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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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06화
205화. 소청의 걱정
백효는 운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를 통하면 마종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백효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구 사형은 서천맹을 손에 넣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네.”
“…….”
“관을 이용해 중원 무림에 혼란을 주려던 혈승도 죽었지. 물론 우리의 움직임을 감추었으니 계획은 얼추 성공했다고 보아야 하나?”
무언가 답을 듣기 위한 물음은 아니었지만, 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혈승이 죽은 이상 마궁도 힘을 잃어버린 셈이지. 남은 건 나와 북해뿐이야.”
“그렇습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백효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참 궁금하지 않은가? 마천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역천대공과 열두 세주 중 여덟이 죽었단 말이야.”
“…….”
“전력으로 따지자면 피해가 이미 오 할을 넘었네. 그런데 마종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으시네. 어떤가? 자네의 생각은?”
“속하의 지위가 낮아 대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
백효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번 말해 보게. 자네라면 어떨 것 같은가?”
“…….”
운이라는 사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순간 백효의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지켜본다라……. 훗, 그렇군.”
백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마천의 눈과 귀는 중원 무림에 깔아 둔 세작들이었다.
하지만 마종의 눈과 귀는 바로 자신을 ‘운’이라는 이름으로 밝힌 사내였다.
그것이 본명인지. 그리고 그의 수하가 정확히 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마천의 곳곳에 숨어서…….
자신은 물론 마천의 모든 것을…….
세주들이나 마천의 무인들이 죽는 것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를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종에게 자신과 마천은 이용의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삼궁의 정수를 모두 얻어 출관할 그날까지 중원을 혼란하게 만들고 중원 무림의 전력을 줄여 놓을 수단.
백효가 미소를 지우며 말고삐를 힘껏 움켜쥐었다.
“압적!”
“예, 대공!”
“얼마나 남았나?”
“막 동토를 벗어났으니 앞으로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한 달…….”
기존에 예상했던 것보다 보름이 앞당겨졌다.
“동토를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대막혈궁까지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며 달린다.”
“알겠습니다!”
* * *
“거웅과 귀랑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예. 동주님!”
백괴의 말에 서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소청을 뒤쫓는 사이 백괴와 빙마동의 무인들은 대막혈궁을 손에 넣었다. 중원 무인들은 쫓겨 나간 채로 혈궁의 외곽에서 진을 쳤다.
남북의 경계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면 다 죽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백괴의 대답에 서량이 주먹을 움켜쥐고 의자를 때렸다.
“망할!”
추련화의 말이 맞았다.
대막혈궁이 자신들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라는 예측은 틀렸으나 놈들이 자신들의 후미를 쳤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순간 서량은 자신이 뒤쫓았던 소청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놈이?”
“…….”
“이런 찢어 죽일 놈…….”
서량이 어금니를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아 대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소청에 대한 분노만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빙동마령은 빙마동의 핵심이었다.
빙마동의 괴인들은 모두가 만년빙정이 뿜어내는 극음지기를 수련해 온 자들이었다.
하지만 극음지기 자체를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이 자신과 다섯 명의 빙동마령이었다.
또 다른 빙동마령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동족들이 죽어 나갈 터였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또한 만년빙정을 되찾기 위한 일이었다.
만년빙정이 없다면 빙동마령이든 빙마동의 일족이든 더 이상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더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만년빙정만 돌려받는다면…….
“우리 백모 일족은 다시 부흥할 수 있다.”
서량의 눈동자에 시퍼런 살기가 피어올랐다.
“백괴.”
“예, 동주님.”
“본대가 올 때까지 절대로 대막혈궁을 내어 줘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백괴의 대답에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움직이지 않는군.”
“그래, 지금쯤이면 후미를 기습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까.”
대막혈궁이 보이는 산자락에 소청과 혁련휘가 자리를 펴고 앉았다.
조촐하게 꾸며진 술자리.
“어찌할 생각인가?”
“충분히 보여 주었으니 이제 슬슬 정리해야지.”
소청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자 혁련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여 주었다고? 무엇을?”
“이틀이 넘게 시간을 끌었으니까 마천의 세작들이 대막혈궁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이곳저곳에 전했을 거야.”
혁련휘는 세작들에 대해 떠올렸다.
제갈휘문의 명령에 의해 정사의 원로들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세작들을 소탕하는 작전이 시행되는 건가?”
“그래. 아마 지금쯤 제갈휘문이 움직이고 있을 거야.”
“흠, 전쟁 전에 세작들을 소탕해 저들의 눈과 귀를 가릴 셈이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될까? 북해빙궁이 안정적으로 대막혈궁에 들어온다면 마궁이 움직이려 할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제갈휘문은 그리 수가 낮은 사람이 아니야.”
“따로 이야기한 것이 있는 건가?”
“아니, 없어. 하지만 나라면 저들의 세작들을 이용해 정보를 역으로 흘렸을 거야.”
“역이용한다고?”
