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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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19화
118화. 따귀를 때리다
“끄아악!”
얼굴이 문드러져 버렸다.
물을 마신 자는 순식간에 시퍼렇게 중독되어 쓰러졌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마천의 무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저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사태를 확인하러 나온 충마가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물길 세 곳은 막혔고 놈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습니다.”
“저장되어 있던 식량이 모조리 불탔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하루도 버티지 못할 양입니다.”
“…….”
수하들의 보고에 충마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난밤 느낀 불안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놈들은 그저 포로들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당해 버렸다.
소청과 일 합을 나눈 구자겸은 내상을 입어 몸을 추스르고 있었고, 축융단주 노독형은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뒤에 다시 나타난 진소청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마천의 무인들을 희롱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가 막심했다.
한번 부딪칠 때마다 수십이 죽어 나갔다.
더욱이 소청이 사라진 이후 남쪽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비밀 통로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포로는 놓쳐 버렸다.
적이 포로들을 구하러 오길 기다리며 준비한 자신들의 모든 계획은 완전히 어긋나 버린 것이다.
“어찌합니까? 세주님.”
열화사의 수장 문성준이 의견을 물어 왔다.
뭘 어쩐단 말인가?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들 같으니…….
“중독된 자들은 죽여 불태우고 우물을 메워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하라!”
“예? 막는단 말입니까?”
“멍청한 놈!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피해자가 생기면 어찌할 생각이냐!”
“…….”
충마의 짜증스러운 말에 문성준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길…….”
충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적들을 공격해야 했으나 구자겸이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에게 부상을 입힌 ‘진소청’의 존재는 너무나 껄끄러웠다.
구자겸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라면 지금의 마천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적의 전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되레 피해만 볼 수가 있었다.
‘물길을 막고, 독을 풀었다는 것은 설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곳을 포위라도 했단 말인가? 망할, 일단 적의 전력부터 알아야 한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충마는 열화사와 축융단에 명해 서둘러 몸이 날랜 자들을 선발하게끔 했다.
“너희들은 지금 즉시 성 주위에 탐문해 적들의 규모를 파악한다.”
“예!”
척후가 빠져나가자 충마는 서둘러 전서구를 찾았다.
‘일단 다시 연락을 보내 이쪽의 사정이 긴급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서천맹을 공격한 것은 대막혈궁의 본 전력이었다.
마천의 전력 삼 할에 해당되는 그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면 마종은 결코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구자겸이 질책을 당하겠지만 일단은 서천맹이 먼저였다.
“크크크, 이 새끼들 약이 잔뜩 올랐군.”
소청은 서천맹의 성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초사.”
“예, 패월.”
포로들을 신승에게 인도한 뒤 다시 돌아온 초사와 비마대가 소청의 옆에 은신하고 있었다.
“적의 척후다. 놈들이 우리 측의 정보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모조리 찾아서 죽여.”
“알겠습니다!”
초사와 비마대가 은밀히 사라졌다.
막 그들과 함께 몸을 날리려는 순간.
푸드득!
“…….”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서쪽?
소청이 가늘어진 눈이 서쪽을 향했다.
“그래, 역시나 혈마궁도 마천의 손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마종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청은 다시 서천맹의 성내로 눈을 돌렸다.
“급할 것 없지. 차근차근 씹어 먹어 주마. 차근차근…….”
* * *
짜악!
“…….”
포로들이 돌아와 잔칫집 같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제갈상아가 팽천기의 뺨을 거칠게 때려 버린 것이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 네놈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몇이나 죽은 줄 알아!”
“…….”
제갈상아가 고운 눈썹을 치켜세우고 서릿발 같은 한기를 뿜어냈다.
“이, 이년이 감히…….”
얼굴이 벌게진 팽천기가 제갈상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마천이 독정(毒井)에 피해를 보고 식량고가 불타 우왕좌왕하는 사이.
소청의 도움으로 도망친 포로들은 밝아 오는 아침과 함께 간양에 도착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오느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피로감이 가득했지만, 간양에 배치된 무인들을 보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더없이 밝아졌다.
그런데.
돌아온 제갈상아가 오대 무가의 후계들을 보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가 제일 앞선 팽천기의 뺨을 후려쳤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어, 이 개새끼들아!”
“…….”
“네놈들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바람에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모두가 그렇게 죽지도 않았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어!”
“이, 이년이 미쳤나. 전략 같지도 않은 전술을 세운 게 누군데 그따위…….”
“아가리 닥쳐!”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거친 언사를 내뱉는 제갈상아의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 진정하게.”
보다 못한 신승이 그녀를 말렸다.
“자네들도 그만 물러가게. 괜한 분란만 생길 것 같으니…….”
“이, 이…….”
팽천기의 콧구멍이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쌍욕을 먹은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노려보는 제갈상아의 눈을 파 버리고 싶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서문중걸이 막아섰다.
그들은 적에게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온 것도 모자라 지난밤에도 진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정천의 인물들은 물론 살아 돌아온 오대 무가의 무인들조차 자신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아! 공성전? 지랄하고 있네. 전략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것들이! 캬악! 퉤! 너희들 같은 것들이 정천을 좀먹는 거야!”
