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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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22화
121화. 전투의 시작
서천맹의 성벽 위.
삼엄한 경계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교전은 없었지만 그들은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만 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 된다. 틈을 보이면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다!”
성벽의 경비를 담당한 열화사의 맹곡이 서슬 퍼런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계를 담당한 축융단의 무인 중 하나가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짜악!
“크윽!”
“이놈! 누가 졸아도 좋다고 했나!”
맹곡이 졸았던 무인의 등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충마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다.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무인이 짜증스럽게 맹곡을 노려보았다.
“쏟아지는 졸음에 잠깐 눈을 감은 것뿐이오!”
“뭐라? 이놈이!”
맹곡이 눈을 부라렸지만 무인은 되려 화를 내며 대들었다.
“흥, 네놈들은 교대로 쪽잠이라도 자지만 우리는 사흘을 한숨도 못 잤단 말이다!”
“닥쳐라. 이놈! 누가 쪽잠을 잤단 말이냐!”
맹곡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봐! 누가 우리 쪽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나? 네놈들 수하나 신경 써!”
옆의 경비를 맡고 있던 축융단의 천웅이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네놈들이 자꾸만 졸고 있으니 하는 소리 아니냐!”
“그건 네놈이 신경 쓸 바 아니다!”
맹곡과 천웅이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를 듯이 노려보았다.
삐이익!
그 순간 동쪽 성벽에서 날카로운 호각성이 들려왔다.
“적이다!”
동쪽 성벽에서 호각성이 울리고 서천맹 내부가 또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할 말이다!”
맹곡과 천웅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경계 병력을 남기고 모두 동쪽 성벽으로 이동해라! 놈들에게 길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맹곡의 외침에 경계를 서고 있던 열화사의 무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몸을 날렸다.
벌써 사흘째.
여전히 서천맹의 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허물어진 성벽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밤에는 엄청난 고수들로 구성된 놈들이 쉬지 않고 기습해 왔다.
공격과 동시에 내부를 휘저어 놓고 바람처럼 물러나는 터라 적이 몇 명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더욱이 낮이 되면 적들이 총공세를 펼쳐 오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수들은 내공으로 근근이 버티는 중이었지만 대다수의 무인들이 식수와 식량의 부족, 잦은 전투로 인해 지쳐 가고 있었다.
극심한 피로는 그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마천, 대막혈궁, 열화사, 축융단.
네 곳의 무인들은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마찰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서천맹의 성안에 고립되었고, 탄탄했던 결속력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진소청, 그놈인가?”
구자겸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예. 야간의 기습은 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망할 놈이…….”
진소청에게 입은 내상이 너무 심각했다.
몸을 회복하는 사이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 버렸다.
“적은 얼마나 되나?”
“그것이…….”
충마가 감히 구자겸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급기야 적들의 공격에 고립된 채 피해만 입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화가 치밀어 오른 구자겸은 손에 들고 있던 충마를 향해 던져 버렸다.
챙그랑!
자기로 만들어진 잔이 깨어지고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렵게 구해 온 식수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내부가 혼란스럽습니다. 각 세력의 수장들이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만,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진 터라…….”
끝말은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말은 이미 전해 들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성도로 은밀하게 내보냈던 무인대 중 일부가 적의 매복에 당해 식수와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이만…….
수가 너무 많았다.
성도를 약탈해 먹을 것을 구해 오기는 했지만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보통 사람은 하루 이틀 정도의 배고픔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하물며 무인들이라면 며칠 정도는 끄떡없었다.
하지만 잦은 전투는 그들에게 지독한 허기를 느끼게 했다.
식수와 식량이 수뇌부를 중심으로 나누어지다 보니 하급 무사들의 허기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고립되었다’는 불안감은 그들의 배고픔을 더욱 충동질했다.
“혼란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열화사의 주인 문성준과 축융단주 노독형이 한 목소리로 간언했다.
“닥쳐라!”
구자겸의 일갈에 전각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긍지 높은 마천의 무인들이 고작 목마름과 허기 따위에 휘둘린단 말이냐!”
구자겸이 문성준과 노독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통제가 되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죽여서 본을 보이라!”
“…….”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찌푸렸다.
마천의 무인이라고 해 봐야 충마가 이끌고 있는 전충사와 구자겸의 호위들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마천에 복속된 대막혈궁의 무인들이었다.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그들의 본궁이 사도련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역사를 이어 온 무인들의 목숨마저 죽이라 한다.
비참하고 명예롭지 못한 죽음일 뿐이었다.
쓸모없는 성을 지키기 위해 고사(枯死)할 바에는 적과 싸우다 죽어야 했다.
이만의 병력?
그 많은 숫자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독이 되었다.
“대공.”
