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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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55화
154화. 관의 제재가 시작되다
호북성 무한(武漢).
장강 상류와 한수가 만나는 물길과 맞닿은 그곳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거대한 성곽.
이전에는 정천맹이었고 지금은 정사 무림 연맹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마천이 수면 위로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무인들이 성의 외곽에 기거를 하고 크고 작은 무관들과 병기를 생산하는 대장간이 많았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무인들이 서천맹으로 빠져나간 뒤로 남아 있는 것은 정사 연맹의 수뇌부와 원로원, 각종 정보를 취급하는 자, 그리고 기본적인 방비를 위한 무인들뿐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한산했던 그곳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창검으로 무장한 관병들이 줄을 지어 정천맹 안으로 들어와 열을 지어 대기했고 무황의 노기가 천추관을 가득 채웠다.
정사 무림 연맹의 대전각 천추관.
양쪽으로 나누어진 그 내부에 무황을 중심으로 한 무림의 원로들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반대편에 갑주로 무장한 장수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무림을 조사하겠다는 말이오?”
무황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배어 있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자(獅子) 흉배에 무소의 가죽으로 만든 화서대(花犀帶)를 착용한 곤색 관복의 노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는 호남성주 예하의 정이품 군후인 이상백이었다.
“당연하다?”
빈정거림이 섞인 무황의 어조에 이상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무림계의 거두라고 하나 그저 한낱 무부에 지나지 않은 자였다.
어찌 일 성의 군권을 좌지우지하는 자신에게 그 같은 고압적인 자세를 보인단 말인가?
이상백은 그들이 마련한 자리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등한 위치라니?
응당 상석을 내어 주고 단 아래 무릎을 꿇거나 시립해 자신을 맞이해야만 한다 생각했다.
‘쯧, 무림인들이란…….’
이상백은 평소 아무 곳에서나 칼을 들고 설치는 무림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해 온 자였다.
만약 태조의 ‘관무불침’이라는 말만 없었어도 진즉에 관병을 끌고 와 쓸어버렸을 놈들이었다.
“관무불침의 금기를 깨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무황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상백을 노려보았다.
“어허! 정이품 군후이신 분이오! 말을 함에 예를 다하시오!”
이상백의 뒤에 서 있던 장수 웅진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이 호통을 쳤다.
“예를 다하라?”
무황의 시선이 웅진을 향했다.
“허억!”
무덤덤하던 그의 눈에서 짙은 살기와 함께 막대한 압력이 몸을 짓눌러 오자 웅진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름 군문에서는 알아주는 무예를 가진 장수였고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그였다.
하지만 무황의 기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웅진, 중원 무림의 수장이다. 물러나거라. 그대도 그만하시오.”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이상백이 중재를 하자 무황이 그를 노려보다 화를 가라앉히며 기운을 풀었다.
“허억, 허억…….”
중재를 하였지만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웅진의 모습에 이상백의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멍청한 놈 같으니…….’
기세 싸움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웅진이 나서는 바람에 선수를 무황에게 빼앗긴 것이다.
“아무리 관무불침의 금기가 있다고 하나 민가의 이곳저곳에서 피해가 일어나고 있소. 무림인들의 짓이 분명하니 응당 조사를 해야 함이 아니겠소?”
“조사라. 하면 민가의 살겁이 우리 측의 짓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게요?”
무황이 이상백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흉포함을 잔뜩 머금고 있었기에 이상백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찾아온 걸음이니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상백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답게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했다.
“증거? 넘쳐 나는 것이 증거요.”
“허, 넘쳐 난다?”
무황이 눈을 씰룩거렸다.
“마치 범인을 안다는 이야기인 것 같소만?”
“범인은 무림인이오.”
“이!”
하마터면 진기를 발출해 이상백의 목을 꿰뚫어 버리고 뒤에 있는 장수들을 싹 쓸어버릴 뻔했다.
너무나 모호하지 않은가?
‘범인은 무림인이다.’라는 말은 중원 무림의 모든 이들을 용의 선상에 올리겠다는 말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사건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호북성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의 일체의 외부 활동도 허락하지 않겠소. 각지로 연락을 보내는 것은 물론 허락받지 않은 이동을 금할 것이오.”