“자, 자.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세.”
신승이 애써 달래며 잡아당겼지만 제갈상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뭘 봐? 꺼져! 이 새끼들아!”
신승에 의해 끌려가면서도 제갈상아는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구, 군사께선 정말 대단한 성격이군요.”
소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옥명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일전에 제가 소문이 자자하다고 말씀드렸었죠? 제갈가가 그녀의 뛰어남을 알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옥명자의 소곤거림에 소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모두가 속은 시원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체면 때문에, 그들이 가진 신분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형님은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아, 이 공자께선 참가하지 않으셨지요? 그분께서는 스스로 미끼가 되셨습니다.”
“미끼요?”
“예. 그분 덕에 적들에게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나마 그분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홀로 포로들을 구하실 줄은…….”
“그러니까요. 언제나 혼자…….”
소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단 들어가시죠. 논의할 사항이 많은 듯하니…….”
“예.”
소강과 옥명자는 신승의 뒤를 따라 가주전으로 향했다.
진가의 가주전에 오대 무가를 제외한 정사의 무인들이 모였다.
“…….”
자신들이 잡혀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확인한 제갈상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할 것이 없었다.
이미 소청에 의해 서천맹을 무너뜨릴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진소청……. 숙부께서 왜 그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지 알겠어.’
그가 세운 계획은 공성전에 있어서 최적의 전략이었다.
‘말투며 차림새는 거칠기 짝이 없었는데 오대 무가의 멍청이들에 비하면 봉황이네, 봉황이야. 그런데 적을 어떻게 고립시킬 생각이지?’
그 한 가지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갈상아는 진소청을 생각하자 정수리가 쓰라려 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의 머리를…….’
제갈상아가 잠시 회상하는 사이 진소청에 대한 칭찬이 오고 갔다.
“정말이지 대단한 아드님들을 두셨습니다. 위험함을 알기에 차마 포로들을 구해 달라 하지 못했는데……. 정천이 또 한 번 그에게 신세를 지는군요.”
“모두 구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신승의 말에 진가신의 겸양을 보이자 또 한 번 칭찬이 이어졌다.
비록 수천 중 몇백 명만이 돌아왔지만 포기했던 목숨이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곤륜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청성도…….”
“아미도…….”
저마다 고개를 숙여 오자 진가신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잠시나마 욕심을 내었던 ‘서천맹주’의 자리는 이제 관계없었다.
아들들은 갈수록 진가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저들을 어찌 공격할까 하는 것인데…….”
신승이 좌중을 정리하고 제갈상아를 바라보았다.
다소곳하게 앉은 그녀에게서 좀 전까지만 해도 진가의 정문 앞에서 쌍욕을 해 대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공격하지 않습니다.”
“뭐?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신승이 그녀의 말을 반복하듯 물었다.
“예. 진소청 공자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저들을 고립시키고 기다리려는 것입니다.”
제갈상아는 그저 벌어진 상황만으로도 소청의 생각을 예측해 내었다.
“고립을 통해 저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라고? 저들에게?”
“예. 식수와 식량의 고갈로 인해 저들은 불안감을 느낄 겁니다.”
“적들에게 혼란이 일어난다?”
“예. 때를 맞춰 북쪽의 사도련, 남쪽의 운남이 압박한다면 그 혼란은 점점 더 가중될 겁니다.”
그녀의 말에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면 서쪽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포위하되 너무 궁지에 몰아서는 안 됩니다. 도망갈 길은 항상 열어 두어야지요. 그렇기에 진 공자께선 서쪽을 비워 둔 것 같습니다.”
“하긴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누군가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저들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을 고양이라 불러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든 쥐든 중요하지 않았다.
사기가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문제는 저들의 고립을 계속해서 유지시킨다는 것인데…….”
제갈상아가 고심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적들은 분명 잔뜩 독이 올라 있을 터였다.
당장에 공격해 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건 내가 해 주지.”
“…….”
그녀의 고민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소청이 해결해 주었다.
“오! 진 공자! 돌아왔는가.”
마음이라도 맞춘 듯 모두가 일어나 그를 반겼다.
“자, 이리 앉게.”
신승이 상석을 내어 주며 그를 불러들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곳이 편합니다.”
소청은 신승이 비켜선 자리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되레 자리를 내어 준 신승이 머쓱할 정도였다.
신승은 상석을 양보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의자를 돌려 앉았다.
‘대단하군. 이제껏 정천을 이끌어 온 누구도 이만한 신뢰를 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제갈상아는 내심 소청에 대해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저들을 어찌 고립시킨단 말이죠? 우리의 전력을 알게 되면 당장 공격해 올 것인데?”
제갈상아가 의문을 가지고 말했다.
“모르게 해야지.”
“어떻게 모르게 한단 말이죠? 분명 이미 저들의 척후가…….”
“앞으로 하루 정도는 저들의 척후가 우리를 파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도통 소청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루 동안 저들의 척후를 봉쇄했다 치더라도 다음은?”
“걱정 마.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사흘, 사흘 동안 전면전을 위한 계획을 세워라 군사.”
“그게 무슨!”
제갈상아가 이를 갈며 소청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다.
모두가 그녀의 말보다는 소청을 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