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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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12화
211화. 설영궁(雪影宮), 후방의 전투
혁련휘가 비릿하게 웃으며 ‘흑룡아’를 뽑았다.
손잡이를 통해 싸늘함이 전해지자 묘한 미소를 머금은 혁련휘의 시선이 추격해 오는 적들을 향했다.
치열한 전장 속에서 빠져드는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축의 묘리에 이어 스승에게 배운 또 하나의 기예.
‘신(伸)의 묘리.’
모든 무공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법이었다.
강한 무공을 익힌다 하여 무조건 강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차이였다.
스승이 자신에게 전한 파천도법.
만변을 담은 만경창파, 힘을 끌어 올리는 경천기개, 일격에 강력한 파괴력을 담는 붕산진곤.
삼 초식의 도법이었으나 실상은 단 두 개의 초식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일 초식으로도 충분했다.
축의 묘리로 줄이고, 신의 묘리로 늘린다.
그것만으로 초식은 무한한 가짓수로 변하게 된다.
“후우…….”
혁련휘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서늘하게 변했다.
감았다 뜬 눈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멈추어졌고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결의 사이로 ‘흑룡아’가 휘둘러졌다.
슥!
그의 일도가 허공을 베어 내자 눈에 보이던 수많은 결이 사라졌고.
찰칵!
칼이 그의 허리께에 채워진 도갑 속으로 빨려 들었다.
쩍!
추격하던 무인들의 선두에 서 있던 자는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만년 거석의 힘이 그 중심을 강하게 짓누름과 동시에 갈라진다.
왼쪽 심장에서 시작된 선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세상을 만 갈래로 찢어 놓는 변화가 파도처럼 추격대를 덮쳤다.
“끄아악!”
축의 묘리에 담은 만경창파가 신의 묘리에 따라 거대해졌다.
별동대의 꼬리를 따라 집중되었던 추격대 무인들이 육편으로 변했다.
뒤따르던 무인들은 졸지에 핏물을 뒤집어쓴 채 걸음을 멈췄다.
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옥명! 중걸!”
혁련휘의 외침에 옥명자와 서문중걸이 지면을 스치고 튀어나오며 좌우의 숲을 향해 검격을 횡으로 그었다.
우두둑! 쿵! 쿠쿵!
숲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지며 멈칫했던 설영궁의 무인들을 향해 쓰러졌다.
“피, 피해라!”
누군가의 외침.
하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듯 수십의 무인들이 나무 더미에 압살당해 버렸다.
“황보인! 적의 추격을 멈춘다!”
혁련휘의 외침에 황보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보를 취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왕삼권에 담은 와류.
휘리리리…….
뻗기도 전에 대기의 흐름이 회전을 시작했다.
“합!”
후웅!
거칠게 뻗은 일권이 소용돌이를 만들고 쓰러진 나무 더미가 회오리처럼 변해 주변을 집어삼켰다.
우드득! 쾅! 콰쾅!
추격대는 황보인의 일권이 만들어 놓은 처참한 광경에 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멈춰 버렸다.
“머뭇거리지 마라!”
혁련휘의 외침을 끝으로 별동대의 첫 번째 기습은 끝났다.
단 한 번의 기습.
설영궁은 백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잃어버렸다.
* * *
두두두.
전령은 미친 듯이 말채찍을 휘둘렀다.
원체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다 보니 설영궁만 하더라도 그 전열의 거리가 수백 장에 달했다.
“궁주께 보고드립니다!”
설영궁주의 곁에 도착한 전령이 다급하게 외쳤다.
“후방에 적의 기습이 있었습니다. 공화척 대장로를 포함한 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뭣이!”
설영궁주 금용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공화척은 설영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그가 죽었다면 습격해 온 자들의 무위가 경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적의 수는 얼마나 되더냐?”
“그것이…….”
“말하라!”
“정확하지는 않으나 스물 가까이 되어 보였습니다.”
“뭐라? 스물?”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설영궁주가 쌍심지를 돋아 올렸다.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추형진을 이루어 설영궁의 정예들이 선두에 집중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 자들이 기습해서 대장로를 포함해 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멍청한 놈, 전령이라는 놈이 적의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냐!”