“이런 말도 안 되는!”
급기야 원로들에게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상백은 개의치 않았다.
“또한 각 파에 관인들이 파견되어 감찰할 것이며 불응할 시에는 흉적으로 간주하고 군병을 동원해 참살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제까지 그리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찌 공문 한 장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단 말입니까. 협조할 수 없습니다.”
무황이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하자 제갈휘문이 중재를 위해 나섰다.
“협조? 흥!”
이상백은 품에서 종이와 천을 덧대어 만든 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도지휘사(都指揮使)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서일세.”
“…….”
“이미 사천, 섬서를 비롯하여 각 성에 전달되었지. 다시 말하지만 협조하지 않을 시에는 그 대가를 치를 생각을 해야 할 것이라 이 말이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더 이상 반문을 할 수는 없었다.
도지휘사라면 황군을 장악하고 있는 오군도독부의 명을 받는 관직이었다.
치안 유지는 그들의 본분이니 굳이 황명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아무리 관무불침이라 해도 민가를 습격한 범인을 색출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들어온 이상 반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감히 대가라 했느냐.”
결국 무황이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기세를 뿜어내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천추관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우르르르…….
어마어마한 힘의 기세에 이상백은 물론 장수들까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너무 강했다.
그저 화를 냈을 뿐인데 대전 안의 공기가 만근의 힘으로 짓눌러 왔다.
장수들은 그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벌써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으읍, 이렇게 강한…….’
무릎이 주저앉는 것 같았다.
무황의 기운에 식은땀이 흐르고 살인적인 압박감에 몸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지만 버텨 내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중원 무림의 최고수라고 하나 그저 무인일 뿐이었다.
관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쫓기게 될 일인데, 만약 삼품 군후인 자신을 죽였다가는 무림 전체가 황군에 의해 쑥대밭이 될 것이다.
고작 겁을 주는 것밖에 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수치스러웠다.
무황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일개 무부의 앞에서 굴욕을 당한 것 같아 화가 솟구쳤다.
‘이놈, 언제고 네놈에게 갚아 줄 것이다.’
이상백이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린 눈으로 무황을 노려보았다.
-고정하십시오. 저들에게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저들의 요구에 응해야 합니다.
혹여 무황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 걱정한 제갈휘문이 급히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무황도 알고 있었다.
겁을 줄 목적이지 관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화가 나도 참아야만 했다.
“후우, 좋다. 그대의 말에 따르지. 하나 그대들의 조사를 언제까지나 지켜보겠다.”
“흥.”
무황의 기운이 사라지자 숨통이 트인 이상백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과하게 짜증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컥, 철컥.
이상백을 필두로 천추관을 빠져나가는 장수들의 갑주 소리가 요란하게 천추관을 울렸다.
“망할 놈들이…….”
성격 같아서는 일장에 쳐 죽여 버렸을 것인데 참아야 했던 무황이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당장에 대책을 논의해야겠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화만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겨진 제갈휘문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천의 위협이 코앞인데 이 무슨 사달이란 말인가?
저들은 조사를 한다는 명목하에 각종 자료들을 마음대로 훑을 것이고 통이각(전서구)을 접수해 중원으로 정보를 보내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백이 분명히 말했다.
사천과 섬서로도 명령서가 이미 하달되었다는 것.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발이 묶여 버렸군. 이 사태를 어찌한다? 대책을 생각해 내어야 할 것인데…….’
제갈휘문의 미간은 고민만큼이나 깊어져 갔다.
그날 밤.
정사 연맹을 감시하기 위해 주둔한 이상백은 무한 인근 창강(长江)가의 황학루를 강제로 점거했다.
묵고 있던 사람들은 관병들의 칼날에 모조리 쫓겨나고 남은 것은 주루에서 일하는 자들과 기녀들뿐이었다.
장수들이 무희들의 춤을 보며 기녀들에게 술을 받아먹고 떠드는 사이 이상백이 머무는 후원으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찾아왔다.
