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60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60화
159화. 그냥 술이나 마셔
늦은 밤.
세 명의 사내들이 진가 표국의 무한 분점으로 은밀하게 접근해 왔다.
“여기 있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새하얀 눈동자를 빛낸 사내는 싸늘하게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굳어 있던 손가락 마디가 진한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은수라고 했나?”
“예? 예.”
“언제부터 와 있었다고?”
“나흘쯤 되었습니다.”
“나흘……. 내가 화산에 있는 걸 알았을 텐데. 연락도 안 했다 이거지?”
어둠을 헤쳐 놓은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혁련휘였다.
화산에서 권마를 죽인 뒤 곧장 무한으로 향한 그는 호남성의 경계에서 소청이 보낸 은수를 만났다.
군부에 의한 경계령이 떨어졌음을 들은 그는 철혈군을 무한 외곽에 은밀하게 대기하게 했다.
그를 따른 것은 철혈군의 수장인 백강뿐이었기에 군부의 경계를 손쉽게 피해 도착했다.
“좋아. 어디 죽었다던 친구 낯짝이나 한번 봐야겠구먼.”
방효곤이 나간 뒤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소청은 묘한 느낌에 주변을 세밀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사내를 발견했다.
“휘……?”
후웅!
혁련휘를 발견하는 순간 묘했던 느낌이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살기? 기세?
그딴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그저 칼을 횡으로 갈랐을 뿐인데…….
온몸이 난자당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소청은 온 힘을 다해 앉은 채로 바닥을 때려 물러났다.
쫙!
바로 전까지 술이 채워져 있던 술잔이 반으로 갈라졌다.
쫘자자작!
그리고 순식간에 수백 개의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이, 이 자식이 날 죽일 셈이냐?”
소청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혁련휘를 쳐다보았다.
“죽어도 싸지.”
“…….”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연락도 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며?”
“…….”
“그것도 모르고 내 참…….”
말은 툴툴거렸지만 혁련휘의 눈동자에는 반가움, 기쁨, 안도감과 같은 수많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그의 감정을 모두 느낀 소청이 가볍게 웃으며 원래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곤 술병을 잡고 흔들었다.
“한잔할래?”
“쳇! 누가 마실 줄 알아?”
“백삼주(白蔘酒)라고 근방에선 꽤 알아주는 술인데…….”
“흥!”
“그래? 그럼 혼자 먹지 뭐. 반밖에 안 남았는…….”
핏!
“술 때문에 봐주는 거야! 살아 있어 줘서 봐주는 게 아니고!”
어느새 혁련휘가 소청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벌컥, 벌컥.
병째로 들이켠 혁련휘가 만족스럽게 소매로 입을 닦아 내었다.
“맛있냐?”
“그래.”
“아깐 진짜 죽을 뻔했다.”
“쳇, 안타깝네. 그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
투덜거리며 술병을 입으로 다시 가져가는 모습에 소청이 피식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오랜 그리움 뒤에 다시 만남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 따위는 맞지 않았다.
그는 여전했다.
둘은 말없이 술병을 나눠 마셨다.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 * *
“크으…….”
음마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벌써 두 번째.
만수통령술로 길들인 다람쥐마저 당해 버렸고 또 내상을 입고 말았다.
모두가 활을 쏘는 망할 놈 때문이었다.
겨우 내상을 회복해 이번에 침투시킨 짐승은 참새였다.
“홀홀, 어떤가? 그는 어찌하고 있나?”
“권마를 죽인 혁련휘라는 놈이 도착해 술을 처먹고 있소.”
음마가 신경질을 내며 툴툴거렸다. 좁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진소청만 감시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욱이 두 번이나 내상을 입은 터라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홀홀, 그렇군. 하면 이제 곧 움직이겠군. 안 그래도 방효곤이라는 자가 관을 들쑤시는 모양이던데…….”
“어찌할 생각이오?”
“홀홀, 관의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우리는 진소청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야지.”
“막는다고? 그를?”
음마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홀홀, 다 방법이 있다네.”