“그래. 제갈휘문은 계략에 능한 사람이야. 북천맹의 전력을 빼서 서천맹으로 집중시켰어. 이제 서천맹을 움직여 마궁을 공격하는 척을 해야겠지.”
“그렇군. 하면 서천맹의 움직임 때문에 마궁의 진격을 어느 정도 멈추게 할 수 있겠군. 그렇게 되면 세작들이 전해 준 역정보 때문에 북해가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 마궁이 움직였다, 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되면 북해는 알아서 중원으로 들어올 거야. 일종의 역공작이지.”
“그렇군.”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별동대와 함께 있는 소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근래 소강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군. 뭔가 예민해 보여.”
“…….”
그의 말에 소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녀석, 때늦은 사춘기라도 왔는지 반항이 심하더라고. 애도 아닌데……. 뭔 불만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될 것인데. 애초에 별동대와 함께 부른 것이 실수였어. 그냥 서천맹에 남겨 두는 것인데.”
소청이 두서없이 투덜거리자 혁련휘가 피식 웃었다.
“자네도 고민이라는 것이 있었군.”
“무슨 소리. 나는 언제나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네. 그리고 이건 고민이라기보다는 걱정이야.”
“내 걱정이나 좀 해.”
“자네를 걱정하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네하고 소강이 같은가?”
“어허, 이 사람. 섭섭하네.”
“섭섭할 것도 많다. 자네 정도만 되면 걱정도 안 하지. 소강은 아직 어리단 말일세.”
“세 살밖에 차이가 안 나.”
“엄청난 차이지.”
“풉!”
소청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혁련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혁련휘가 보기에는 소청이나 소강이나 똑같아 보였다.
동생을 걱정하는 형이나, 형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동생이나…….
“왜 웃나?”
“그냥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머릿속에는 칠십 먹은 노인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천지를 뛰어다니면서 어린 동생 하나 어쩌지 못해 투덜거리고 있다니.”
“휘,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혁련휘가 소청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매우 쉬운 문제일세. 해법은 정해져 있어.”
“뭐?”
“빙마동을 소강에게 맡겨 보게.”
“소강에게?”
소청은 머릿속에 빙마동주 서량을 떠올렸다.
그는 강하다.
특히나 그의 극음지기는 열양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안 될 말일세.”
“…….”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련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아, 소강의 고민은 자네에게서 비롯된 것이네.”
“…….”
“소강은 그저 자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게야. 그런데 자네가 너무 감싸고도니 싫을 수밖에.”
“그런 적 없어.”
소청은 애써 부인했다.
“아닌 척하지 말게. 소강도 이미 제몫을 다 하고 있네. 자네의 눈으로 보면 아직 한참은 부족해 보이겠지만 별동대에서 가장 강하단 말이야.”
“알고 있…….”
소청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삐죽거렸다.
“한번 맡겨 보게.”
“…….”
“잘해 낼 거야.”
혁련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청의 어깨를 두들겼다.
“소강과 별동대에게 빙마동의 일을 맡겨 보게. 우리는 구경만 하자고.”
“…….”
“내가 가서 전하지.”
“이봐! 휘!”
혁련휘가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소청이 그를 잡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한숨을 쉬었다.
“젠장…….”
참으로 혈육이라는 것은 이상했다.
혁련휘는 언덕을 내려가자마자 별동대와 함께 있는 소강을 불렀다.
“소강!”
“예, 형님.”
소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혁련휘는 좋은 형이었지만 질투의 대상이었다.
또 둘이서 언덕 위에서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필시 이번 전투와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빙마동, 가능하겠지?”
“예?”
빙마동? 소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청이 네게 맡기라더군. 우린 옆에서 지원만 할 거야.”
혁련휘의 말에 소강이 고개를 들어 멀리 소청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서 검은 피풍의를 휘날리고 있는 소청이 보였다.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는 순간 소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허락.
“예!”
소강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대신 저들을 끌어내서 산서까지는 유인해야 한다. 우리는 옆에서 대충 도망만 치다가 빠질 거야.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소강이 눈을 눈빛을 빛내며 전의를 불태웠다.
소청에게 보이고 싶었다.
자신도 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이번 일을 성공시켜서 혁련휘와 함께 소청의 옆에, 지켜 줘야만 하는 동생이 아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이자 한 명의 무인으로 다가갈 것이라 다짐했다.
“언제! 언제 시작하면 됩니까?”
소강의 달뜬 목소리에 혁련휘가 피식 웃었다.
“일단 대군사의 연락을 기다린다. 준비가 되면 그때 움직일 거야.”
“알겠습니다.”
소강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형이 전해 주라더라.”
“…….”
“믿는다고.”
혁련휘의 거짓말이었지만 더없이 좋은 격려였다.
소청은 자신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는 소강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소강 몰래 눈을 찡긋거리는 혁련휘의 모습.
멀리 있어도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쳇, 휘 녀석…….”
이럴 때 보면 혁련휘는 제법 사기라는 것도 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림의 대영웅이 저래도 되는 거야? 거짓말이나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투에 불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맡겨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