 오리라는 것이 충분히 느껴져 왔다.
주륵…….
땀?
구자겸의 눈이 씰룩거렸다.
땀을 흘려 본 적이 언제였던가?
더욱이 몸을 혹사시켜서 흘리는 땀이 아니었다.
설마? 놈의 기운에 이리도 긴장하고 있는 것인가?
구자겸의 콧잔등이 수십 개의 골을 만들며 찡그려지고 핏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어금니가 강하게 다물어졌다.
쿠우우우…….
소청이 힘을 끌어 올리듯이 그의 몸에서 시커먼 마라강기가 뿜어져 수십 겹으로 휘말리기 시작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양측이 모두 지쳐 있다. 무수한 피해를 입었으니 수장을 잃은 무리에게 남은 것은 패배일 뿐이었다.
소청만 죽이면 전쟁은 끝난다. 사천은 마천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 순간.
멈췄다.
고오오오…….
대기가 흐름을 멈추는 순간 소청의 두 눈이 푸른 불꽃을 뿜어내었다.
파앙!
뒤로 몸을 물렸던 소청이 지면을 파헤치며 쏘아졌다.
슈우우우-!
창이 뻗어져 나왔다.
소청의 몸에서 불타오르던 푸른 화염이 창대를 향해 쑥 하고 빠져나갔다.
진, 천뢰충파! 청염(靑炎)!
“오냐, 받아 주마!”
구자겸은 피하지 않았다.
양손을 뻗어내자 사방으로 펼쳐졌던 마라강기가 그의 손 앞으로 겹겹이 덧씌워져 거대한 방패를 형성했다.
쩌어-엉!
청염이 마라강기에 부딪히며 강렬한 음파를 만들어 내었다.
쩡, 쩡, 쩌엉!
청염은 마라강기를 한 겹씩 부수며 전진했다.
‘크으윽!’
청염이 마라강기를 찢어발길 때마다 충격이 내뻗은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천근의 힘으로 지면을 딛고 선 두 발이 계속해서 뒤로 미끄러졌다.
팔뼈가 뒤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청염의 기운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됐다!”
일순간 소청의 힘이 흩어졌다.
그 순간의 희열은 절정을 맛보는 순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막은 것이다.
이긴 것이다!
이제…….
휘오오오오!
“……!”
잠시 뒤로 빠졌던 소청의 눈에 짙은 백색의 기운이 어리고 창이 다시금 질러진다.
‘서, 설마?’
차갑다.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가 사방을 집어삼켰다.
북해의 주인, 북천대공 백효에 근접할 정도로 엄청난 한기가 소청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진, 천뢰충파! 빙뢰(氷雷)!
쩌엉! 쩡!
또다시 부딪쳐 왔다.
짜자자작!
창의 극점이 마라강기를 뚫고 균열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쩌어엉!
부서졌다.
마라강기가 돌을 맞은 동경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콰곽!
“크으윽!”
창극이 구자겸의 왼쪽 가슴을 뚫고 깊이 박혔다.
다행히 살짝 비껴 나 심장은 무사했다.
하지만 창대에 스민 차가운 한기에 심장이 얼어붙어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조각난 마라강기의 검은 빛이 옅어지며 사라졌다.
졌다.
진 것이다.
털썩.
주르륵, 하며 긴 족적을 남기고 밀려난 구자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하학!
입에서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흐려지는 눈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소청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의식이 멀어지려는 순간 심연에서 시작된 한 가닥의 살심이 그의 심장을 세차게 두들겼다.
두근!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시작된 역천의 진언.
죽여 버리겠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두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기가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뇌를 향해 치달렸다.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더라도 네놈만은!
푸욱!
“끄어어…….”
날을 세운 손이 구자겸의 단전을 헤집었다.
그의 단전에 가득했던 마기가 소청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끄아아아아!
그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마기의 기운이 비명을 질러 대는 것만 같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 달라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꽉.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소청의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구자겸을 내려다보았다.
단전에서 빠져나온 손이 핏물을 짜내듯이 움켜쥐어졌다.
쩌억!
소청의 주먹이 그의 안면에 틀어 박혔다. 코뼈가 주저앉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쩍! 쩍쩍!
뼈 부러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쉬지 않는다.
단전의 내공이 내질러지는 그의 주먹을 통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소청의 주먹은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콰직! 콰직! 콰직!
조금만 더 빠르게 마기를 결집했다면 좋았을 것을…….
멀어져 가는 구자겸의 의식과 함께 뭉쳐지지 못한 마기가 흩어졌다.
쩍, 쩍, 쩍…….
소청의 주먹에 실렸던 기운이 약해지고 내지름의 속도가 둔화되었다.
“하악, 하악…….”
소청의 주먹이 멈췄다.
뚝. 뚝. 뚝.
주먹에서 흥건하게 맺힌 핏물이 떨어졌다.
그의 손에 멱살이 잡힌 구자겸은 축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 놓았다.
“하악, 하악…….”
거친 숨을 몰아 내쉰 소청이 고개를 들어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쟁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