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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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07화
206화. 전쟁의 시작점
딱, 딱, 딱…….
손톱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
머리가 아픈지 제갈휘문은 이마를 짚은 손을 탁자에 괴었다.
답답했다.
지금쯤이면 연락이 왔어야 했다.
우진혜를 통해 적의 선발대와 전투가 벌어졌다는 전서를 받은 지가 이레가 지났는데 아직 소청으로부터 전서구가 오지 않았다.
“군사님.”
“음, 초사인가?”
“예. 비마대원들은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음…….”
이미 마천의 세작들을 척살할 준비가 끝났다.
혈승의 사태 이후로 개방과 하오문, 묵영단의 정보력을 동원해 찾아낸 마천의 세작.
각양각색의 신분으로 위장해 있는 그들의 수는 일백에 달했다.
무공이 높은 자들의 곁에는 비마대를 붙였고 그 외에는 각 파에서 은신술을 익힌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는 전서구를 탈취해 제갈가의 학사들에 의해 그들이 쓰는 암어, 필체까지 이미 모사가 끝난 상태였다.
소청에게 연락이 오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거참, 어찌 이리 늦는단 말인가?”
제갈휘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흑비는 무어라 합니까?”
“북해의 이동이 빨라진 탓인지 마궁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네.”
“하면 서둘러야겠군요.”
“그래. 마궁이 움직이기 전에 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서천맹을 움직여야만 하네. 그래야 마궁을 묶어 두고 북해만 끌어들일 수 있어.”
제갈휘문의 역할은 그들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미 북천맹에서 신승과 백인회가 북상을 시작해 소청과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구파와 무가들에는 세작 소탕이 끝나는 즉시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북해는 대막혈궁의 한 달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슬슬 마궁도 사천의 경계로 이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이미 모든 명령서를 작성해 두었고 전서구를 날리기만 하면 되었다.
한데 소청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군사님! 대군사님!”
탁자를 두들기는 손톱에 아릿함이 느껴질 때쯤 청초각의 문이 벌컥 열렸고 제갈휘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 공자의 연락입니다! 북해의 선발대 빙마동이 대막혈궁을 떠났다고 합니다.”
“……!”
“현재 진 공자가 섬뢰님이 이끄는 뇌령도문과 함께 계속해서 패전을 거듭하며 그들을 산서 방향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됐다!”
제갈휘문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제 시작이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초사, 비마대에 명령을 전해라! 저들이 전서구를 띄우는 순간 적의 세작들을 모조리 척살한다!”
“알겠습니다.”
초사가 뛰어나가고 제갈휘문이 곧바로 전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청초각의 학사들을 불러라!”
역정보를 흘려야 했다.
북해가 대막혈궁에 도착하는 즉시 움직일 수 있게 그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저들의 선발대로 내려온 빙마동은 소청 등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서천맹을 움직일 때였다.
그들로 하여금 마궁의 진격을 막게 하고 북해에 집중한다.
모든 것을 동원해야 했다.
아무리 뛰어난 무인들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별동대만으로는 부족했다.
북해의 전력은 약 이만에 달했다.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중원에 남아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진격해 오는 북해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끌어들인다.
제갈휘문의 시선이 중원의 모든 곳이 표시된 지형도에 닿았다.
그의 눈이 멈춘 곳은 하남, 산서, 섬서의 삼개 성이 만나는 곳.
삼문협(三門峽).
그 옛날 우왕이 산을 쪼개 귀석과 신석으로 강의 흐름을 셋으로 나누었다는 거대한 협곡.
‘북해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제갈휘문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길이 일렁거렸다.
* * *
드드득.
산서성 북쪽 대도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는 왕이는 늘 같은 시간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장사가 잘된 터라 술시 말(저녁 9시)이나 되어서야 정리를 시작했다.
“어이 왕이. 자네가 돈을 다 벌어 가는구먼!”
자신보다 일찍 문을 닫은 포목점 주인의 말에 왕이가 빙긋이 웃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왕이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나무 판으로 가게 앞을 막았다.
“휴우…….”
문이 막히자 적막이 찾아왔다.
온종일 사람들과 씨름하던 그가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굳어 있던 허리를 편 왕이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종이쪽지들.
“하곡인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서둘러 가게를 지나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거처의 한쪽 구석을 밀어내자 작은 방이 드러났다.
방 안에는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붓과 종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피 묻은 손을 닦아 내고 탁자로 다가가던 순간.
푸욱!
예리한 느낌이 스치는가 싶더니 그의 왼쪽 가슴으로 검극이 삐죽하게 솟아올랐다.
“……!”
왕이는 가슴에 힘을 주고 몸을 비틀었다.
쩡!
가슴에 박혀 있는 채로 검을 부러뜨린 왕이는 재빨리 뒤를 향해 장력을 날렸다.
콰아앙!
벽이 폭발하며 훤하게 구멍이 뚫려 버렸다.
“역시……. 푸줏간의 주인치고는 솜씨가 제법이군.”
“……!”
방 안 구석의 어둠에서 나타난 사내가 부러진 검을 버리고 또 다른 검을 뽑았다.
“누구냐?”
“나? 너를 죽이러 온 사람.”
“……!”
왕이는 무릎을 꿇고 찬찬히 적의 모습을 살폈다.
처음 보는 자였다.
아마도 자신의 숨겨진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좋지 않다. 일단은 내력을 모아야 해.’
검을 뽑지 않고 부러뜨린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관통상을 당했을 때는 절대로 박힌 무기를 뽑아서는 안 된다.
뽑는 순간 출혈 과다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몸을 관통한 검이 심장을 스쳤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속도가 달랐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내력을 모아 일격에 끝내야만 했다.
“정사 무림 연맹에서 보낸 것인가?”
