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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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69화
168화. 굳이 피를 보겠단 말이지
그녀의 중얼거림에 그곳에 있던 이들이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인 채 웅성거렸다.
진소청이라는 이름은 관병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남궁가의 인물들에게는 복수심을 이끌어 내었다.
“진소청.”
금성희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듯이 중얼거렸다.
몸이 떨려 왔다.
부릅뜨다 못해 찢어진 눈꼬리에서 핏물이 눈물처럼 흘러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거친 숨에 호흡이 가빠 오고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진소청, 그가 왔던 그때의 그 시각으로 기억이 돌아가고 그때처럼 놈이 남궁세가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전생에 어떤 악연이 있어서 이리도 복잡하게 얽혔단 말인가?
놈에게 죽은 둘째 아들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놈은 지아비를 처참하게 죽였고 잘난 큰아들의 두 다리를 부숴 병신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죽었고 남궁세가는 오명을 쓴 채로 정천에서 버려졌다.
긴 시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다.
남궁이 가졌던 이름의 자부심을 버리고 낮게 조아려 준비해 온 모든 것을 놈이 다시 부수려 하고 있었다.
“네놈이었구나. 네놈이었어…….”
차디찬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게 네놈 때문이다. 모든 게…….”
흉신악살의 미소가 그러할 것처럼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소청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 고작 그거였어?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식솔들마저 죽였나?”
“…….”
“너의 잘못된 행동에 복수심이라는 말을 심어 합리화하려 하지 마.”
“뭐라고?”
“모든 건 너희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남궁천세가 마천에 변절한 건 오존이라는 허명 따위를 얻고 싶은 탐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문을 키우려는 욕심. 더 높은 자리로 가려는 욕심.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합리화했겠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말이야. 너 역시 마찬가지였고. 생각해 봤나? 마천의 눈에 들기 위해 폭멸마동의 재료로 사용된 아이들의 고통을? 너의 복수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리를 씌우고 그로 인해 딸을 팔고 처를 팔고 생업을 버려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닥쳐라.”
“해선 안 되는 짓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내는 것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야. 너는, 그리고 남궁세가는 너희들이 가진 탐욕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다. 너희들이 저지른 수많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일 뿐이야.”
소청의 말에 금성희의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죽여…….”
금성희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한마디.
수많은 사람이 했던 말과 다르지 않았지만 진한 원독이 목소리가 단 두 글자의 말을 스산하게 들리게 했다.
한이 맺혀 모두의 귓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정대수 천호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식솔들마저 잔인하게 죽인 그녀였다.
방효곤과 동창이 와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하필이면 ‘진소청’이란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 내고 관으로 돌아가 이 일을 알려야 했다.
모든 것을 남궁세가의 잘못으로 미루고 조금이라도 형량을 줄여야 했다.
자신 말고도 뇌물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착취해서 모은 재물이 도독부까지 흘러들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만 죽어 버린다면…….
“무,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이봐, 정대수.”
“…….”
금성희는 더 이상 그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백 명이다.”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지금 발을 뺀다고 무사할 것 같으냐?”
“…….”
“내 아버지가 좌군의 도독첨사 금마강 대군호임을 잊었는가? 뒤는 내가 책임지겠다. 놈들을 죽이면 이곳의 모든 것을 묻고 내 친히 아버님께 너의 공적을 치하하도록 하겠다.”
“하, 하지만 동창이…….”
“동창? 그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
미쳤다.
그녀는 미친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복수에 미쳐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진소청이고 동창이고 모두 죽인다. 진소청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과장에 불과하다.”
물론 과장되었으리라.
그에 대한 소문은 온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나를 믿어라. 앞으로 너의 출셋길에 힘이 되어 주겠다. 평생 가질 수도 없는 부를 얻게 해 주마. 조금만 버티면 된다. 조력자가 오고 있다. 진소청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조력자가…….”
조력자?
금성희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이곳에서 모두를 죽인다면?
깔끔하겠지. 그리고 이번 일을 무마하고 나면 자신은 좌군 도독부의 눈에 들지 모른다.
고작 지방의 천호직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관병들은 들어라! 무림인과 결탁한 방효곤이 동창을 이용하고 있다. 증거를 조작해 죄 없는 남궁가와 우리를 엮어 자신들의 죄상을 묻어 볼 심산이다. 이는 관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고 나아가 황제 폐하께 역심을 품은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출세와 재화에 대한 탐욕이 그의 선택을 결정했다.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자에게는 평생 얻지 못할 명예와 부를 안겨 주겠다! 한낱 무부들에게 관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어라!”
그의 명령에 웅성거리던 관병들이 저마다 창검을 세워 소청 등을 겨누었다.
어떤 사실이 맞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명령권자는 정 천호였다.
그리고.
“창궁검수대는 들어라! 지금부터 남궁세가를 습격해 온 무리를 남김없이 죽인다!”
남궁월인이 복수심에 물든 눈으로 외치자 창궁검수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활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소청이 있었다.
“쯧, 역시 좋게 해결이 안 되겠네. 굳이 피를 보겠단 말이지.”
혀를 차던 소청이 창대를 움켜쥐었다.
차자자작!
내뻗어 길어진 창대의 끝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소청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일렁거렸다.
무기를 뽑아 든 이상 더 이상 말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모조리 죽여 주마!”
