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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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27화
226화. 세 사람의 밤
산서를 떠나 진가로 향하는 소청 일행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모자겸은 부족원들을 데리고 먼저 서천맹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마궁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흑비의 전갈에 그다지 바쁘지 않은 걸음이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가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이 마지막 전투를 향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마지막 전투는 중원 무림 역사상 다시없을 혈전일 것이고 무림의 모든 이들이 그곳을 향해 달려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천으로서도 중원으로서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마종 종리세.’
혁련휘와 함께 나란히 말을 달리던 소청은 문득 적의 수장이라는 그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되돌아왔다는 그.
소청에게는 목적 없는 귀환이었으나 마종 종리세의 귀환은 달랐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소청, 그 마종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란히 말을 달리던 혁련휘가 물었다.
“나도 그의 이름이 종리세라는 것과 마천의 세 번째 후계자였다는 것 이외에는 잘 몰라.”
“모른다고?”
“음……. 그때의 나는 무림의 중심에 있지 않았으니까.”
“아, 그랬지. 신투였다고 했지?”
“그래.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그는 이미 과거에 실패를 경험했었어. 분명 치밀하게 준비를 했겠지.”
“흠, 하지만 그들의 세력은 이미 다 무너지지 않았나? 남은 것은 마궁뿐이네.”
“알아. 하지만 불안해.”
“…….”
“그는 아직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오랫동안 어둠에 숨어 준비해 온 계획이 틀어지면 화가 나서 미쳐 버릴 법도 한데 말이야.”
“하긴…….”
“분명 믿고 있는 것이 있는 거야.”
소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실 소청은 종리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마천 삼 공자.
구자겸, 백효, 종리세.
과거의 그들은 새외를 이끌지 않았다. 오직 마천의 병력만으로 중원 정벌을 시작했었다.
그것만으로도 뭉쳐지지 못했던 중원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혁련휘와 제갈휘문이 정사 무림의 연합을 이끌어 내고 그들에 대항함으로써 마천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마천의 세 공자들 간에 내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정사의 무인들이 집결해 있다.
운남의 모자겸이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구자겸이 이끄는 혈궁의 이만 무인을 막아 내었고, 백효가 이끄는 북해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모두가 그 모든 것이 소청 덕분이라 생각했지만 스스로는 그저 가교 역할만 한 것이라 생각했다.
중원은 강하다.
전생에 경험했던 마천의 힘이 감히 중원을 유린하지 못했을 만큼…….
하지만 혈승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마종은…… 이미 삼궁의…….
혈승이 죽어 가며 남긴 말이었다.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했고 그가 무림에 나오면 피로 잠길 것이라 했다.
그게 무슨 소릴까?
‘대막혈궁, 북해빙궁, 그리고 토번의 백마궁.’
삼궁(三宮)이라는 것은 분명 그 셋을 지칭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곳에 어떤 힘이 감추어져 있기에…….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의 나는 뭐고 신투는 또 뭡니까?”
소청과 혁련휘가 말을 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옆으로 다가왔던 소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응? 아, 그런 게 있어.”
“예?”
“넌 그냥 이 형님들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돼.”
“아, 혁련 형님이 대단하신 거야…….”
“아니! 지금보다 훠얼씬!”
“…….”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니까?”
혁련휘가 소강의 입을 막기 위해 얼버무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또 저만 빼고 두 분이서 무슨 비밀 이야기를…….”
“야!”
“예?”
“지난번에 단강구의 싸움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
“네 명으로 막고 있었단 말이야. 널 돕느라고 나는 물론이고 다들 죽을 뻔한 거 알지?”
“그 이야기가 왜…….”
소강의 잘못이 아니었다.
혁련휘가 한음곡의 무인들을 막고 있었던 것은 그의 결정이었고 승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 말이지. 근데 이 형님이 주는 술을 거절하겠다고?”
“아니, 그런 이야기가……. 하아…….”
결국 소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청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보게 소청.”
“응?”
“잠깐 쉬어 가는 것이 어떻겠나?”
혁련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소청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산자락에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유가 아닌가? 화산에서 옥루주를 넉넉하게 얻어 온 참이니 술이나 한잔하며 쉬어 가세.”
나쁠 것 없다.
산서를 떠나오며 급하지 않게 이동하고 있는 것도 휴식을 위함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소청이나 혁련휘에게도 그러했고, 소강과 별동대에게도 그러했다.
내일부터는 다시금 그들을 몰아붙여 마천과의 전투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쉬도록 하지. 소강, 적절한 자리를 찾아봐라.”
“예, 형님!”
금세 모닥불이 피워지고 별동대의 무인들과 비마대원들이 그 주위로 둘러앉았다.
황보인이 별동대원들을 향해 지난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자 순식간에 모닥불 주위가 경극 무대처럼 변했다.
때로는 웃게도 했고 때로는 긴장감을 만들기도 했다.
‘참 대단한 능력이군.’
소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린다.
별동대.
무림 세가들의 후계들.
격체전공으로 전에 없던 힘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치열했던 전투 속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옥명자, 황보인, 악이군, 서문중걸, 팽천기, 승혜, 언청연…….
‘일곱, 소강을 포함하면 여덟인가……. 아니군, 방효곤까지 아홉이군.’
악표와 서문란은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가문으로 돌아갔고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가 전투 중에 죽었다.
