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76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76화
175화. 살짝 도와줄까 하고
혈승의 눈동자가 돌려졌다.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뻗은 혁련휘.
만경창파 축도의 기술을 주먹으로 펼쳐 낸 것이다. 내상으로 인해 그 위력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꾸우.
작은 비틀림이 혈승에게 틈을 만들었고 소청의 창극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혈승은 창대를 막기 위해 다급히 오른팔을 휘둘렀…….
‘이런!’
콰직!
공허한 휘저음을 뚫고 피풍의로 만든 소청의 창이 열린 혈승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크어억!”
그리고.
“천뢰충파 진곤(鎭坤).”
쿠우우웅!
만년 거석의 무거움이 그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뒤늦게 호신강기가 발현되며 그 충격을 줄였지만 혈승의 가슴이 움푹 내려앉고 등 어림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스걱!
소청은 초사에게 약속한 것처럼 그의 왼팔을 단숨에 잘랐고.
스걱.
두 다리를 잘라 내었다.
투툭.
지지할 곳이 없어진 혈승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보다 너무 힘든 싸움이었다.
혁련휘가 함께 돕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내력이 다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면 모를까…….
소청은 물먹은 솜처럼 몸을 늘어뜨렸고 혁련휘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크크크…….”
절명할 줄 알았던 혈승이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죽는 것인가.”
“…….”
팔다리를 모두 잃어버린 혈승을 소청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진소청…….”
“…….”
어느 순간 혈승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사라졌다. 처음 만났던 그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표정은 너무나 편안해져 있었다.
죽어 가는 것이다.
촛불이 꺼지는 순간 가장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마지막 순간을 밝히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것?”
소청의 되물음에 혈승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떼었다.
“너는 되돌아온 자인가?”
“뭐?”
혈승의 질문에 소청의 눈이 부릅뜨였고 누워 있던 혁련휘마저 벌떡 일어났다.
“맞나 보군.”
“어, 어떻게 알았지?”
“후후, 비슷한 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혈승은 마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혈승. 비슷한 자라니?”
소청이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하지만 죽음이 점점 더 가까워 오는 것인지 그는 더 이상 소청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어쩐지 마종과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했지. 너를 보고 나서야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그러짐,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
혈승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혈승, 자세히 말해라!”
“크크크, 마종은…… 이미 삼궁의…….”
무엇을 묻는다 해도 더 이상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
죽어 가고 있었다.
“전생에 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힘으로는 마종을 죽일 수는 없으리라. 그가 무림에 나오는 순간 중원은 피로…….”
“…….”
“마종 종리세…… 그는…….”
“뭐? 종리세라고?”
소청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혈승! 혈승!”
“…….”
소청이 그의 몸을 흔들며 깨워 보려 했지만 혈승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제길…….”
소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혈승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소청이 굳은 얼굴로 죽어 버린 혈승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소청, 이게 무슨 소린가?”
“…….”
혁련휘의 물음에 소청은 답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의 기억이 죽음의 순간으로 돌아갔다.
‘마천 비고에서 쏟아져 나온 그때의 그 빛…….’
그 빛이 자신을 새로운 생으로 인도하게 된 것이다.
그때 분명 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누군가 먼저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종 종리세.
드디어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전생에 무림 정벌을 주도했던 마천의 삼 공자.
대공자 구자겸, 이 공자 백효, 그리고 삼 공자 종리세.
모두가 죽은 줄 알았던 종리세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마천 비고에 먼저 들어가 그 안에 잠든 전설을 발동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군. 나만 새로운 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소청의 눈이 매서워졌다.
‘삼 공자 종리세. 그가 돌아온 거야. 그래서 모든 것이 변했던 거야. 마천이 십만대산에서 사라진 이유가 그곳에 있는 거야.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으니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소청의 머릿속이 확연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소청, 소청!”
“아, 미안하네.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
혁련휘의 부름에 소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자네 말고 마종 또한 돌아왔다는 이야긴가?”
“음. 아마도 그런 모양이네.”
소청은 종리세와 전생에 있었던 마천 정벌에 관한 이야기를 혁련휘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미 자신이 막야라는 전생에서 진소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혁련휘는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음, 그렇군. 자네가 죽었다는 마천 비고의 비밀이 결국은 그것이라는 이야기로군.”
“그래.”
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자리를 피해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초사와 비마대의 무인들이 다가왔다.
“초사…….”
오른팔이 잘려 버린 그의 모습에 다시 가슴이 아릿해져 왔다.
“패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
“금마강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가 좌군 도독부를 점거하고 금성으로 진군을 한다 했습니다.”
예상은 했었다.
지금쯤 방효곤이 남궁가의 조사와 더불어 형부를 통해 금마강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좌군의 병력이 만만치 않으니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알겠다.”
고민은 나중이었다.
시간이 되는 대로 차근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혈승에게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음마를 잡았으니 그녀를 통해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소청이 고개를 끄덕이고 초사를 향해 말했다.