좋지 못한 분위기를 직감한 충마가 구자겸에게 말했다.
“말하라.”
“대공, 일단 서천맹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
충마의 말에 구자겸의 눈이 씰룩거렸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그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솟구쳐 올랐다.
턱!
피어난 마라강기가 충마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다시 말해 보라. 뭐를 어찌해야 한다고?”
“컥, 컥. 물러나야 합니다.”
“마종께서 내게 직접 내린 명이다.”
“…….”
“네놈이 멍청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구자겸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폭발해 나오자 목을 짓누르는 마라강기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숨이 막히고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 이미 혈마궁에 전서를 보냈습니다.”
“…….”
“이곳의 상황을 알리고 지원군을 보내 달라 했습니다.”
“네놈이…… 마종께 알렸단 말이더냐?”
“예.”
“마천의 세주 중 하나인 네놈이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그분께 고했단 말이냐!”
“대, 대공…….”
“…….”
구자겸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다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갈았다.
털썩.
“컥, 커억…….”
그의 손에서 마라강기가 풀어져 나가자 바닥에 쓰러진 충마가 억눌린 숨을 토해 내었다.
구자겸의 시선이 충마에 이어 문성준과 노독형, 자신의 호위장인 한려에게까지 이어졌다.
마천이 중원에 나온 첫 전투였다.
서천맹은 중원 정벌의 첫 역사를 장식할 의미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진소청…….’
그 어떤 상대가 나타나도 무림에 자신을 막을 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 합을 나눈 그는 강해져 있었다.
과거에는 자신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내상을 입히고 포로들을 구해 갔다.
밤이 되면 무인들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해 마천을 괴롭혔다.
고작 사흘이라는 시간 만에 강대한 마천의 결속을 부수고 혼란을 만들었다.
그들이 모인 이 순간에도 밖에서는 지친 무인들이 적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천은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장고를 하던 구자겸이 결국 힘든 결정을 내렸다.
“저들의 위치가 어디냐?”
“간양입니다. 진가에 터를 잡고 성도와 간양의 경계를 나누는 산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진가……. 좋다. 서천맹을 버리지.”
“……!”
그 말에 모두가 반색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 서천맹을 버리고 저들을 공격한다.”
“대공, 하지만 무인들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반문을 해도 좋다 허락하지 않았다.”
“…….”
“지금 즉시 간양으로 진격한다. 선두는 열화사, 후방은 축융단이 맡는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필요한 만큼 약탈해라.”
“알겠습니다.”
더 이상 반문은 없었다.
서천맹 정벌의 수장은 구자겸이다.
명령이 내려졌으니 따라야 했다.
“서천맹을 불태워라. 우리가 갖지 못하면 저들도 갖지 못하게…….”
* * *
“뭐라고!”
마천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세운 계획을 빠짐없이 점검하고 있던 제갈상아는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반나절.
이제 반나절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모든 계획이 그 시간에 맞춰서 진행될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비록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밤낮 없는 전투로 지쳐 있을 것인데?
더구나 방향은 간양.
‘이런, 아직 사도련과 운남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지원군의 도착과 함께 즉시 전면전을 시작하려 했던 제갈상아의 마음이 급해졌다.
서천맹의 동쪽을 지키고 있는 병력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서천맹의 병력은 사천.
격체전공을 이룬 무가의 후계들이 열 명이나 있었다.
비록 그들이 도망치긴 했지만 단 두 시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그들이 가진 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자.
갑자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안 돼. 막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쪽도 지쳐 있긴 매한가지다.’
서둘러 계획을 바꿔야 했다.
반나절을 버틸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의 중심에 서 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서둘러야 해.”
제갈상아는 황급히 소진각을 향해 달렸다.
밤사이 적을 공격했던 소청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진 공자! 진 공자!”
소청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이불을 잡아당겼다.
“…….”
졸지에 속옷 차림으로 자고 있던 소청이 눈을 끔벅이며 제갈상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갈상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이 소청의 앞에 앉았다.
“마천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사도련과 운남의 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급한 건 알겠는데 일단 옷 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저들이 공격해 오면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
뭐 이런 여자가…….
“휴우……. 좋아, 나를 깨웠을 때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겠지?”
소청은 한숨을 내쉬며 급히 옷을 걸치고 한쪽 벽에 세워진 창대를 움켜쥐었다.
“반나절, 반나절만 버티면 됩니다.”
“지원대가 그때쯤이면 도착할 모양이군.”
“맞습니다.”
제갈상아가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좋아, 별동대를 깨워.”
소청의 말에 제갈상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존재.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전장, 아니 무인들의 싸움에서 고수의 수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존재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의 수가 수도 없이 늘어나는 법이다.
또한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적들의 고립’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내었다.
“어떤 계획인지 가면서 듣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