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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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37화
136화. 습격자들
두우우우웅, 두우둥~.
범종의 울림이 산자락에 은은하게 퍼져 나가며 적막한 새벽을 깨운다.
멀리서 동이 터 오자 산줄기를 따라 빛이 쏟아져 들어와 밤사이 계곡을 돌던 안개가 희미하게 걷혀 나갔다.
맑아지는 전경을 따라 멀리 북쪽으로 공래산이 보이고 청성산이 손안에 잡힐 듯이 드러났다.
그 아래로 험준한 산맥들이 늘어서며 닿은 사천의 서쪽 아미산(峨眉山).
똑, 똑또르르르…….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산중의 고요함을 깨워 다시 세상과 만나게 했다.
범종의 울림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여승들은 줄을 지어 법당으로 향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성상을 모신 대웅전 앞에서 시작되는 새벽 예불과 함께 아미는 아침을 맞이했다.
열세 채로 이루어진 복호사를 기점으로 한 아미파.
천 년을 이어 온 구파의 하나로 때로는 정파의 수장으로 군림한 적도 있는 무림 문파였지만 그 근본은 불가에 두었다.
그들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촥!
새벽 예불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꾸벅거리던 어린 여승의 어깨에 죽비가 내려쳐졌다.
“아얏!”
“…….”
어린 여승, 금정이 시큰한 아픔에 세모눈을 뜨고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예불을 관장하는 율계승(律戒僧)이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크, 하필이면…….’
금정인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미의 율계원을 이끄는 율법 장로 보은신니였다.
아, 깜빡했다.
오늘 새벽 예불을 담당하는 것이 까칠하기로 소문난 보은신니라는 걸.
“쯧쯧, 이리 흐리멍덩한 정신이라니……. 장문인께서 출타 중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만 하거늘!”
“…….”
금정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숙여졌다.
“오늘 아침 발우(鉢盂: 밥그릇) 설거지는 금정이 모두 맡거라.”
보은신니가 예불에 참석한 모두를 향해 외치자 곳곳에서 동배의 여승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마치 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예? 제가 전부요?”
화들짝 놀란 금정의 얼굴이 노래졌다.
대부분의 사형제들이 서천맹으로 이동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수가 백 명이나 되었다.
“그걸 어떻게 제가…….”
“어허! 부당하다 생각하는 게로구나.”
“네…….”
금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우소도 네가 청소하거라!”
“…….”
보은신니의 추상같은 호령에 금정은 입을 다물고 볼을 잔뜩 부풀렸다.
더 이상 말대꾸를 했다가는 일만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진짜 미워!’
고작 열 살밖에 안 됐는데…….
그냥 확 도망쳐 버릴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새벽 예불이 끝나자 사형제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고 수련장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금정은 울상을 지었다.
“금정, 잘 부탁해.”
눈을 찡그린 동배의 금혜가 커다란 목통에 발우를 던져 주었다.
망할 년이…….
아차차, 불손한 언사를 해서는 안 되지. 아미타불…….
금정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며 마음을 다스렸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사리 손으로 목통에서 금혜가 던지고 간 발우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려고 불가에 귀의를 했던가?
열 살의 어린 여승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문득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 사숙 보고 싶다.’
발우를 씻으며 금정이 떠올린 것은 멸절사태의 적전제자인 승혜였다.
비록 속가이긴 했지만 아미의 어린 문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승복을 입어도 감출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외모 하며 개미조차 한 수 접어 줄 잘록한 허리를 가진 늘씬한 몸매…….
장로들조차 함부로 평할 수 없을만큼 뛰어난 창술…….
“이얍!”
슉슉!
금정은 설거지를 하다 말고 승혜의 모습을 흉내 내었다.
철썩…….
“어?”
“…….”
보은신니?
금정이 휘두른 설거지용 천이 보은신니의 얼굴을 때려 버렸다.
“금저엉…….”
“장로님, 이건 저기…….”
무어라 변명하려 해 보지만 붉으락푸르락해진 보은신니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지객당 청소까지 추가다!”
“…….”
아 씨, 진짜!
몸을 돌려 연무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멀어지는 보은신니의 모습에 금정이 투덜거리며 발우를 씻었다.
발우만 해도 반나절은 걸릴 텐데 해우소에 지객당까지 청소하려면…….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겠다.
목통 안의 발우가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자 금정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설거지 천을 던져 버렸다.
“안 해! 안 한다고!”
어린 마음에 금정은 차라리 도망쳐 버려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발우? 청소?
에잇, 될 대로 되라지 뭐!
미리 봐 둔 개구멍도 있고 간간이 모아 둔 동전도 있으니 차라리 아랫마을에 내려가서 당과나 사 먹어야겠다.
생각을 굳힌 금정은 발우를 내팽개쳐 두고 한걸음에 숙소로 뛰어갔다.
“세주님, 어린 여승 하나가 빠져나갔습니다.”
복호사가 자리한 금정봉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여인, 교아가 다가와 보고했다.
“…….”
길고 긴 속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고 교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여인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초승달처럼 곱게 휘는 눈매가 뭇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아름다웠다.
“놔두어라. 고작 어린 여승 따위 하나 보낸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예, 세주님.”
수하가 물러나자 여인은 나른한 표정으로 복호사를 응시했다.
스읍.
그녀의 붉은 혀가 밖으로 빠져나와 앵둣빛 입술을 쓸었다.
그녀의 뒤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은 모두 오십 명.
속살이 환하게 드러나는 나의(羅衣)를 걸친 그녀들의 모습은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쯧쯧, 여인으로 태어나 낭군을 섬기지는 못할망정 돼지 같은 부처 년이나 섬기다니……. 불쌍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아니냐.”