설영궁주의 호통에 전령이 찔끔하며 목을 움츠렸다.
“궁주님, 아마도 놈들이 별동대를 구성한 모양입니다.”
“음…….”
곁에 있던 호법장로 맹곽의 말에 설영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명 내외의 기습으로 대장로를 죽였다면 분명 고수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틀림없다는 판단을 했다.
“내내 달리기만 해서 심심한 터였는데 잘되었지 않습니까? 이제야 북천맹에서 병력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멍청한 성성이 떼 놈들이 단강구까지 어찌 갔겠습니까?”
맹곽의 말에 설영궁주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어차피 북천맹 놈들이 공격해 올 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 아닙니까? 궁주님과 대공께서 선두에서 무황이 있는 무한으로 진격하고 계시니 우리는 후방의 적을 섬멸하며 전공이나 챙겨 내려가지요.”
옳은 말이었다.
본대의 후방에서는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세작들의 정보에 의하면 중원의 힘은 서천맹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후방에서는 전공을 세우기가 요원한 일이었다.
차라리 방향을 틀어 산서성의 북천맹을 부수는 것이 이후 설영궁의 입지를 세우는 데 훨씬 유리하리라.
“맹곽.”
“예, 궁주님!”
“궁주님께 전령을 보내라. 후방에 다수의 적이 나타나 우리는 적들을 섬멸하고 이동한다 하라.”
“후후, 다수의 적입니까?”
“그래. 다수의 적이다.”
설영궁주가 음흉하게 웃자 맹곽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충!”
“예, 궁주님!”
“진형을 추형에서 원산(遠散)으로 바꾸며 이동한다. 놈들의 별동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인근에 분명 다수의 적이 포진하고 있을 터다. 적의 본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기습해 온 적들을 쫓지 마라. 놈들을 끌어들여 섬멸한다.”
“알겠습니다.”
원산진이란 같은 수의 병력을 중앙에서부터 동심원을 이루듯 배치하는 진법이었다.
중심으로 갈수록 조밀한 병력 구성을 가지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산개되어 약한 전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외곽의 무인들은 점 단위로 흩어져 있기에 기습을 한다고 해서 큰 피해를 줄 수가 없었다.
또한, 더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순식간에 흩어진 적들이 포집(包輯)되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 * *
“소청, 놈들의 진형이 바뀌었다.”
“…….”
대막을 떠나오며 사흘 동안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다섯 번의 기습을 펼쳤다.
시간은 언제나 이각.
동일한 시간 동안을 공격했으나 적에게 끼치는 피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더욱이 추격을 해 오지 않는다.
“쯧. 원산진으로 바꾸고 있었군. 어쩐지 본대와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했더니…….”
후위를 뒤쫓던 혁련휘와 소청은 적들의 이동 속도가 느려진 것이 자신들의 기습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추형에서 원산.
돌격진에서 방어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기습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의도처럼 보이는데?”
혁련휘의 말에 소청이 턱을 쓸었다.
“설영궁주라는 놈은 꽤나 잔인한 놈이었군. 수하들을 미끼로 던지다니…….”
소청과 별동대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웬만한 문파의 문주급을 웃도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나 소청과 혁련휘, 소강을 비롯한 서너 명은 오존 이상이거나 그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졌다.
그들을 잡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원산진은 외곽의 아군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어진으로 들어가기는 쉬우나 빠져나오기는 어렵다.
소수의 강력한 적을 상대할 때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원산진(遠散陣)이라…….”
원산진은 진격하는 와중에 사용할 만한 진이 아니었다.
“아마도 본대와 거리를 두고 전공을 올려 보겠다는 속셈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적어도 대규모 전투는 산서성 인근이 되리라 판단했는데 조금 더 당겨질 모양이군. 휘, 계획을 변경한다. 굳이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렇군.”