“잘 아는군. 마천의 간자.”
“어떻게 알았지? 지켜보는 눈은 없었던 것 같은데…….”
“멍청한 놈. 한 달 가까이 네놈 곁에 있었다.”
“뭐?”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여러 번 얼굴을 바꾸었고 다른 대체자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놀라지 마. 우리 대장이 아주 훈련을 잘 시켜서 그런 것뿐이니까.”
암습자는 일그러진 왕이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암습자는 다름 아닌 비마대의 은수였다.
“네가 북해를 향해 전서구를 보내는 중원의 총책이더군.”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치밀한 놈들이다.
자신의 정체와 맡고 있는 일까지 알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리고 다른 세작들에게 경고를 보내야만 했다.
“한 가지, 알려 주지.”
“…….”
“네가 마지막이다.”
“뭐?”
왕이의 눈이 부릅뜨이는 순간 은수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망할!”
승패를 자신할 정도의 내공은 아니었지만 왕이는 다급히 장력을 제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이미 예리한 느낌이 뻗어 낸 손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스걱!
“……!”
왕이의 목에 붉은 선 하나가 생겨났다.
푸학!
혈선이 점점 넓어지더니 피가 원을 그리며 뿜어졌다.
툭, 데구르르르…….
눈을 감지도 못한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왕이의 몸이 서서히 쓰러졌다.
차악!
은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군.”
제갈휘문으로부터 은수에게 내려온 명령은 두 가지였다.
세작을 죽이고 북해에 전서를 보낼 것.
이미 청초각에서 위조된 전서가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지금쯤이면 패월께서 하곡으로 들어오고 계시겠군.”
은수는 미리 파악해 둔 대로 왕이의 방 한쪽 벽에 돌출된 부분을 눌렀다.
딸깍. 그그그극.
벽에 작은 문 하나가 생겼다.
안쪽에 있던 전서구들이 왕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놀란 것인지 일제히 날개를 퍼덕거리며 울어 대었다.
“자, 그럼 이건 북해에 보내고, 이건 마궁에 보내고…….”
은수는 서로 다른 내용이 담긴 내용을 전서구를 통해 날려 보냈다.
푸드득!
마궁과 북해를 향해 날아가는 전서구들이 경로를 잡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은수는 품에서 적서를 꺼냈다.
“자, 이제 패월을 찾아가 볼까!”
찌직!
* * *
콰앙!
마치 때아닌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육백이 넘는 털북숭이 괴인들이 뿜어내는 한기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땅바닥이 얼어붙고 나무들에 허연 서리가 맺혔다.
“놈들을 죽여라!”
대막혈궁을 되찾았으나 서량은 계속해서 방어만 할 수는 없었다.
놈들이 자신들을 농락하듯이 공격하고 도망치자 열이 뻗친 것이다.
“동주님, 너무 깊이 내려왔습니다. 북천대공께서 명하신 것은 대막혈궁을 지키는 것입니다.”
“닥치거라.”
백괴의 말에 서량이 화를 잔뜩 머금은 일갈을 내뱉었다.
“나는 저놈들을 반드시 죽여야겠다.”
독기가 잔뜩 치민 그의 귀에 백괴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그때 추련화의 말을 들어야 했는데…….’
백괴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서량.
뛰어난 고수임에는 틀림없었다. 빙마동 최강의 고수임에는 부인할 수 없었으나 화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동안은 추련화를 앞세운 빙동마령 다섯이 그의 화를 억눌러 왔으나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어 버린 뒤로는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대막혈궁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이다.
이제는 백괴가 보아도 그들이 일부러 자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수가 말해 주고 있었다.
적들은 패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대막을 떠나온 지 닷새.
그사이 수십 번의 전투가 있었다.
계속 패해 후퇴하고 있는 그들의 피해는 다 합쳐야 수십이었으나 빙마동의 무인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수십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일천이라는 병력으로 대막혈궁을 공격했던 그들의 병력은 어느새 반도 채 남지 않았다.
백괴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지만 핏발이 선 서량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하아압!”
적의 후미에서 도망치던 창을 든 무인이 방향을 틀어 솟구쳤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들을 괴롭혀 온 놈이었다.
쩌저저정!
단 한 번의 충격이 만들어 낸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서너 명의 무인들이 쓰러졌다.
“이노옴!”
서량이 수없이 많은 얼음 창을 만들어 쏘아 내었다.
깡! 까가가강!
창대의 궤적이 만들어 낸 폭풍이 얼음 창을 모조리 빨아들여 터트려 놓았다.
“합!”
극음의 장력을 뿜어내는 서량과 어우러진 무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서량이 한기를 잔뜩 머금은 장력을 발출하자 놈이 단번에 거리를 벌리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놈! 거기 서라!”
파앙!
분기탱천한 서량이 얼굴이 벌게져서 뒤쫓았다.
‘어찌 모르는가.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한숨을 쉬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빙마동의 괴인들은 동주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생명줄이기 때문이었다.
극음지기를 극한까지 수련한 서량은 만년빙정이나 다름없었다.
극음지기를 몸 안에 받아들인 빙동마령들과 달리 빙마동의 괴인들은 한기를 지속적으로 머금어야 한다.
북해에서는 동토가 주는 한기로 버틸 수 있었지만 중원에서는 서량이 내뿜는 극음지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백괴가 가진 극음지기만으로는 모두의 한기를 채워 줄 수가 없었다.
대막혈궁을 차지한 후 기다렸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았어야만 했다.
대막혈궁을 되찾은 보상으로 만년빙정을 돌려받았다면…….
‘결국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을.’
북해를 떠나온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없었다.
빙마동주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한기를 흡수하지 못하고 소멸할 것인지…….
빙마동의 괴인들은 죽음이 빤히 보이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