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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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16화
215화. 원하지 않았던 적
“거기 서라!”
파학!
머리끝까지 화가 오른 천빙궁주가 떨어지는 돌더미를 향해 수차례 주먹을 뻗어 내었다.
퍽! 퍼퍽! 퍼석!
권에서 뿜어진 기운이 유성처럼 날아가 돌 더미를 부쉈고 천빙궁주가 그 사이를 뚫고 달렸다.
“이놈……들?”
굽어진 협곡 측면을 밟으며 뛰어든 청빙궁주는 일렬로 늘어서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신승과 백인회의 무인들을 맞닥뜨렸다.
“이, 이건…….”
뒤가 막혀 있다.
거대한 분지였고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곳이었다.
“설마?”
천빙궁주가 재빨리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 면을 살폈다.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
함정이었다.
‘젠장! 서둘러…….’
수하들을 물려야 했다.
적의 규모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포위되면 모두가 위험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리려는 사이 그의 뒤를 따른 수하들이 분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망할! 물러나라! 함정…….”
“크아악!”
그의 목소리는 뒤이은 비명에 감춰져 버렸다.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 쪽에서 생겨난 비명.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적들을 섬멸하라!”
일렬로 늘어선 백인회의 중심에서 신승의 고함이 메아리를 만들며 분지 안을 울리고 절벽의 상단에서 몸을 숨겼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와아아!”
함성과 함께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들이 허리에 줄을 달고 쏟아져 내려왔다.
“크악!”
“으아악!”
순식간에 비명이 더해지고 사방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비켜라! 내가 퇴로를 뚫겠다!”
이미 함정에 빠진 이상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후방의 입구를 통해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날리려는 순간 거대한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우우우!
소림의 사자후를 뿜어내며 신승이 천빙궁주의 머리를 뛰어넘어왔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 도망칠 수 없다!”
신승은 지면에 착지함과 동시에 대라장(大羅掌)을 뿜어내었다. 거대한 손바닥이 겹겹이 중첩되어 그물처럼 덮쳐 왔다.
쩌어엉!
다급히 주먹을 내질러 막은 천빙궁주가 폭음과 함께 다섯 걸음을 밀려났다.
‘크으윽!’
하지만 비틀거림이 채 바로 세워지기도 전에 신승의 몸이 아홉 개의 잔영을 만들었다.
극상의 절예인 연대구품(蓮臺九品).
아홉으로 나누어졌던 신승의 몸이 순차적으로 천빙궁주를 공격했다.
쩡! 쩌정! 쩡!
“컥!”
첫 번째, 두 번째까지는 가까스로 막았으나 세 번째로 뻗어 온 주먹에 명치를 허용했다.
신승의 손에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단숨에 쳐 죽일 생각이었는지 내리 여섯 번의 공격이 천빙궁주의 몸을 때렸다.
“우웩!”
신승의 몸이 다시 합쳐졌을 때 천빙궁주는 바닥에 엎드려 사발을 채울 만큼의 피를 흘렸다.
정천 오존 중 내가 기공에 있어서 태존과 함께 최고라 불리는 신승이었다.
천빙궁주가 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마, 망할 땡……중…….”
퍼억!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켰던 천빙궁주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적의 수장이 죽었다! 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라!”
신승의 일갈에 전장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머리를 잃고 천천히 쓰러지는 천빙궁주의 모습에 북천맹과 백인회의 무인들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고, 천빙궁의 무인들은 점차 전의를 잃어 갔다.
그곳에 정의나 협의 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피 맛에 취해 버린 것처럼 적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수장을 잃어버린 천빙궁의 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한 시진 가까이 이어진 전투의 끝은 분지의 내부를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허억, 허억…….”
수많은 시체의 틈바구니에서 몸을 세운 북천맹의 무인들은 거친 숨을 토해 내었다.
“적의 후속이 올 수도 있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간다!”
“예!”
신승의 외침이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기세 오른 무인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멸절사태! 서둘러 이동…….”
그 순간 섬찟한 느낌이 신승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느낌이었다.
‘이, 이건!’
재빨리 고개를 돌린 곳은 분지의 입구였다.
거대하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피, 피해……!”
퍼어어엉!
거대한 폭발은 신승의 불안감을 현실화시켜 주었다.
“아…….”
입구의 근처에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범위 내에 있던 무인들은 온전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육편으로 찢겨 나갔다.
“많이도 죽었군.”
“…….”
나른함 안에 싸늘할 정도로 차가움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
새하얀 무복 위에 하늘빛 장삼을 걸친 사내가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지키는 백의 무인들의 검이 휘둘러졌다.
촤자자작!
백효의 주위 수십 장 내에 있던 무인들이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걸음을 멈춘 사내는 졸린 듯한 눈으로 분지 안쪽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전투를 치르느라 많은 무인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그래도 천이 넘는 수였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산보를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호!”
그러곤 신승에게서 시선을 멈춘 채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부터 막대한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던 신승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차가운 인상의 사내.
굳이 통성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북천대공…….”
북천대공 백효.
그자뿐이다.
북해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은 그 외에는 없었다.
슷.
신승을 발견한 백효는 묘한 미소와 함께 지면을 스치듯이 일보를 디뎠다.
화학!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신승을 향해 다가왔다.
어디선가 북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한기가 신승의 몸을 덮쳐 왔다.
신승은 굳은 얼굴로 쌍장을 동시에 뻗어 내었다. 거대한 불기가 대기를 밀어내며 쏘아져 나갔다.
휘적!
하지만 그저 팔을 휘저은 것만으로 신승의 장력이 봄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쯧, 인사도 나누지 않았는데 공격부터 하다니……. 참으로 예의가 없는 인물이었군.”
