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63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63화
162화. 난 주인이고, 넌 호위
혈승의 말에 금성희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가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는다.
“죄송합니다. 진소청을 생각한 것이 그리되었나 봅니다.”
“홀홀, 자네도 복수심은 어찌할 수가 없나보군.”
혈승의 말에 금성희는 자세를 바로 하고 마주 보았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
남궁세가의 가모 금성희.
비록 진소청과 관련된 일에 과분하게 흥분하긴 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감출 줄도 알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과연 금마강의 딸인가? 그의 자제들 중 가장 비슷하기에 버려진…….’
금마강으로부터 그녀를 소개받았을 때 느낀 놀라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관상처럼 얼굴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느낌 같은 것이다.
그녀의 수완은 실로 놀라웠다.
마천에 변절했다는 이유로 진소청에게 무너진 후 중원 무림맹에서 버려진 남궁세가.
겉으로는 와해된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는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림이 아닌 관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순식간에 관부로 스며들었다.
아비의 이름과 재물을 이용해 그들이 원하는 탐욕을 적절하게 채워 손아귀에 넣고 군벌들을 치마폭에 집어넣었다.
과하지도 모자라도 않았다.
이번 관부를 움직인 것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리 조속하게 처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뱀과 같은 여인. 차갑고 잔인한, 그렇기에 더욱 마천에 어울리는 여인.’
혈승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홀홀, 어쨌든 자중하고 군부를 움직이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라. 진소청은 우리가 감시하고 있으니…….”
“알겠습니다.”
“반년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너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
그녀의 거처를 빠져나가는 혈승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올리던 금성희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 * *
무한을 떠나온 소청과 혁련휘는 남궁세가가 있는 황산 인근에 도착해 객점을 잡았다.
방효곤과 비마대는 대군호 금마강을 조사하기 위해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合肥)로 이동한 뒤였다.
“아니 굳이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나? 금존청 사 준다고 했잖아!”
싸구려 백주를 앞에 둔 혁련휘가 투덜거렸다.
“지금 술이 중요하냐?”
“당연하지! 객점에 오면 술과 여자는 기본이라고.”
“자랑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사도련의 후계자가 되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근데 꼭 이렇게 몰래 살펴야 되냐? 마천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며?”
“있어 보인다고 했지, 있다고는 안 했어.”
“그게 그거지.”
“완전히 달라.”
“쳇! 그냥 쳐들어가서 물어보면 될 걸 이렇게 어렵게 일하다니…….”
하아, 정말…….
괜히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혼자 몰래 빠져나올걸.
“이봐, 휘. 이번엔 뭔가 좀 달라.”
“뭐가?”
“조심스럽다고 해야 할까? 관부를 이용해 자신들의 발에 족쇄까지 채웠어.”
“뭔가 노림수가 있어 보인단 말이야?”
다행히 눈치는 좀 있었다.
“그래. 그런데 스스로의 발에 족쇄를 채워 가면서 꾸며야 할 음모가 뭐가 있을까? 그리고 음마와 권마를 침투시켜 황보가와 화산을 공격한 것도 뭔가 의심스럽단 말이야. 그건 마천의 전략이 아니거든. 계략을 세울 때는 은밀하고 몰아칠 때는 노도처럼 거세고 빠르지.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해. 마치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단 말이지.”
“…….”
혁련휘는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전생에서는 훨씬 똑똑한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그때만 해도 소청의 신분으로는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이라 마주 대해 본 적은 없었으니.
당시의 혁련휘는 마치 ‘위인전’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남궁세가에 온 것은 그들이 뭘 노리는지를 알기 위해서야. 괜한 소란을 피워서 마천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 저들이 모습을 감춰 버리면 찾기가 어려우니까.”
“그럼 두고 보자는 거야?”
“그래, 두고 봐야지. 뭔 짓을 꾸미는지 알고 나서 움직여야 해. 만약 남궁세가의 가모가 연관이 있다면 그들과 연관된 무언가가 있을 거야. 우린 그걸 찾아야 한다.”
“무슨 도적질이라도 하러 온 것 같군. 아, 전생에 신투였으니까 도적이 맞는 건가?”
혁련휘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혁련휘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거참, 하는 짓은 동년배나 다름없는데 나이로 따지면 일흔 먹은 노인네라니…….”
“쉰 좀 넘어서 죽었어.”
“다시 와서 십 년 넘게 살았잖아.”
“…….”
어휴 말을 말아야지.
“그럴 거면 존대라도 하든가.”
소청이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
“대충 상황 좀 둘러보러. 일단은 남궁세가 주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부터 알아야지.”
“쳇!”
객점 밖으로 나온 소청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옷차림은 화려하기 그지없고, 천변만화로 얼굴을 바꾸고 축골공으로 살집이 푸짐한 체구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참 신기하네. 어떻게 하는 거야?”
혁련휘가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감탄했다.
“뭐가?”
“그 역용공, 축골공 말이야.”
“이제 좀 형님의 위대함을 알겠냐?”
“혹시 여인으로도 변할 수 있나?”
“여인? 뭐, 가능하겠지.”