“설마 관군을 이용하려는 게요?”
“그래야겠지. 우리가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니.”
“하지만 진소청은 강합니다. 만약 관군들과 부딪혀서 첨사와 우리의 연관성을 밝히는 날에는…….”
“차라리 그리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는가?”
“예?”
혈승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음마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혈승이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패월, 큰일입니다. 몸을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이것을…….”
이상백을 감시하기 위해 황학루로 침투했던 초사가 돌아와 전서 한 장을 내밀었다.
도독부에서 이상백에게로 날아온 전서였다.
그 안에는 ‘무한 진가 표국을 점거해 진소청과 혁련휘를 구금하라.’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소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독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다? 어떻게?
그리고 분명 혁련휘는 은수의 안내를 받아 은밀하게 도착했었다.
그것까지 알 정도라면…….
‘결국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후후, 차라리 잘되었다. 이로써 확실해진 거야. 나를 신경 쓸 정도라면 확실히 마천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인데…….’
한 가지 궁금한 건 ‘누가?’였다.
자신의 눈을 속이고 지켜볼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마천에 있단 말인가?
‘좋아. 지켜봐라, 계속. 그게 네놈들의 발목을 잡게 될 테니까.’
소청이 음흉하게 웃었다.
“초사.”
“예, 패월.”
“전서구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
“예? 하지만 그리되면 저들이 군을 이끌고 진가 표국을 포위할 것입니다.”
“괜찮아. 저들의 의도대로 되도록 놔둔다.”
“…….”
초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 마라 초사. 다 생각이 있으니까.”
소청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웃었고 초사는 고개만 갸웃거리다 돌아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나가지 못하게 포위하라!”
이상백이 관군을 이끌고 진가의 표국을 포위한 것은 그로부터 하루 뒤였다.
고작해야 분점에 불과한 진가 표국을 무려 이백에 달하는 관병들이 포위했다.
“이, 이게 지금…….”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달려 나온 황보인 등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소청이 그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관에서 우리 표국에는 어쩐 일이오?”
“그대를 구금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오? 관에서 나를 말이오?”
“그렇다.”
소청이 스산하게 웃었다.
“나를 잘 모르나 본데. 가능하겠소?”
이상백을 향해 다가서는 소청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관병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이상백은 걸음마다 더욱 짙어지는 소청의 기운에 진땀을 흘렸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그가 데려온 관병들은 수많은 전장에서 맹위를 떨쳐 온 정예였다.
그런데 소청이 뿜어내는 기세에 모두가 얼굴을 찡그리며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네 이놈! 감히 관병에게 대항할 참이더냐!”
“그럼 뭐 어쩌겠나? 아무 죄도 없는 나를 해하러 온 자에게 손 놓고 당하란 말이냐?”
소청이 싸늘하게 말하자 황보인을 비롯해 진가 표국에 기거하고 있는 자들이 저마다 무기를 움켜쥐었다.
“소청, 저놈의 목을 베면 되나?”
혁련휘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이상백을 노려보았다.
“아니, 저놈은 내가 맡겠네. 나머지 관병들을 부탁하지.”
“알았네. 흔적도 없이 잘라 놓겠네.”
진소청뿐만 아니라 혁련휘마저 살기를 뿜으며 흑룡아를 잡아 들자 이상백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머, 멈춰라, 이놈! 네놈이 어려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인데! 이러고도 네놈이 무, 무사할 것 같으냐?”
“상관없어! 네놈을 죽이고 숨어 버리면 되니까.”
“이, 이…….”
이상백은 소청의 위압적인 기세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중원 무림의 최고수라는 무황조차도 관병에게 한발 물러났는데…….
소청이 세게 나오자 당황한 이상백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나, 나를 죽이면 네, 네놈 가문은 무사할 수 없다!”
“뭐?”
일순간 소청의 눈이 가늘어지고 온몸에서 뿜어지던 기세가 살기로 뒤바뀌었다.
“커억!”