“멈춰라!”
후원의 앞을 지키는 매서운 기세의 장수가 칼을 뽑아 들고 그 앞을 막았다.
스윽.
여인이 품에서 작은 동패를 꺼내 보이자 장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칼을 집어넣었다.
“충!”
“…….”
공손하게 길을 비키는 장수을 지나친 여인은 후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 어서 오게.”
기녀들에게 술을 받아먹던 이상백은 여인이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반갑게 맞이했다.
“첨사(僉事) 대인을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인사는 무슨…….”
이상백이 자리를 내어 주자 여인이 기녀들을 쓸어 보았다.
“아!”
그녀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이상백은 기녀들을 내보냈다.
“그래, 도독께서는 잘 계시는가?”
“예. 첨사께서 이번 일을 잘 처리하셨다며 흡족해하십니다.”
여인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이상백의 앞으로 밀었다.
또르르륵!
“……!”
구슬을 보는 순간 이상백의 눈이 탐욕스럽게 변했다.
호두알만 한 야명주였다.
손톱만 한 야명주조차 구하기 어려운 판에 호두알만 하니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허, 뭐 이 귀한 걸 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라야 하는 법이 아닙니까?”
“헛헛, 거참. 대가가 무슨 소용인가. 내 도독에 대한 충성심으로 한 일인 것인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이상백은 야명주를 재빨리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래, 얼마 정도면 되겠는가?”
“반년입니다.”
“반년? 그리 길게 말인가?”
“아니 되겠습니까?”
“헛헛, 아니 되다니. 조사야 차일피일 미루며 하면 될 일이니 충분하네…….”
이상백이 술잔을 단숨에 비워 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중요한 것은 조사가 아니라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임을 명심해 주십시오.”
“알겠네. 내 안 그래도 무림인 놈들이 눈엣가시 같았는데, 어찌나 속이 후련한지.”
“…….”
이상백의 말에 여인이 살포시 눈웃음을 흘렸다.
이상백을 포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집안 대대로 무관 출신이었던 그는 두 아들 또한 군문에 진출시켰었다.
한데 그중 하나가 오대 무가에서 배출한 장수와 대련 중에 유명을 달리해 버렸다.
정당한 대련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느 곳에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고, 그들의 집안을 어찌해 보려 해도 ‘관무불침’이라는 금기 때문에 분만 삭이고 있던 참이었다.
평소 무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그이니 무림인들을 괴롭힌다는 것만으로도 이유조차 묻지 않고 따라 주었다.
“그런데 자네의 일이 딱하게 되었네. 남궁가라면 오랫동안 군문에서도 꽤나 인정을 받아 온 곳인데……. 무림의 환란으로 그리되다니…….”
“…….”
여인의 고운 눈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전 남궁세가의 안주인이었던 금성희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 미안하네. 내 아픈 곳을 건드린 게로군.”
“하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알았네. 도독께 내 충절을 꼭 전해 주게.”
“예.”
이상백을 뒤로한 여인, 금성희가 후원을 빠져나왔다.
“흥, 네놈은 그저 하나의 말(馬)일 뿐이다.”
그녀는 일그러진 눈으로 후원을 표독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남편과 아들은 죽었고 남궁세가의 주력이 쓰러졌다.
망할 놈의 정천맹은 마천이라는 단체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남궁가를 죄인 취급하고 버렸다.
하지만 실의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금성희는 진소청에 의해 다리병신이 되어 버린 아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가문을 정비했다.
모두가 진소청이라는 놈 때문이었다.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자신의 아비, 금마강.
그가 구원의 손길을 내려 주었다.
흉폭하기만 한 살인 집단 마천(魔天).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그들과 다시 손을 잡았다.
은밀하게 힘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이미 무림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아비를 이용해 군부를 오가며 수많은 군호들을 포섭하고 세작들을 늘려 갔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혈승 탑리격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군부를 이용해 무림에 제재를 가해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직접 움직였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진소청, 내 반드시 네놈의 피를 마시고 뼈를 씹으리라.”
원독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한스럽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