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8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85화
184화. 터트려진 천뢰충파
진룡각의 내부는 무척이나 소박했다.
정천맹주의 거처이기도 했던 그곳은 수많은 사람이 지나쳐 갔으나 지금의 분위기만큼 소박했던 적은 없으리라.
너른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활짝 열린 창문 앞에 놓인 탁자가 전부였다.
방유현이 꾸며 두었던 분재도, 남궁천세가 벽을 장식해 두었던 수많은 무구와 족자도 없었다.
가장 화려한 것이 편안함을 강조해 만든 무황의 의자랄까?
진룡각의 내부로 들어가자 혈랑대의 수장인 만중이 혁련휘와 소청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무황을 뵙습니다.”
소청의 인사에 무황이 반개한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나른한 듯한 표정에서 나올 수 없는 강렬함도 그대로였고 그저 앉아 있음에도 전해져 오는 위압감도 그대로인데…….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소청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순간 혁련휘의 얼굴이 살짝 굳었고 만중의 눈빛은 매서워졌다.
하지만 무황은 웃기만 했다.
“세부적인 이야기는 군사와 이미 끝냈음에도 나를 찾은 이유를 말하라.”
무황은 언제나처럼 말을 돌리지 않았다. 직설적이고 직접적이다.
소청은 무황의 그런 점이 좋았다.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한 시대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리라.
“비무를 해 보고 싶습니다.”
“비무라…….”
“예.”
소청의 말에 만중이 그를 째려보았다.
“진 공자, 갑자기 찾아와서 비무이라니……. 아무리 진 공자라 해도 과한 처사입니다.”
과하다?
의미가 모호하다. 아니 상황과 맞지 않는다.
바로 자신의 뜻을 비치기는 했으나 무황이 먼저 물었기 때문이고 그 답이 과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황이 손을 들어 만중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이 녀석도 알아야 할 일이다. 굳이 나의 상태를 안다 해도 입이 싼 녀석은 아니니…….”
“……?”
뭘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마종이라는 녀석의 경지를 가늠해 보고자 함이냐?”
무황은 이미 소청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예. 검존은 패했고 무황께선 그를 꿇렸으니 가장 잘 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좋다. 여차여차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따라 나오너라.”
“예.”
무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만중과 혈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기다리라.”
“주군!”
“정사 연맹의 심처이자 휘와 소청이 함께 있는 곳이다. 호위가 필요할 일이 아니다.”
“…….”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비무일 뿐인데 어째서 만중은 저리도 걱정하는 것인가?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는 혁련휘의 표정은 또 무어란 말인가?
의아함을 품고 무황을 따라 나간 곳은 진룡각의 지하에 만든 개인 연무장이었다.
길고 긴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 무황이 앞서 걸었고 혁련휘와 소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무황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가진 듯한 노인의 발걸음이었다.
막 홰로 밝힌 계단의 끝점에 다다랐을 때 소청과 혁련휘는 ‘아!’ 하는 나지막한 감탄성을 질렀다.
활짝 열린 양쪽 문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용이 당장이라도 승천할 듯 보였고 문 안쪽으로 드러난 천연의 공동은 기괴한 종유석들로 가득했다.
벽면에 박힌 야명주의 빛에 반사된 내부는 마치 별세계처럼 보였다.
“밖에서 기다리라.”
“주군!”
“어허, 쓸데없는 걱정 말고 좋은 술이나 몇 병 가져오너라. 모처럼 제자 놈과 그 친구 놈이 왔으니 술이나 한잔 나눌 수 있도록.”
“…….”
호위를 물린 무황은 안으로 들어와 연무장의 문을 걸어 잠갔다.
“쯧쯧, 다들 나이가 들었는지 걱정만 늘었어.”
무황이 혀를 차며 돌아서서 소청과 혁련휘에게 말했다.
“연맹주가 된 이후로 가끔 이곳에서 술을 마신다. 군사에게 듣자 하니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공동의 위에 초대 정천맹주가 자신의 거처를 지었다고 하더군. 쯧, 정천맹 놈들은 하여간 경치 좋은 곳은 차지하고 있단 말이야.”
“…….”
무황의 농담처럼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
“대단…….”
하지만 그 안에는 그저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칼날이 스치며 지나간 무수한 흔적들, 속칭 절대라는 경지를 경험했던 정천맹의 주인들이 남긴 수련의 기록이었다.
내부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들이 남긴 흔적이 장엄함으로 다가왔다.
소청과 혁련휘는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절로 술맛이 돌 만한 공간입니다.”
혁련휘다운 표현이었다.
“한데 저 글귀들은?”
소청이 벽의 너른 면마다 채워진 수많은 글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한 자들이 깨달음의 마지막 벽에 가로막혀 고심할 때 적어 놓은 글귀니라.”
“…….”
무황이 표현하는 약한 자들이라는 것은 아마도 전대, 전전 대를 이끌어 온 정천의 주인들일 것이다.
“멍청한 놈들, 제 놈들 고민을 화두로 던져 놓았어. 후대가 그 고민을 해결해 발전하기를 바란 모양이다만…… 그저 화두일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하지만 그건 무황에게만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그 안에 글귀를 남긴 자들 중 무황의 경지를 엿보았던 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무황에게는 그들이 남긴 고심의 ‘화두’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만 깨닫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무릇 경지에 오른 자들은 오랫동안 가져 온 습관으로 인해 생각이 굳어지기 마련이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비슷한 고민의 반복이라면 타인의 고민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고민이지만 그곳에는 자신들이 시행착오를 겪어 온 수많은 방법이 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연무장이 아니라 비고로군요.”