“너희는 지금 즉시 제갈휘문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알려라. 관군의 제재를 받고 있는 터라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무림에 제재를 가한 자들 모두가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황께 전하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동안 많이 참고 계셨을 테니…….”
“알겠습니다. 패월께서는?”
초사가 묻자 소청이 피식 웃었다.
“나? 살짝 도와줄까 하고…….”
그 말에 혁련휘가 금세 의미를 깨닫고 따라 웃었다.
* * *
“막아라!”
“한 놈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이치성 도독은 직접 나서서 관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내부에서의 반란이니 그들을 막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관병의 수는 현저하게 적었고 좌군 도독부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들이 금마강의 휘하에 있었다.
순식간에 밀려 버린 그는 활을 겨눈 관병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금마강!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더냐?”
이치성이 반군의 수장인 금마강을 노려보며 노성을 질렀다.
“금마강?”
“…….”
“말이 짧구나 이처성.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혀 줬더니 나를 동창에 넘기려고 해?”
금마강이 이치성 도독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누가 누구를 넘긴단 말이냐! 나는 그저!”
“닥쳐라 이놈!”
“…….”
“돈을 받아 처먹을 때는 그렇게 사근거리더니 제 자리에 위협이 생기니 휘하 장졸들을 내치려고 해? 그러고도 네가 관군의 수장이더냐!”
“이, 이놈이…….”
“뭣들 하느냐? 저자를 당장에 포박해 꿇려라!”
이치성이 반항을 해 보지만 장수들이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자 이내 검을 떨어뜨렸다.
“사, 살려 다오.”
그는 도독을 맡기에는 부족한 자였다.
금마강은 그의 유약한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물린 자리에 그를 천거한 것이다.
겁만 주면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쯧쯧, 쓸모없는 놈 같으니……. 이놈을 당장 형틀에 묶어라!”
“예, 대군후님!”
풍진이 군례를 올리고 이치성을 형틀에 묶었다.
“장졸들은 들어라! 이제 좌군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우리는 새벽을 기해 북진할 것이다! 나를 모함해 황상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 자들을 모조리 숙청할 것이다! 모두 갑주를 입고 무기를 챙겨 출진할 준비를 서두르라!”
“와아아아!”
금마강의 외침에 도독부에 모인 관군들이 함성을 질렀다.
관군은 무림인들처럼 단번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병과에 맞추어 병력을 나누고 병장고에 있는 무기를 꺼내야 했으며 말에게 충분히 여물을 먹여야 했다.
이미 좌군을 점거했고 날이 밝는 대로 진격을 시작할 터이니 늦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 절강을 넘어 강소성을 지난다면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군은 없었다.
이미 중군과 후군에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에게 연락을 보냈으니 그들 역시 곧 출진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풍진!”
“예, 대군후님!”
“각 군에 전령을 띄워라. 인시 말(5시)에 출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금마강은 예상보다 빠르게 좌군을 점령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단꿈에 빠졌다.
‘멍청한 것들. 네놈들이 감히 나를 잡으려 해?’
그리고 형틀에 묶인 이치성을 바라보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저놈의 목을 치고 사지를 찢어 돼지우리에 던져 버려라!”
“알겠습니다!”
금마강의 싸늘한 명령에 그의 곁에 있던 장졸이 곧장 대답하고 칼을 꺼내 들었다.
“대, 대군후, 살려 주시오! 제발!”
“뭣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저놈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느냐!”
금마강의 호통에 장수가 검을 높이 들었다.
스걱!
피가 뿌려졌다.
그런데 이치성의 것이 아니라 검을 들었던 장수의 목이었다.
“……!”
그리고 이치성의 옆에 나타난 것은 복면을 쓴 두 명의 괴인이었다.
“네놈들은?”
“그건 알 거 없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매한가지겠지만 그래도 멍청한 놈이 낫겠지.”
“…….”
복면에 드러난 눈이 히죽 웃었다.
귀신도 아니고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십여 장이 넘는 해자와 성벽을 넘고 매섭게 경계하는 관병들의 눈을 피해 좌군 도독부에 들어와 있는데 어찌 아무도 그들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이놈들! 감히 좌군 도독부를 습격하다니 네놈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지랄하네. 반란을 일으키려 한 주제에…….”
“뭐, 뭣이?”
“자, 일단은 들어왔고 시간만 좀 벌어 주면 되겠지?”
차차작!
검은색 피풍의를 두른 복면인이 허리께에서 창대를 꺼내 늘렸다.
“뭣들 하느냐! 저놈들을 당장 잡아라!”
금마강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창검으로 무장한 관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 그럼 어디 솜씨 좀 볼까?”
창을 든 복면인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렸다가 휘둘러진 창을 통해 뿌려졌다.
콰아아아아앙!
“……!”
좌군 도독부의 건물이 통째로 날아갔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쥔 복면인이 지면을 구르며 일권을 뻗는 순간 거대한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이, 이런…….”
금마강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두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