파앙!
소청의 발이 내디뎌지자 혁련휘를 비롯한 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난전이 시작되었다.
열 배가 넘는 병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혁련휘가 있었고 무황이 제자를 위해 직접 키워 낸 철혈군이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무공이 아니라 갑주와 무구에 의존한 이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관군을 해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하는 일이나 방효곤이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증언해 줄 것이다.
그들은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은 감찰어사와 직속 조사 기관인 동창의 무인들을 공격했다.
피피핑!
방효곤의 십자궁이 부러질 듯 당겨졌다가 수십 줄기의 기운을 뿜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서던 이들이 단번에 꿰뚫려 쓰러졌다.
동창의 무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뛰어난 무공을 선보이며 관군들을 죽여 나갔다.
쿵! 휘리리리!
혁련휘의 거센 일보와 함께 질러진 주먹이 허공에서 비틀어졌다.
회오리는 허공에 와류를 만들어 창궁검수대를 집어삼켰다.
그들이 쏘아 낸 수노기의 화살이 힘을 잃고 튕겨 나갔고 궁진(弓陳)이 와해되었다.
철혈군이 그 틈 속으로 파고들어 남궁가의 무인들을 쉬지 않고 베어 내었다.
그리고.
드드드드.
난전 속에서 싸우고 있던 소청의 귓가로 묵직한 무언가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씨발, 진짜로 있었잖아?”
사방에서 나타난 그것은 다름 아닌 화포였다.
‘홍이(紅夷)’라는 이름을 가진 그것은 관군 이외에는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복잡한 난전 사이로 포구가 겨누어졌다.
“가모님, 아군이…….”
“상관없다. 모조리 죽여라!”
그녀의 눈에는 살기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타악!
주저하는 무인에게서 불을 빼앗아 든 금성희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심지가 순식간에 짧아졌다.
지상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네 개의 화포가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듯했다.
“젠장!”
난전이었다. 피아가 뒤섞인 전장이었고 무수히 많은 이들이 한곳에 뭉쳐져 있다.
산개되지 않고 집중한 곳에 화탄이 떨어지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었다.
소청은 창대를 휘둘러 다가서는 무인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발을 굴렀다.
쿵!
거대한 울림과 함께 족적이 대지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파앙!
소청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전의 힘을 모조리 때려 박은 일보월하가 펼쳐졌다.
스걱!
소청의 창에 두 대의 화포가 잘려 나가며 포신 속에 뒹굴었던 화탄이 갈라져 폭발했다.
혈잠의 보포로 충격을 흡수했음에도 귀가 먹먹하고 몸이 떨려 왔지만 소청은 재빨리 몸을 틀었다.
쿠르르릉!
그리고.
남은 두 대의 화포가 우레와 같은 괴성을 토해 내며 불을 뿜었다.
“안 돼!”
방향을 비틂과 동시에 화포를 향해 날아간 소청이 혁련휘를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피해야 했다.
화탄이 직격으로 날아가는 곳에 그가 있었다.
“휘!”
소청의 부름에 수십 명의 창궁검수대와 싸우고 있던 혁련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탄을 발견했다.
“이런 씨발!”
다급한 외침과 함께 혁련휘가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양손으로 날아오는 화탄을 부드럽게 잡아 비틀었다.
방향이 틀어진 화탄이 남궁세가 밖으로 날아가 외곽의 관군들을 덮쳤다.
하지만.
막아 내지 못한 또 다른 화탄 한 발이 지면에 닿아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진동이 남궁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폭발과 함께 조각조각 나뉜 화탄의 잔해가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은 갈가리 찢겨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암기처럼 쏘아진 조각들이 그 일대의 무인들을 모조리 꿰뚫어 버렸다.
처참했다.
전장의 한곳이 뜯어져 나간 것처럼 황량하게 변했다.
폭발의 상처를 바라보던 소청의 시선이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뭣들 하느냐! 활을 쏴라! 암기를 던져! 이 멍청한 것들아! 다 죽여라! 모조리 죽이란 말이다!”
금성희는 목줄기에 핏대를 세우며 살육에 미친 짐승처럼 외쳐 대었다.
“네년…….”
소청의 시선이 금성희를 향했다.
드드드드.
분노로 물든 그의 몸에서 엄청난 한기가 퍼져 나왔다. 백회 뇌기와 명문의 한기가 뒤섞여 단전에 응축되었다.
쩌저저적!
퍼져 나온 한기가 사방을 얼려 놓았다. 지면에 새하얀 서리가 쌓이고 그와 마주한 이들은 소름 끼치는 한기에 입김을 뿜어내었다.
“그래야만 했나? 굳이?”
한기에 의해 서리가 앉은 듯이 하얗게 변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발 한 발 다가설 때마다 사방이 쩍쩍 얼어붙었다.
“막아라! 놈을 막아!”
소청이 살기를 뿜으며 다가서자 금성희가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외쳐 대었다.
하지만 이미 겁에 질려 버린 남궁가의 무인들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소가주인 남궁진수조차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기억의 악몽에 떨며 어미를 버리고 물러났다.
“이놈들아! 뭣들 하는 게야! 놈을 죽이란 말이다!”
검을 뽑아 든 금성희가 소청을 향해 곧게 질렀다.
땅!
하지만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잡혀 버렸다.
“이,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