“비고는 무슨…….”
무황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몸에 이상이 있으신 겁니까?”
“이상?”
“예.”
무황이 소청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상이라 부를 순 없겠지.”
“…….”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다? 노환?
말도 안 된다.
무황이 누구인가?
정사를 통틀어서 그의 경지를 엿보았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있었다면 황제외경을 남긴 대북별왕 정도랄까?
하지만 그도 말년에 이르러 노환 같은 지극히 평범한 최후가 아니라 등선을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황에게 노환이 찾아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혁련휘도 만중도 다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란 말인가?
“자, 이제 시작해 보자꾸나. 네 녀석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
무황이 뒷짐을 지고 섰다.
“정말로 어디가 좋지 않은 것이라면…….”
“쓸데없는 소리!”
‘나중에 해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반개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막대한 무거움이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소청을 덮쳐 왔다.
노환? 소청의 생각이 정말로 쓸데없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기운이었다.
“네 녀석의 앞에 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나지막이 지어진 웃음은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단지 표정 하나 바뀌었을 뿐이고,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우웃…….’
과연 무황이었다. 이제껏 상대해 본 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힘이었다.
그가 상대해 왔던 구자겸? 혈승?
‘그따위’라고 표현해야 마땅했다. 그들은 무황의 앞에 이름 석 자 내밀 만큼도 되지 않는다.
본신의 기운을 개방한 무황의 존재감은 그들과 ‘비교’라는 것 자체를 거부해 버릴 만큼 거대했다.
‘제길, 이 정도인가?’
과거 사도련에서 잠시 시험을 당했을 때는 ‘강하다.’라는 것만 느꼈을 뿐이었지만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강하다.
중원 최강이라는 자리를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었다.
여덟이었던 기운이 넷이 되었으니 그의 단전에는 과거 두 개의 혈 자리에 있던 기운이 모인 셈이었다.
하지만 단전의 모든 기운을 개방했음에도 무황의 압박감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휘리리리…….
소청은 곧바로 단중의 화기를 단전을 향해 밀어 넣었다.
우우웅.
푸른 빛이 소청의 전신을 감싸자 주위의 대기가 진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드득, 드드득.
응축된 단전의 기운이 무황의 압박감을 밀어내며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비록 무황의 기운이 가진 영역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이 작았지만 일단은 소청의 기운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호오?”
처음으로 무황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놀람까지는 아니었으되 의외라는 감탄 정도는 되었다.
“제법이구나. 전에 보았을 때는 그 힘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만 마치 곤륜의 표합탄공(飄合彈空)도 같은 기운이구나?”
표합탄공은 여러 사람의 기운을 모아 단번에 발출하는 무공이었다.
소청의 몸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마치 두 배로 늘어난 듯한 착각이 든 무황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네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더냐?”
“…….”
“한번 펼쳐내 보거라.”
“예?”
소청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천뢰충파의 기운을 써 보라는 뜻일까?
하지만 이런 공동에서는…….
“쯧, 대단한 기운이긴 하다만 고작 그만한 힘을 가지고 이 동굴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느냐?”
“…….”
뒷짐을 풀고 양손을 늘어뜨리자 무황의 기세가 바뀌었다.
쿠우우…….
잠시나마 버텨 냈다고 생각했던 무황의 기운이 삽시간에 소청이 만들어 낸 태극의 영역을 침범해 왔다.
버텨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그의 영역이 짜부라지듯이 짓눌렸다.
‘이, 이런!’
자신이 가진 최강의 수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황이 천천히 들어 올린 손을 활짝 펴자 전신이 옥죄어 드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기운의 소청의 전신을 꽁꽁 묶어 조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숨을 쉬는 것이 이리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던가?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소청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순간 소청의 동공이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이판사판이다.
차자작!
소청의 창대가 쇳소리를 내며 길어지고 청염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우우우웅!
창대가 거친 떨림을 만들어 내는 순간 소청이 무황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찔러 넣었다.
슈우욱!
푸른 불꽃이 창대를 떠나 거센 충돌음을 만들어 내었다.
꾸우우우웅!
단전과 단중의 화기가 격돌하며 만들어 낸 폭발이 시작되는 순간 묘한 눈빛을 빛낸 무황의 손이 시작되는 폭발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
설마?
소청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는 순간.
꾸아아앙!
터졌다.
분명히 폭발했고, 거센 충격파가 연무동에 몰아닥쳤다.
그런데.
“흠, 대단하구나. 적어도 십수 년 사이에 나를 이 정도로 놀라게 한 기운은 처음이다. 기운의 결을 잡았음에도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그대로 맞았다면 팔 한쪽은 족히 내줄 뻔했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는 무황이었지만 소청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천뢰충파가 손안에서 터져 버렸다.
물론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생채기에 불과했다.
폭발을 움켜쥐었던 무황의 손바닥에는 겨우 찢어진 상처만 있었고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충격파는 그의 옷자락을 거칠게 떨려 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소청은 분명히 보았다.
관조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인지 그 폭발력을 무황이 어떻게 줄여 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구자겸의 마라강기처럼 그 외부를 억누른 것이 아니라 폭발의 중심을 정확하게 잡아 응축시켰다.
자신이 혁련휘가 펼쳐 내었던 와류투공의 중심점을 터트려 버린 것 같은 방법이되 달랐다.
묘하게 축의 묘피를 펼칠 때처럼 폭발력 자체를 응축시켜 버렸다.
소청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무황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할 것이냐?”
무황이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