“그래? 그럼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되나?”
“이걸?”
슬쩍 바라본 혁련휘의 눈빛이 음흉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뭐 하려고?”
“그냥 뭐…… 여인들만 모이는 곳에 들어간다든가.”
“안 돼!”
역시나 한결같은 친구였다.
소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딱 잘라 거절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게. 내 금존청은 없던 일로 하겠네.”
“그게 이거랑 같냐?”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됐고, 넌 지금부터 호위야. 이름은 진산이고.”
“진산? 너는?”
“나? 금경호. 대부호지.”
“그건 또 누구야?”
“있어. 내가 아는 가장 비열한 상인 놈.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지.”
소청의 말에 혁련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난 네 수하고?”
“당연하지.”
“…….”
“지금부터 금 대인이라고 불러. 가능하면 말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하고.”
“내가 왜…….”
“금존청 두 병.”
“쳇!”
어차피 해 줄 거면서 툴툴거리기는…….
소청은 피식 웃으면서 황산 인근의 관도를 여유롭게 걸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과거에 보았던 남궁세가가 있는 황산 인근은 언제나 풍족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고 남궁세가에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모두가 알 수 없는 분노에 차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적어? 이번 달부터 이자가 열 냥으로 올랐다는 거 못 들었어?”
인근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관도 주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이자를 그리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 일하는 아이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네.”
포목점 주인이 울상이 된 얼굴로 무인에게 사정을 했다.
“시끄러워. 지침이 바뀌었어.”
“아니, 지침이 또 바뀌다니. 지난달에도 지침이 바뀌었다면서 닷 냥을 달라더니 고작 한 달 만에 이러시면 어떻게 하는가?”
“닥쳐!”
“못 해. 내 더는 못 하네. 가뜩이나 손님이 줄었는데…….”
포목점 주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자 함께 있던 무인이 칼을 뽑아 들고 다가가 그의 다리를 찔러 버렸다.
“아아악!”
비명이 관도를 울렸지만 다른 상가의 인물들은 남 일처럼 지켜보기만 할 뿐 참견하지 않았다.
“어이, 강 씨. 지금 빚이 얼마인지 알아?”
상처를 잡고 있는 포목점 주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또 다른 무인이 흉악스러운 표정으로 위협했다.
“혁진이, 정말로 돈이 없네. 제발 사정 좀 봐주게.”
“혁진이? 내가 네 친구야?”
“뭐?”
“그리고 지침이 그렇다잖아, 지침이.”
“…….”
“돈이 없으면 딸년이라도 팔아서 가져와야 할 거 아냐? 아니면 포목점을 넘기든가?”
“어찌 그런…….”
전형적인 악성 고리업자였다.
그것도 고액 이자를 지워 그들의 생업마저 집어삼키려는…….
소청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궁세가가 코앞인 곳이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황산 인근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이보시오.”
금 대인이라는 후덕한 모습으로 변한 소청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고개를 돌린 무인이 소청을 아래위로 힐끗거렸다.
입고 있는 옷이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을 눈치챈 그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요?”
“그 지나다가 무슨 일인가 해서.”
“이곳의 사람이 아닌 듯한데?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시오.”
“헛헛, 나는 그저 그 강 씨라는 사람이 불쌍하기도 하고 무슨 잘못을 한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그의 말에 혁진이 이죽거리면서 다가왔다.
“어이, 이봐. 괜히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피 보는 거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꺼져.”
혁진은 강씨의 피가 묻은 칼로 소청을 위협했다.
-휘.
소청의 전음에 혁련휘가 재빨리 움직여 혁진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의 패거리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자식! 넌 뭐냐?”
하지만 혁련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청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진산, 그만 놓아주게. 저들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꺾어 버려.
“하나 상주님의 몸에 칼을 들이밀었으니 손목을 부러뜨려야 합니다.”
-금존청, 세 병.
“어허, 이 사람. 고작 그런 일로 그리해서야 되겠는가?”
-이씨!
“상주님, 이런 놈들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본을 보이지 않으면 분명 뒤에서 칼을 꽂을 놈들입니다.”
-싫어?
“그 사람 참.”
-알았다, 알았어.
소청과 혁련휘가 입 밖에 내는 소리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음을 나누었다.
아마 소청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의 행동은 똑같았을 것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뿌드득!
“끄아아악!”
혁련휘가 혁진의 손목을 반대로 꺾어 버리자 얼굴이 노랗게 변하며 비명을 질렀다.
“혀, 형님!”
그의 수하들이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소청과 혁련휘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
그 순간 혁련휘가 씨익 하고 웃더니 혁진의 무릎을 짓밟아 버렸다.
뿌드득.
무릎이 반대로 꺾이자 혁진은 비명을 지르다 못해 허연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무사하지 않으면?”
혁련휘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몸에서는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과하다.
자신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두, 두고 보자.”
그들은 자신들이 형님이라 부르는 혁진을 업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두고 보긴. 다신 보고 싶지 않을 거면서.”
소청이 혀를 차며 포목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분명 도와준 것인데 그의 얼굴에선 감사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