방효곤은 북해와의 전투가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소청의 곁에서 이것저것 배울 게 많다며 잔류를 택했다.
그리고 비마대.
처음 소청을 따랐던 이들은 모두 스물이었다.
팔이 잘린 초사는 제갈휘문의 곁에 남았고, 일곱이 죽어 열둘밖에 되지 않았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강.”
“예?”
황보인의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중에 소청이 술병을 놓고 일어났다.
“잠깐 따라오너라.”
소청의 말에 소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혁련휘가 힐끗 돌아보았으나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형제간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터라 생각했다.
일행과 떨어져 한참이나 숲 안쪽으로 들어간 소청이 멈추었다.
“앉아라.”
“예?”
“좌정해.”
“…….”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소강은 두말없이 좌정했다.
“팔괘공을 운기해라.”
그 말과 함께 소청이 소강의 뒤쪽에 앉아 명문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어쩌면 형으로서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일지도 모른다.”
“……!”
운기를 도와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도움’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형님…….”
우웅!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명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뜨끈한 기운에 소강이 급히 팔괘공을 일으켰다.
“본시 하나에서 음양이 나누어지고 음양이 다시 나누어지니 이를 사상이라 한다.”
“…….”
소청이 처음 자신에게 팔괘공을 가르치며 알려 준 구결이었다.
소강은 눈을 감고 소청이 이끄는 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나 나누어졌으니 다시 모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
웅!
소청이 주입한 진기가 소강의 독맥 여덟 곳을 흘렀다.
“회음, 명문, 백회, 단중……. 이 네 곳을 기억해라.”
소청은 자신의 기운으로 강제로 네 곳의 혈도를 거대하게 부풀렸다.
“으윽!”
소강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소청 자신은 곤륜 태청신단의 도움을 받았기에 더욱 강한 힘으로 사상을 이루어 내었지만 소강에게 어떤 방법이 어울릴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강제적이기는 할지라도 그동안 모든 것을 스스로 이끌어 온 소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소강.”
“…….”
“두 곳의 힘이 강제로 합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우러지게 해야 해. 그것이 진정한 축이다.”
‘축……?’
“두 개의 혈 자리가 한곳에 어우러지듯이 뭉치면 알아서 나머지 혈 자리가 스스로 반응을 할 거다.”
소청은 몇 번이고 자신의 기운으로 소강의 혈 자리를 어루만졌다.
늘이고 섞기를 반복해 네 곳에 고루 자리 잡을 때까지…….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소청의 손이 소강의 명문혈에서 떼어졌다.
하지만 소강은 여전히 운기에 빠져 있었다.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바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강이라면…….
사람들은 진소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자신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소청이 아는 소강은 혁련휘와 비슷한 부류였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닫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을 더한다.
그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었다.
타고난 재능에 묵묵히 노력하는 성실함을 가졌으니 소강은 정천의 중심으로 자랄 것이고 진가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자신이 없더라도…….
“…….”
소청이 멀찍이 물러나 소강을 묵묵히 바라보는데 혁련휘가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언제부터였나?”
“…….”
그의 다가섬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소청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진가에 남을 생각이 없었군.”
“그래.”
“언제부터였나? 소가주 위를 소강에게 줄 때부터?”
“아니, 처음부터.”
“처음부터라…….”
나지막하게 되뇌던 혁련휘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많이 섭섭해할 텐데?”
“그렇겠지.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차라리 계속 진가에 남아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마천과의 전투가 끝나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그때로 돌아갈 텐데?”
혁련휘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
소청이 피식 웃으며 혁련휘가 내민 술병을 입가에 가져갔다.
“만약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진즉에 가문을 나왔을 거야. 아니 할 수도 있었지. 내 오지랖만 아니었으면…….”
소청은 자신의 어머니 섭약란이 당태위를 위해 준비했던 설삼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확인하지 못했던 마천 비고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마천이 만약 내가 알던 그곳에 있었으면 오래전 진가와의 연은 끊어졌을 거야.”
“…….”
“그런데 계속해서 엮이게 되더군. 마천이든, 진가든, 무림이든…….”
“음…….”
“마종 종리세가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를 이곳에 보낸 것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안배가 아니었을까 하는…….”
“안배?”
“그래.”
소청이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이 하늘에 박혀 빛나고 있었다.
“난 저기 밤하늘의 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사를 바꿀 만큼의 힘 따윈 없는 도둑이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시 돌아온 뒤에는 내가 이렇게 똑똑했었나 싶을 정도로 변해 있었어. 때로는 내 정체성에 대해서도 수많은 의심을 했지. 돌아온 나는 막야인가? 아니면 진소청인가 하는 생각들 말이야.”
혁련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분명 무언가 뜻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마종을 만나게 되면 알게 되겠지. 그 끝이 죽음이든, 아니면 삶이든……. 그가 모든 것의 시발점이니까.”
“…….”
한참을 말없이 밤하늘을 쳐다보던 소청이 혁련휘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모처럼 감상에 젖어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두서없이 늘어놓았군.”
“…….”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쉬게. 난 저 녀석 호법이나 서 줘야 할 듯하니…….”
소청의 말에 혁련휘가 소강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밤을 지새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혁련휘가 일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소청. 어찌 되더라도 자네와 난 친구겠지?”
“당연한 소릴…….”
소청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린 혁련휘는 흑룡아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마종과는 자네가 싸우게. 나는 자네를 지킬 테니까.’