휘몰아치는 살기가 칼날처럼 사방을 헤쳐 놓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짓눌린 이상백이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네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부릅떠진 소청의 시선이 이상백의 눈동자에 닿았다.
마치 눈에 불이 붙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고 두려움에 사지가 벌벌 떨려 왔다.
죽음의 눈동자.
전장을 수도 없이 헤쳐 온 이상백이었지만 도무지 그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 사천 진가는 이미 관병에 의해……. 내가 죽으면 한 놈도……. 으웩!”
이상백이 두 손을 땅에 대고 절하는 듯한 모습으로 피를 토했다.
순간 이상백을 무섭게 노려보던 소청이 기세를 풀어 버렸다.
“허억, 허억…….”
이상백은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듯한 심정이었다.
고작 약관을 넘어 보이는 애송이의 기세가 어찌 자신을 비롯한 이백의 정병을 모조리 짓누른단 말인가?
소청은 천천히 이상백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귓가에 대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만약에 진가에 생채기 하나라도 생기면 반드시 찾아가서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네놈뿐만 아니라 네놈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소청의 말에 이상백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노려보던 소청이 물러나자 이상백이 마른침을 삼키며 일어났다.
소청을 비롯해 표국 분점에 모인 무림인들이 모두 물러났음에도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았다.
“포, 포위하라.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
명령을 내리던 이상백은 소청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마주치고는 말이 막혀 버렸다.
마치 마지못해 허락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그 이상 관여했을 때는…….
이상백은 손이 잘게 떨려 왔다.
“가, 가자!”
명령을 내리다 만 그는 서둘러 말 위에 올라 도망치듯이 떠났다.
그 뒤로 진가의 주위를 관병들이 포위했지만 담 안쪽으로는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다.
“소청, 괜찮을까? 관부와 이렇게 마찰을 일으켜도?”
“글쎄.”
혁련휘의 말에 소청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소청이 이상백에게 새겨 준 것은 두려움이었다.
뇌리에 가득히 새겨질 정도로 살기를 뿜어 놓았으니 겁을 집어먹은 이상백은 절대로 소청을 다시 보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백의 말처럼 사천의 진가 역시 관병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그리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상백이 속해 있는 곳은 후군 도독부였고 사천은 좌군 도독부의 관할이었다.
서로 독립적인 위치에 있으니 이미 오랫동안 관과 친분을 유지해 온 진가신이라면 별다른 마찰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이제 놈들의 눈을 속여 볼까?”
“예?”
황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소청은 아무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소청의 방 안에 네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소청과 혁련휘.
그리고 소청과 혁련휘?
마치 쌍둥이처럼 체형과 얼굴이 똑같았다.
“꼭 이래야 하나? 흑룡아를 넘겨주긴 좀 그런데…….”
“그럼 따라오지 말든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소청의 핀잔에 혁련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흑룡아를 또 다른 혁련휘에게 넘겨주었다.
“은수, 재선.”
“예, 패월.”
소청과 혁련휘의 모습으로 변한 두 사람이 대답했다.
“너희는 지금부터 진소청과 혁련휘다.”
소청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은밀하게 은수와 재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위장하게 했다.
말하자면 대역이었다.
“한데 정말로 패월의 이목에 걸리지 않는 감시자가 있단 말입니까?”
“글쎄. 곧 알게 되겠지. 하지만 분명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고 확신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게 가능하긴 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눈치채지 않을까요?”
“눈치채면 감시자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거고 아니라면 관과 저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
“음,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는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은수의 물음에 소청이 피식 웃었다.
“그냥 술이나 먹어.”
“예?”
“한껏 겁을 줬으니 관병들이 너희들에게 다가서지는 못할 거야. 모두에게도 방해하지 말라고 했으니 수련을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을 테고…….”
“아, 알겠습니다.”
“자, 그럼 수고들 해.”
소청이 은수에게 창을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가 볼까? 관에 어떤 새끼가 들러붙어 있는지 확인하러.”
소청과 혁련휘는 그렇게 사라졌다.
방 안에 남은 소청과 혁련휘의 대역은 멀뚱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