“호호, 그러게나 말이에요, 세주님.”
수좌나 대답하는 교아라는 여인이나 목소리에 요사한 교태가 잔뜩 묻어났다.
“더 기다릴까요?”
“됐다. 무엇을 더 기다린단 말이냐? 여승 따위에게 얻을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그럼 시작할까요? 서둘러 마치고 사내들의 양기를 얻으러 가요. 토번의 사내들에겐 질렸단 말이에요.”
“그년 참…….”
수좌가 나무라듯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도 음심(淫心)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초점을 잃은 서른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또 얼마나 나를 재미있게 해 줄까?”
사내들을 바라보는 수좌의 눈동자에 묘한 흥분이 어렸다.
“얘들아, 시작하렴.”
“네! 세주님.”
수좌의 명이 떨어지자 여인들이 앞 다투어 사내들을 향해 다가갔다.
여인들은 망설임 없이 사내들에게 입맞춤을 했다.
“끄으으으…….”
입맞춤이 끝나고 입술이 떨어지자 이지를 상실했던 사내들의 입으로 허연 기운이 몰려 나와 여인들의 입으로 빨리듯이 들어갔다.
원양지기(元陽之氣).
일명 양기라 불리는 것이다.
사내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그것은 순식간에 여인들에게 흡수되었고, 모조리 빨려 버린 이들의 피부가 탄력을 잃고 고목처럼 푸석하게 변해 갔다.
화아…….
양기를 섭취한 여인들의 입에서 검은 마기가 스며 나와 사내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환희섭혼이라 불리는 마공.
사람의 심령을 제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최면술과 섭혼술(攝魂術).
최면술은 일정한 동작이나 소리, 춤 등으로 상대의 감각을 통해 뇌를 제압하는 것이지만 섭혼은 자신의 기운을 심어 상대의 혼을 조종하는 것이다.
여인들은 섭혼의 첫 번째 과정으로 상대의 진기에 마기를 심어 넣었다.
양기를 빼앗기고 마기에 잠식당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금제에 빠지게 된다.
마기의 힘이 모조리 사내들의 몸에 채워지자 고목처럼 변했던 사내들의 몸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신 피부는 그을린 것처럼 검게 변했고 힘줄이 곳곳에 돋아나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흐응, 부족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는 교아는 이전과 달리 피부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이 팽팽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교아, 아쉬워 말렴. 이제 곧 듬직한 중원의 사내를 수도 없이 맛보게 될 테니까.”
먼저 양기를 흡수한 여인, 추련이 미소를 지으며 교아를 살포시 잡아당겼다.
“세주님, 끝났습니다.”
“오냐.”
수좌는 양기를 모조리 빨려 버린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긴 속눈썹이 올라가고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내 눈을 보아라.”
낮게 깔리는 저음이 흘러나오자 사내들은 마치 언령(言令)에 잠식당한 것처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가거라. 가서 여승의 몸을 더럽히고 죽여라. 팔다리를 뜯어내고 살점을 발라내라.”
“끄으으으…….”
수좌의 목소리에 지배당한 그들은 짐승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내며 실혼인처럼 아미파로 향했다.
“홋홋홋, 가자!”
수좌의 명령에 여인들이 사내들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응?”
아미파의 산문을 지키던 여승, 법진은 다가오는 이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서천맹의 인물들이 분명한데 낮술이라도 먹은 것인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하다. 서천맹에서 사람이 온다는 연락은 없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운진이 함께하고 번을 서는 운혜에게 말했다.
“가서 서천맹에서 손님이 오셨다 전하거라.”
“예.”
운혜를 안으로 들여보낸 운진이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정중하게 합장했다.
“아미의 운진입니다. 서천맹의 무인들이 어쩐…….”
짜아악!
“……!”
운진을 향해 멈추지 않고 곧바로 다가온 소림승은 그녀의 승복을 잡아 뜯었다.
“이, 이런 파렴치한!”
드러나는 가슴에 놀라 옷자락을 잡아 올린 그녀가 서둘러 물러나며 쌍심지를 세웠다.
하지만.
“크악!”
소림승은 그녀의 속살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그 뒤를 따라 서너 명의 사내들이 덮쳐 왔다.
“아, 안 돼!”
무공을 가진 여인이자, 아미의 산문을 지키는 여승이었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녀는 일 초의 무공조차 쓰지 못하고 사내들의 아래에 깔려 버렸다.
아아…….
팔다리가 잡히고 맥없이 쓰러진 그녀는 단 한 번도 내어 주지 않았던 성역을 강제로 허락한 채 팔다리가 뜯겨 나갔다.
숨을 멈춘 그녀의 감지 못한 눈동자가 지나는 이들을 허망하게 비추었다.
산문을 넘어 아미파로 난입하는 인면수심의 무리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서른 명의 무인.
그들은 닥치는 대로 여승들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여승들이 서둘러 일장을 뻗어 막아 보려 했지만 습격해 온 자들은 정천에서도 선별된 무인들이었다.
비록 이지를 잃어 그 무공이 제한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습격을 받아 버린 아미파의 입구는 참혹함으로 물들었다.
윤간을 당한 여승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경내를 채우고, 목이며 팔다리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이놈들!”
막 연락을 받고 손님을 맞이하러 나오던 보은신니가 거센 노기를 뿌렸고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던 아미파의 무인들이 몸을 날렸다.
서른 명의 무인과 아미파의 무인의 혼전이 일어났다.
쩌어엉!
노기를 머금은 불장이 겁탈을 자행하는 무인의 머리를 으깨고 달려드는 이의 뼈를 부서뜨렸다.
“감히 신성한 법당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