혁련휘가 소청의 심중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기습을 한 이유는 적의 병력을 줄일 목적도 있었지만 설영궁의 속도를 늦추어 본대와 거리를 두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한 첫 번째 전투지가 산서성 근교였다.
하지만 스스로 거리를 벌려 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별동대만으로 칠 생각인가?”
“아니, 고작 설영궁에 전력을 낭비해선 안 되겠지. 그리고 적의 본대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어.”
“그럼?”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잔머리를 쓰는 소청은 여느 군사의 전략에 못지않았기에 혁련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수!”
“예, 패월.”
“설영궁과 본대의 거리는 어느 정도 벌어졌지?”
“삼십여 리쯤입니다.”
“삼십 리라…….”
소청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삼십 리라면 무인들에게 있어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고수들로 구성된 지원군이라면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도 충분히 이동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아직 부족했다.
본격적으로 적과 전면전을 벌이려면 설영궁은 본대와 좀 더 멀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은수, 곧장 산서 인근 하곡으로 가라. 율산(栗山) 근교에 신승 어른과 합류한 북천맹의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소청은 그곳에서 첫 번째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미리 혜어화에게 그곳에 북천맹의 무인들이 대기하도록 부탁했다.
“그들의 병력 중 일천을 데려와라. 산서의 경계를 넘기 전에 설영궁을 친다.”
“알겠습니다.”
은수가 대답과 동시에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휘, 철혈군은 어디쯤 있지?”
“자네의 말대로 적의 우측 경로에 대기시켜 두었다.”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군은 강하다.
신승이 이끄는 백인회까지는 아니어도 단일 세력으로는 지금의 중원에서 그들을 대체할 만한 집단은 찾기가 힘들었다.
기습전에서 과한 전력을 노출시켜 저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소청은 혁련휘에게 미리 일러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했었다.
“그렇군. 좋아. 그럼 자네는 별동대 이 조와 함께 적의 우측으로 이동해 그들과 합류해 주게.”
“우측으로? 설마 계획을 앞당길 생각인가?”
“그래. 예정보다는 조금 빨라졌지만 어쩔 수 없지. 북해와의 전투는 최대한 빨리 끝낼수록 좋아. 중원의 대부분 전력을 가진 서천맹의 병력이 마궁을 압박하고 있다고 하지만 전력을 뒤집을 만한 고수가 부족해.”
“음…….”
“나는 북천맹의 무인들이 도착하는 즉시 설영궁을 처리하겠다. 신승 어른과 백인회가 적의 좌측을 침과 동시에 휘, 너는 우측을 쳐야 한다.”
“좌우를 공격해 적의 결집을 와해시키려는 것이군.”
“그래. 하지만 적을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만 잡아 두면 된다.”
“흐흠, 하나씩 차례대로 칠 생각인가?”
“맞아. 후방의 설영궁을 치고 나면 북천맹의 병력은 곧바로 좌측을 맡은 신승 어른의 전투를 돕는다.”
“우측 전력과 싸우는 우리만 죽어 나가겠군.”
혁련휘가 투덜거리자 소청이 빙긋이 웃었다.
“전면전만 벌이지 않는다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쳇, 알았다. 하지만 우리가 적들을 잡고 있는 사이에 본진은 단강구에 도착할 텐데 괜찮을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단강구에도 꽤나 많은 전력이 모여 있으니 제갈휘문이 알아서 잘 막아 주겠지.”
“알겠다. 하면 나는 곧바로 이동하지. 부디 조심해라.”
“그래. 무운을 빌겠다.”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이 조의 무인들과 함께 후방을 벗어났다.
모두가 떠나고 남아 있는 것은 소청과 별동대의 일 조뿐이었다.
“은수가 북천맹의 지원대를 이끌고 오자면 하루가 더 필요하다.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놈들을 기습한다. 기습 시간을 두 배로 늘리되 놈들이 조바심이 나도록 외곽만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방효곤.”
“예.”
“소강과 함께 전방으로 이동해라. 놈들이 수세에 몰리면 분명 본대에 연락을 보내려 할 것이다. 놈들의 연락 대책을 철저하게 섬멸해 고립시킨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