일장.
백효가 멈춰 선 곳이었다.
그가 그곳까지 다가서는 순간 분지 내에 있는 그 어떤 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대가 신승이겠지?”
“…….”
신승은 말없이 백효를 노려보았다.
침묵의 긍정.
“음, 생각보다 실망이군. 정천의 신승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들었는데…… 이따위 암계나 꾸미면서 싸우다니…….”
“…….”
신승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가진 바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렸다.
틈? 허점?
백효에게 그따위 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그가 뿜어내는 존재감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숨이 막혀 올 지경이었다.
막아야 했다.
그를 막고 자신의 뒤에 있는 중원의 무인들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노, 놈을 죽여라!”
“와아아아!”
백인회의 무인들이 백효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에 신승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분지 안을 짓누르고 있는 그의 존재감이 전해지지 않는단 말인가?
“안, 안 돼…….”
신승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백효의 소매가 가볍게 떨쳐졌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처럼 펄럭였을 뿐이지만 가공할 한기가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쫘아아악!
다섯 갈래로 찢어졌다.
백효를 향해 나섰던 수십 명의 무인이 정확히 다섯 등분으로 나누어져 바닥에 떨어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쯧, 정말로 예의가 없는 자들이군. 대화하는 와중에 공격이라니 말이야.”
딱히 기운을 끌어 올리지도 않고 그저 손을 휘저은 것만으로 만들어 낸 참상에 신승의 노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노옴!”
벼락같은 노성과 함께 거칠게 부풀어 오르는 황색 가사.
쿵!
축이 되는 일보가 강하게 지면에 디뎌지는 순간 신승의 오른손이 활짝 펴지며 뻗어졌다.
쿠우우우…….
신승의 손을 통해 빠져나온 거대한 장력, 대력금강장이 백효의 전면을 향해 날아왔다.
백효는 그저 가볍게 손을 들어 마주했을 뿐이었다.
쩌어엉!
거친 폭음이 울리고 세찬 바람이 백효의 옷자락을 찢어 낼 듯이 펄럭이게 했다.
“하압!”
신승은 멈추지 않았다.
양손을 번갈아 가며 쉬지 않고 내질러 대었다.
일장에 만년 거석을 부순다는 장력이 백효를 향해 연거푸 뿜어져 나왔다.
쾅! 쾅쾅쾅!
쉼 없는 폭발은 충격파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일어난 바람이 흙더미를 솟구쳐 올렸다.
먼지의 범위에 갇혀 버린 백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승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콰앙!
“허억! 허억!”
신승이 거친 숨을 토해 내었다.
백효가 같은 힘을 뿜어내었다면 분명 반탄력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로 당했을 리가 없다면 응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막아 내기만 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놈의 존재감이 하나도 줄지 않았어…….’
신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분지 안을 채우고 있는 백효의 차디찬 존재감이었다.
줄기는커녕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멸절!”
“……!”
“서두르게! 어서 도망쳐!”
“신승!”
“시간이 없네! 이자는 내가 막고 있겠네. 그 틈에 도망치게!”
신승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멸절 사태를 향해 외치며 다시금 공력을 끌어모았다.
천빙궁을 유인해 싸운 뒤 살아남은 무인은 대략 일천오백여 명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자신이 백효를 묶어 두고 있는 동안 도망쳐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이다.
“신승……. 치잇! 모두! 이곳을 빠져나가라!”
결국 멸절 사태는 모두를 향해 외쳤고 북천맹의 무인들이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멸절사태와 백인회의 무인들은 신승을 두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어서 도망치란 말…….”
다급함에 소리를 지르던 신승의 고개가 돌려졌다.
기세가 바뀌었다.
차갑지만 여유로웠던 백효의 한기가 섬뜩해졌다. 그리고 먼지가 걷히며 백효의 모습이 드러났다.
찢어진 장삼.
헝클어진 머리칼…….
반 장 가까이 밀려났음을 알려 주는 족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었고 여전히 싸늘함을 품고 있었다.
“도망치라 허락한 적이 없는데…….”
백효의 손이 천천히 들리고.
촤아악!
칼날 같은 강기가 사방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스걱! 쩡!
강기는 도망치는 북천맹의 무인들을 가르고 절벽 면이 사방에서 터져 나갔다.
“끄악!”
“으아악!”
강기에 몸이 양분되고 무너지는 돌 더미에 깔려 죽어 가는 이들의 처참한 모습에 신승의 노기가 극에 달했다.
“이, 이노옴!”
신승의 장력이 벼락같이 몰아쳤지만 백효는 피할 생각도 없이 장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폭음과 충격파를 뚫고 백효가 걸음을 내디뎠다.
“신승,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뭐라?”
“저들이 도망치는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날파리가 떼를 지어 봐야 날파리야. 조금 전처럼 손짓 한 번이면 족하지.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야. 물론 조금 전처럼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이라면 날파리 떼라도 죽여서 나의 유흥을 끌어내야겠지만 말이야.”
“유흥이라고?”
“그래. 유흥. 그러니까 좀 더 힘을 내 봐. 나의 타는 듯한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도록 말이야.”
“…….”
나른함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백효는 계속해서 신승을 향해 다가왔다.
“신승! 우리가 돕겠소!”
“안 돼! 물러나게!”
신승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자신의 힘이 백효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도망쳐야만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목숨만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저들을 살릴 수 있다면…….
“신승!”
멸절사태의 외침에 신승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뒤를 부탁함세.”
“…….”
어째서 그의 미소가 그리 처연해 보인단 말인가?
멸절사태는 차마 더 이상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